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서 거니시는 분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나는 너희가 메고 있던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너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였다.”(레 26:11-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수고 많으셨지요? 많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흔쾌할 수만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버티며 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 가운데 하나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지요? 유행가 제목이 요즘 우리 마음을 참 적실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만 쌓이네.’ 제 마음이 그러한 것 같이 여러분의 마음도 그러한지요? 

새벽바람이 이젠 선득합니다. 8월 중순 지나면 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어쩜 그리 딱 들어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숙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할 때 말입니다.


세상의 아픔은 여전합니다.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혼돈에 빠진 아이티에 강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수만 채의 집이 붕괴되거나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기본 의약품은 이미 동이 났고 항생제와 마취제까지 부족하여 수술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를 동반한 열대성 저기압 그레이스가 다가오고 있어 산사태와 건물의 추가 붕괴가 우려된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반갑지 않는 손님이 ‘그레이스’ 곧 ‘은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이 구절은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 즉 차별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재난에도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재난은 대개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되곤 합니다. 그들은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모욕을 당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라오서의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치 성경을 패러디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라오서, <루어투어 시앙쯔>, 최영애 옮김, 통나무, p.495)


라오서는 비가 개이면 시인들은 연잎에 구슬처럼 맺히는 물방울을 노래하고 저 먼데서 떠오르는 쌍무지개를 읊조리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를 맞고 가장이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온 식구가 굶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한 차례의 비가 기녀나 좀도둑을 만들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라오서의 눈을 통해 아이티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깨끗한 물과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하도록 돕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려움에 처한 아이티를 돕기 위한 모금활동에 참여하려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이 절실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상황도 매우 어렵습니다. 20년 간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돌아왔습니다. 카불 공항은 공포에 사로잡혀 탈출하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막대한 현금을 가지고 국외로 이미 도망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성 각료와 관료들 일부는 피난을 거부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디 무사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문가들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두고 이런 저런 분석에 여념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고, 미국의 중동 전략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되었던 소련과 무자히딘 간의 전쟁을 숙주로 하여 탄생한 탈레반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의 주둔으로 세력을 잃은 듯 보였지만 이제는 엄연한 현실로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상당한 혼란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테러와 공포가 일상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쟁과 테러는 우리 삶을 고양시키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무너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늪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일상을 가장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붕이 있는 집에서 잠을 자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나누고, 아침이면 일터로 가고, 조금 시간 여유가 있을 때는 벗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고, 가끔 여행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기회가 아닙니다.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 도덕적 주체로서의 삶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사회적 일탈 행위를 하는 이들을 함부로 단죄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로 살면서 가족과 생이별한 채 지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다른 이들의 수고 덕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제 농촌이든 어촌이든 이주 노동자들이 없으면 생산 활동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계절노동에 동원되는 이주 노동자들은 비좁은 다인승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비좁은 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의료혜택도 부족하니 감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떠돌며 살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난민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더라도 그 시절을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던 나그네였다.”(출 22:21)

 

성경은 학대당하는 이들이 정의를 호소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제가 늘 마음에 명심하고 있는 몇 가지 경구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야스퍼스). ‘인간(human-being)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being-human)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요구받음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우리 인간성을 결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까요?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처지는 얼마나 기이한가? 우리들 각자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를 채 이곳에 잠시 머물 뿐이다. 목적을 알 것 같은 느낌이 가끔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저 일상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무엇보다 그 미소와 안녕에 우리의 행복이 오롯이 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친분은 없지만 공감이라는 끈으로 서로 얽혀 있는 미지의 타인을 위해. 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의 온 삶이 산 자든 죽은 자든 상관없이 타인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받은 만큼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기억한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강승희 옮김, 호메로스, p.23-24)


‘우리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백이 놀랍습니다. 이 말은 나의 존재가 이웃 덕분에 지속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과제는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는 그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탐구하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결국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하신 말씀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지근거리에 있는 이들을 아끼고 존중할 줄 모른다면 그는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은 그런 사랑을 배우고 익히는 도량입니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는 말씀이 가슴 벅차게 다가옵니다. 우리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지러운 시절일수록 기초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익에 담백해질 때 우리 속에 여백이 커집니다. 여백이 있어야 다른 이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런 소낙비가 내린 후 하늘이 청명합니다. 깨끗한 대기는 사물들을 왜곡됨 없이 보여줍니다. 우리도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지내시는지 두루 궁금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평화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8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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