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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치악산 화가

by 한종호 2021. 11. 4.


치악산 기슭, 혼자 사는 화가를 만났습니다. 싸리 울타리 반쯤은 기운 허름한 집,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그랬습니다. 쌓인 눈 시퍼렇게 빛나는 좁다란 밤길을 휘휘 돌아 막바지처럼 선 집 앞에 섰을 때, 폐가인 듯 어둠뿐인 집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잠든 것 같았습니다. 한쪽 흙에 사는 이유가 시로 적혀 걸린 문을 열고 집주인이 나왔을 때 집주인 또한 집과 다르지 않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온갖 것의 무장해제, 편안했습니다.


속살 투명한 발가벗은 여자와, 울고 울다 숨이 멎은, 뒤로 젖힌 얼굴엔 허구렁인 듯 입 안 목젖이 가득한 그림을 보며 그게 모두 그의 한 모습임을 헤아립니다. 이미 울음은 가둘 수 없다는 듯 액자도 없이 덜렁 종이로만 걸렸습니다. 


겨울밤, 촛불 하나만 켜도 방안의 물이 얼지 않는다는 쉽지 않은 말을 들으며 그가 지켜가는 얼음 같은 고독을 봅니다. 도망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백지에의 공포는 그나마 그만한 시간 끝에나 이를 수 있는 것임을, 나직하고 서둘지 않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웁니다.


미친 듯 그어댄 먹물을 따라 몇 개 나목이 서고, 그 아래 끝 모르게 펼쳐지는 설원을 보며 갇힘과 해방을, 주저와 비상을, 견고함과 나약함을 함께 봅니다.


가슴속에서 꺼내듯 화첩 속에서 꺼내든 몇 장의 그림, 박수근 그림을 닮은 질박한 그림들이었습니다. 그걸 흙으로 그렸다는 말을 난 거짓처럼 들었습니다. 통속에 담아 놓은 흙을 보면서도, 곱게 갈아놓은 돌가루를 보면서도 쉬 믿겨지질 않았습니다.


통상의 생각에서 벗어나 뜻밖의 예외를, 그 예외에서 전해오는 적지 않은 충격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밖엔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편하게 누운 덩치 큰 착한 소, 그 위에 올라 탄 아이, 소와 한가로이 모이 쪼는 닭과 병아리, 아이 품에 안겨 잠든 까치, 흙냄새 확 풍기는 그 모든 그림들은 정말 흙으로 그려진 것이었습니다.


사람 밟는 흙은 안 되고, 농사짓던 흙도 안 되고, 아교나 접착제를 써서도 안 되고,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 방법을 찾는데 걸렸다는 5년이라는 세월이 오히려 짧게 여겨졌습니다. 혼자만의 실패를 소태 씹듯 거듭한 5년의 세월, 화가에겐 구도의 길이었습니다.


여우울음인 듯 치악 계곡 겨울밤 바람은 매서웠지만, 잔 수 잊고 연신 건네는 차를 마시며,  마음에서 길어 올리는 듯한 이야길 들으며 겨울밤이 깊었습니다. 그렇게 보내는 겨울밤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이곳에 쓰지 못합니다. 그게 도리이지 싶습니다. 모든 게 허름해 흙을 닮은, 흙으로 그림을 그리다 흙으로 돌아갈 사람, 그가 지켜낼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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