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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이 시대의 ‘하나님 생각’

by 한종호 2015. 3. 6.

한종호의 너른 마당(12)

이 시대의 ‘하나님 생각’

 

어딜 가나 모두가 아우성치는 이 시대에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고 있자면, 그 모든 재고(在庫)가 턱없이 빈약하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이 목격하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풍요하게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분쟁과 시기, 경쟁과 기득권, 자기과시와 아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기심만을 키워온 부끄러운 모습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의 현실이 이토록 폐허로 달려오기까지 아무런 일깨움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정력은 온통 교회 안에서 힘 겨루는 일과 교회 자신을 살찌우는 일, 교회를 내세우는 일에 쏟아졌을 뿐이다. 그런 자리에서 자라나는 것들은 싸움질과 자기편 긁어모으기와 세력자랑과 쓸모없는 논쟁과 욕심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 이걸 잘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교단에서도 기운이 센 실력자가 되는 것을 목도한 일부 신앙인들이 깊은 회의와 환멸 속에서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들은 불경을 펴들고 선(禪)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기(氣) 수련에 관심을 가졌으며(최근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 실태·인식·의식 등을 주제로 1984년, 89년, 97년, 2004년에 이어 2014년까지 총 5차례 조사해 비교·분석한 보고서에서 개신교인 33%가 “기(氣)·마음 수련 해봤다”는 조사가 나왔다), 가톨릭 성당을 찾아 묵상의 즐거움을 갈망했고 또는 무교회주의자가 되거나 자연주의적 생명운동에 희망을 걸었다. 아니면, 무종교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가나안교인이 되거나….

교회는 겉보기에는 융성해져 가는 듯 했지만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날이 갈수록 빈곤해진 결과였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성령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보내신 편지의 이 구절이 우리를 향한 것임을 진즉에 깨닫지 못한 아픔이 깊다.

그간 교회는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는 일에 무관심했고, 강단에서 현실을 말하는 것은 복음적이 아니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아집과 허탄한 무지인가? 복음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가? 불의한 현실에 굴복하지 말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 나라의 대안을 이 땅에 이룩하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존재하는 능력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복 받고 잘 살기를 바라도록 가르쳤으니 이 기막힌 이율배반과 위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육신의 탐욕과 헛된 망상들로 그 몸을 대신하고 있으며 그러는 중에 교회는 쓸모없는 싸움과 힘겨루기와 특권 누리기를 일삼는 현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어느 교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만연된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 오늘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고 있나? 그 눈물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도 함께 보고 있을까? 사랑의 체온이 사라진 우리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는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을 내세우는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먼저 우리 모두 솔직히 말해보면 어떨까싶다. 그래야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이지가 분명해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할 줄 아는 믿음만이 진실한 믿음이라고 여긴다면, 그렇지 않게 생각하고 살아온 것을 우선 꿰뚫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그런 것은 그렇다고 판단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 말이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예언자적 메시지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제 흥을 돋으라며 수금을 켜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이들만 들끓고 있다. 아픔은 보이지 않고,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런 우리 앞에서 하나님은 탄식하고 계시지 않을까. “이들이 진정 내 백성들인가?” 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교회를 외면하고 있다. 뼈아픈 이야기지만 심지어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평화는 위협당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비빌 언덕이 없어도 입 한번 벙긋 하지 않는다. 뭘 가지고 기도해야 할지 말하지는 않고 기도만 하라고 한다. 정말 아픈 사람들은 기도조차 할 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커지면 무엇 하겠는가? 그 커다란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목회자의 타락과 재물을 둘러싼 싸움과 자리다툼과 교인들끼리의 미움이다. 연봉이 무려 6억이나 되는 목사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 한다. 성폭력으로 문제가 있어 쫓기듯 나간 목사에게 전별금을 포함해 수십억을 주고…(그런 돈을 내준 교회와 교인들도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는가). 그가 속한 교단은 근 5개월을 끈 노회 재판에서 유야무야 처리하고, 치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당사자와 교회는 도리어 문제를 제기한 이들을 고소하고 있으니, 이건 죄악 아닌가.

서초동 금싸라기 땅에 수천억을 들여 지은 교회에 문제가 있어, 법원 판결을 집행하러 온 집행관과 동행한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 교인들과 기자에게 “너 뭐하는 놈이야, 도대체”, “나쁜 놈의 새끼야. 너 보고 얘기하는 거야, 너 보고!”, “너 어디서 나 만나면 각오해, 죽을 줄 알아”라고 막말과 위협을 일삼은 부목사의 언행을 보아하니, 그 교회가 입당 예배시 정면에 걸어 논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를 패러디 한 “하나님이 당 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하기사 하나님도 당하셨는데 우린들 무슨 힘을 쓰겠는가.

