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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by 한종호 2020. 8. 14.

신동숙의 글밭(211)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장마와 폭우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삼복 더위의 징검돌로 이어지던 8월의 한 여름 빛깔이 흐지부지해지고 있다. 이미 입추(入秋)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귀를 쨍쨍 울리던 한낮의 매미 소리가 여름 하늘을 쨍 울리지도 못하고 벌써 순하기만 하다.


저 혼자서 무더운 여름 한낮에 독창을 하던 매미 소리였지만, 가슴을 뚫고 들어오던 소리와는 달리 한결 순해지고 초가을의 풀벌레 소리와 섞이어 합창이 되었다. 여름과 가을이 나란히 부르는 8월의 노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들려오는 소리도 바람의 냄새도 다른 초가을 같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삶의 모든 터전을 쓸고 간 물난리에 망연자실해 있을 이웃들의 마음이 멀리서도 무겁게 전해진다. 잠깐 쨍하고 나타난 여름 하늘과 햇살에 세간살이를 말리려 집밖으로 힘껏 끌어내 널어 보아도 이미 깊게 배인 흙탕물 자국은 씻겨지지 않고 가슴에 얼룩을 남긴다. 그 허망한 마음을 어느 누가 달래줄 수 있을까. 아마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함께 부대끼는 도움의 손길들이 수해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이 여름의 하늘과 햇살이 아닐까 싶다.



우리집에도 작은 소동이 있었다. 며칠 전 씽크대가 막혀서 하루치의 설거지를 그대로 쌓아둔 채 꼬박 이틀을 보낸 것이다. 젖가락으로 뚫어 보아도 소용이 없고, 배수관을 흔들어 보기도 하며, 막힌 물길이 저절로 뚫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지만, 기다림의 시간도 소용이 없었다. 이 만큼의 불편함도 이렇게 생활을 흔들어 놓는데, 수해민들의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는 것이다. 


다음 날 막힌 배수관을 시원하게 뚫어 준다는 액체를 어쩔 수 없이 붓고 말았다. 이렇게 흘려 보낸 독극물이 막힌 배수관을 뚫어 주는 것으로 우리 집에는 유익이 되겠지만, 이미 흘려 보낸 후의 뒷일이 마음에 얼룩처럼 남는다. 찌꺼기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물 속 생명들이 그 유독성에 숨을 다할지 아마도 바다 끝까지 하늘까지 물 한방울까지도 그 흔적이 이어지리라.


다행히 액체를 부은지 서너 시간만에 씽크대의 물길은 뚫렸다. 수돗물을 시원하게 틀어서 설거지를 하며 그릇에 눌러 붙은 육신의 때를 말끔히 씻겨 내니 마음까지 개운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가슴으로 흐르는 생각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흘려 보내는 물의 양이 많아질 수록 하늘의 비구름은 더 무거워질지도 모른다는 데 흐르는 물처럼 생각은 멈춤이 없다. 


이렇게 살아서 생명을 먹고 쓰는 일과 자연의 순환을 생각하다 보면, 나 한 개인도 이번의 폭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지구의 자연 환경에 변화를 일으킨 한 원인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살아서 숨쉬는 모든 생명들에게 미안해 하며,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해 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선 이렇게 많은 물을 흘려 보내며 씽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산을 무슨 수로 넘을 수 있을까.


강변에 알을 놓아 산책길에 귀찮게 굴던 날벌레도 물웅덩이에 새끼를 쳐서 밤잠을 설치게 하던 모기도 물난리에 다 씻겨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스름 새벽녘에 깨었더니 창밖에 풀벌레 소리가 순하다. 밤새 그렇게 순한 소리로 부드러운 달빛처럼 우리의 여름 밤을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도 들려올 순한 풀벌레 소리가 물난리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이웃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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