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깊게 살피고, 마음을 다해 응답해요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마 7: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일기가 고르지 않아 생활에 불편이 많습니다. 불볕더위에 시달리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푸른 하늘만 믿고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비를 만나기 일쑤입니다. 이제 장마철이 다가온다니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캐나다 서부 지역의 온도가 거의 50도에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불편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용기를 내는 이들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 지붕 수리를 마쳐서 다행입니다. 지붕을 덮은 판넬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고 새롭게 도색을 했고, 곳곳에 난 크랙을 메우고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다각도로 애쓰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인지라 긴장한 채 여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는 지하 친교실에 내려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환기를 하면서 교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그 공간에 정겨운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찰 날이 언제일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7월에 접어들면서 모임에 대한 제한이 조금씩 풀리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확진자가 오히려 늘고 있는 이 상황이 걱정스럽습니다. 백신 접종이 다시 재개되면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위기의 시간입니다. 예배 참석 인원을 조금씩 늘려가려 하지만, 각자가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흡기 증상이나 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분간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는 이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장소가 곧 교회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예배에 집착하는 무리들을 무섭게 질타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 1:12) 가끔 이 말씀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배제된 신앙 고백은 허위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예배를 드릴 때는 외경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두루 피곤할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교 교수인 박희병 교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 2020)을 곁에 두고 아무데나 펼쳐 읽고 있습니다. 이미 <선인들의 공부법>, <연암을 읽는다> 등의 책을 통해 익숙한 저자입니다만, 이번 책은 좀 특별합니다. 제목에 들어있는 ‘엄마’라는 말 자체가 친숙하면서도 낯섭니다. 초로의 아들이 구순에 이른 어머니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일은 별로 없거니와 그런 호칭이 제목에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뭔가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2018년 10월부터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에 시달리다가 꼭 1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자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 곁을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어머니는 기억이 흐리마리한 중에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말들은 전후 맥락이 분명치 않고, 때로는 의미 없는 말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해독되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알았기에, 단편적으로 발화되는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사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을 공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 속에는 중층의 경험과 역사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 닦았나?” “네 이가 희어졌다.” 이 말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어머니의 회한과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 형편상 작은 아들의 이는 교정해 주었지만 큰 아들의 이를 교정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들의 이가 고르지 못하고 희지 않은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네 이가 희어졌다”는 말은 어떻게든 그 회한을 풀고 싶은 어머니의 바람을 나타낸 것일 겁니다.

“춥다. 목도리 하고 다니라.” 박희병 교수는 이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나를 보는 엄마의 시선, ‘근심’과 ‘걱정’의 시선이 느껴지는 말이다. 근심과 걱정은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도 늘 갖고 계시던 것이지만 병원에 계시면서 더 커지고 더 뚜렷해진 듯하다. 생활과 의식이 극도로 제한되고 단순화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눈에는 초로의 노인인 내가 더욱 ‘아이’로 보인 듯하다.”(55쪽)

어머니의 말을 다 받아 적고 그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애를 쓴 끝에 박희병 교수는 어머니의 말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 봤다.”(397쪽)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늘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언어화되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유심히 살피고 염려해줄 때, 너무 노골적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치유 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가끔 손녀들이 집에 오면 아이들은 신나게 놀다가도 쇼파나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얼굴을 가만히 살핍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생긴 주름이며, 성긴 머리카락, 얼굴에 생겨난 검버섯, 더러더러 보이는 흰 눈썹까지 헤아리며 아이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제 얼굴을 그렇게 똑바로 자세히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 아이들이 전부일 겁니다. 따뜻한 바라 봄은 따뜻한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따뜻한 언어는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미국의 가톨릭 노동 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의 전기를 썼던 로버트 콜스는 도로시라는 사람의 사람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고 끊임없이 그들과 엮여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잠시 동안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로버트 콜스, <환대하는 삶>, 박현주 옮김, 낮은산, p.33)

이용하기 위해서나, 또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얼음 같은 것이 녹고 있음을 알아차릴 겁니다.

 

우리는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종으로 팔렸던 요셉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꿈쟁이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면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이들의 기색을 잘 살피고 그들의 염려를 덜어주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역시 그곳에 수감된 이집트 왕의 두 신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어린 근심을 보고 묻습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창 40:7b)

 

이런 관심 덕분일 겁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로의 꿈까지 해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는 두려움이나 타자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냈습니다. 나찌가 만든 수용소에 갇혔던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동료 수감자들의 좋은 벗이 되려고 애썼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목사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요 6:3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절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그늘 혹은 연약함을 보시고, 그것을 조용히 품에 안으실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과 만나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와 깊이 만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지내는 것은 예수를 만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곳곳에 무궁화꽃이 단아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능소화 역시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자기 때를 놓치지 않는 식물들의 성실함 앞에 설 때마다, 투덜거리느라 자기 때를 살지 못하는 유정한 인간의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의 말과 표정과 몸짓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슬그머니 그 부름 혹은 요구에 응답하십시오. 조금 더 인내하면서 이 어려운 시간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고, 그 기쁨으로 새로운 세상을 빚으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1년 7월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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