이런 광경을 보면 예수님은 대형교회의 영업사원으로 전락하고 목사는 그 영업사원을 부리는 사장이 되고 있다. 잘못된 일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되었다. 죄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교회가 피할 수 없이 도달하는 지점이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사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가? 그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시린 마음으로 되짚어본다.

억울한 사람들을 봐도 함께 분노할 줄 모른다. 슬퍼하는 이들의 하소연에 귀를 막는다. 짓밟히고 있는 이들을 피해간다. 유명하다고 하는 자들과만 친교하려 든다. 이름 없는 가난한 이들은 깔보기 일쑤이다. 어디 높은 자리 하나 없나 하고 두리번거릴 줄만 안다. 교회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이게 교회라면 세상은 어디에서 위로와 희망을 봐야할까? 하나님의 생각이 곧 우리에게 위로이며 희망이고 또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 아닌가? 그 생각을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용기와 의지가 생겨나고, 지혜로 가득 차서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의미가 더불어 자라나는 것 아닌가?

“생각”은 참 소중하다. “생각 없는 믿음”은 악에게 기만당해도 그걸 모르게 된다. 생각이 바로 서 있는 이를 사탄은 어떻게 유혹하고 넘어뜨릴 수 없게 된다. 교회란 다름 아닌 그 생각이 바로 태어나 길러지도록 하는 임무를 가진 곳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깨우치기 위해 생각하는 힘을 가진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생각을 죽이는 곳에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너무 뻔한 것 같지만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것이 그 기초이다. 그러면 자연히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깨우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생각일 거다. 자기 욕심에 따라 선과 악을 판별하려 들고 이걸 절대화하는 것은 죄이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선과 악을 가려낼 줄 안다면 그야말로 기쁜 일이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선과 악을 가려낼 줄 아는 이에게서 세상은 진정 가야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뿐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생각은 기운이 되고 에너지가 된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과 나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전혀 다르다. 좋은 생각이 만들어낸 좋은 인품과 좋은 마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건강하게 해주며 죽어가던 마음도 일으켜 살게 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살아 있던 것도 죽이고 만다.

예수께서 가지신 생각은 하나님 생각이셨다. 그 생각은 기운이 되고 에너지가 되었다. 그 생각이 일어나는 곳에서 기적이 생겼다. 그 생각이 머무는 곳에서 사랑과 치유가 이루어졌다. 그 생각이 퍼지는 곳에서 변화가 만들어졌다. 그 생각이 몸이 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몸이 되신 분이 곧 예수이시니, 그 삶처럼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차면 그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엄청난 것이 된다. 바로 이걸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면 그 생각이 에너지가 되고 몸이 되어 우리가 말하고 듣고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 몸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의 생각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현실로 바뀌게 된다.

욕망이 주는 생각이 몸을 지배하는 경우와, 하나님의 생각이 몸을 다스리는 경우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죄로 이끄는 생각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경우와, 선으로 가는 생각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경우는 죽음과 생명의 차이가 된다. 파괴의 에너지와 살림의 에너지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생각대로 T”, 또는 “생각이 곧 에너지다”, 라는 광고문구가 있었다. 기발한 문구다. 그런데 우리는 그 T가 뭔지,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광고의 목적과는 달리, T가 만일 talk(말하다)이나 tool(수단)이라면, 그때 우리가 말하는 것과 선택하는 수단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곧 에너지라면, 그 에너지는 어떤 에너지가 되어야 하는지 깊이 성찰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내용이 무엇인지에 눈뜨지 못하면, 우리는 생각 없이 세뇌당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 생각에 내용을 채워주시는 분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이 생각에 내용을 채우는 은총을 덧입어야 한다. 지금처럼 자기 욕망을 채워 그걸 하나님의 생각처럼 내세우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그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길이다.

부디, 언제 어디서 생각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 되고, 그 생각이 우리의 엄청난 에너지고 되어 다리를 절었던 이가 뛰고, 갇혔던 이들이 풀려나며 죽어가던 이들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이런 우리의 생각이 도처에 퍼져 퍼진 곳마다 사랑과 치유의 기적이 생겨나고 행복한 에너지가 솟아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행복한 에너지다. 그 에너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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