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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by 한종호 2020. 7. 16.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6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마태수난곡 249~51

마태복음 27:1~6

음악듣기 : https://youtu.be/XJa0DjXnDyU

49(41)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1. Des Morgens aber hielten alle Hohenpriester und die Ältesten des Volkes einen Rat über Jesum, daß sie ihn töteten. 2. Und bunden ihn, führeten ihn hin, und überantworteten ihn dem Landpfleger Pontio Pilato. 3. Da das sahe Judas, der ihn verraten hatte, daß er verdammt war zum Tode, gereuete es ihn, und brachte her wieder die dreißig Silberlinge den Hohenpriestern und Ältesten, und sprach:

대사

유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4.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그들이 이르되

Sie sprachen:

대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Was gehet uns das an, da siehe du zu.

50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5. Und er warf die Silberlinge in den Tempel, hub sich davon, ging hin, und erhängete sich selbst. 6. Aber die Hohenpriester nahmen die Silberlinge, und sprachen:

대사

제사장 1&2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Es taugt nicht, daß wir sie in den Gotteskasten legen, denn es ist Blutgeld.

51(42)

코멘트

베이스

아리아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보라, 살인자의 돈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그 잃어버린 아들이 던져주고 있지 않느냐?

너희들의 발아래에 말이다.

Gebt mir meinen Jesum wieder!

Seht, das Geld, den Mörderlohn,

Wirft euch der verlorne Sohn

Zu den Füßen nieder.

 

 

 

새벽에 법을 의논하는 사람들


기나긴 그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1)’ 우리말 성경은 그 때를 새벽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정확한 때는‘Des Morgens/데스 모르겐스라는 루터 성경의 표현처럼 해가 뜬 이른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공의회는 규정상 해가 떠 있을 때 열려야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해가 진 밤에 몰래 모여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을 해 놓은 그들은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절차상 하자가 없도록 의결하여 예수를 총독에게 넘겨주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는데 그들은 그토록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속전속결로 사형을 집행하길 원했습니다. 또한 그날이 13, 유월절을 앞 둔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안식일인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도 아침 일찍 산헤드린을 소집한 이유였습니다.

 

악을 도모하는 이들은 무법자일 것 같지만 사실 이토록 치밀하게 법과 규정을 잘 따집니다. 반면 진리와 선함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법과 규정을 존중하고 지키되 궁극적으로는 그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법치주의 사회를 살고 있지만 스스로를 법의 한계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예수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기 전까지는 법과 규정에 최종적인 질서유지를 맡겨야 하겠지만 예수를 통해 구원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법과 규정에 한계 지워진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법이 최선이 아니라 차악임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물론 우리 역시 세상의 일부로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질서를 지켜 나가야 합니다. 또한 내가 피해를 당할 때 법을 올바로 알고 의지해서 억울함을 풀고 정의를 도모할 수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법의 한계선을 양심의 기준선으로 삼거나 저들처럼 법을 악용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 지인 중에 법조인이 있는데 감리회 교단으로부터 법률 자문을 의뢰 받아 재능기부 차원으로 여러 번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단법이 세상 법보다 더 허술한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루어지는 사안들과 진행 과정들이 세상 법정보다 더 지저분하고 꼼수가 많으며 그 다툼의 배경이 교회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의뢰에 응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리하라 권면했습니다.

 

교회법에 연루된 분들은 대부분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고 성경 말씀을 붙들어야 할 그런 분들이 차악에 불과한 교단법인 장정에 목매여서 아등바등하며 결국 교회에 상처를 안기고야 마는 모습이 지금 법과 규정을 따지면서 예수를 죽이려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법과 규정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예수의 길을 가로막는다 한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위에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법과 규정을 따르며 서두르고 꼼수를 부렸기에 결국 예수께서 바로 그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도 그와 같은 섬세한 역사로 지켜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 그 날


루터 성경에 쓰인 ‘Des Morgens’는 현대 독일어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으로서 바로 그 날 아침에라는 의미의 'dessen Morgens/데센 모르겐스'를 축약한 것입니다. 다른 독일어 성경들은 원문의 뜻을 살려서 이른 아침에라는 의미의 ‘Frühmorgens/프뤼모르겐스혹은 ‘am frühen Morgen/암 프뤼엔 모르겐을 사용하는데 루터는 굳이 바로 그 날 아침에라고 읽고 있습니다.

 

그 누구 보다 성경원문의 이해와 문학적 감수성이 깊었던 루터는 마태복음 27장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 전환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자정을 새로운 날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해가 뜰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 새벽에라는 의미는 단순한 시간적 의미뿐만 아니라 새로운 날의 시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 능통했던 루터는 이 부분까지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드디어 밝았습니다.

 

유다의 최후


잠시 잊혔던 유다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3)’

 

베드로와 같은 마음으로 따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유다 또한 멀찍이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그날 아침, 유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니, 도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그런 일을 벌였으며 왜 자살했을까요? 저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서 유다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연재의 아홉 번째 순서에서 그렇게 깨달은 유다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그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3절에는 유다가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었거나 예수를 배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유다는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뉘우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정죄됨, 즉 산헤드린으로부터 사형이 결정된 사실을 확인한 후 유다입장에서는 무언가 완전히 틀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수긍했기에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수 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유다가 보기에 스승 예수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교회를 이루고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덩달아 자기 이름도 높아지면 좋겠는데 스승은 계속하여 그 능력을 숨기는 것 같고 낮은 곳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세상의 지혜와 계산에 서투르기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가 자기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르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틀어져버렸습니다. 예수는 잡혀가는 순간부터 무력했고 도살장의 어린 양 같이 잠잠했습니다. 결국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일리야 레핀/Ilya Repin(1885)


예수의 정죄됨을 보고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뉘우친 그는 받은 은 삼십을 돌려주며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는 그렇게 모든 걸 되돌리고 예수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깨우쳤다면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공동체로 돌아가거나 예수님을 찾으러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생각이었더라면 차라리 죽을 용기로 다시 일어나서 예수를 구하려다가 함께 죽는 것이 나을 뻔했을 것입니다.

 

그는 왜 자살을 택했을 까요? 자아가 너무나 강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홉 번째 글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다는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이었고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똑똑한 사람들, 말 잘하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 잘생긴 사람들, 여기저기 강연을 하며 멘토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람들도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분 앞에 겸손하지 않고는, 공동체에 속하여 예수와 함께하지 않고는, 진정한 승리가 자기희생으로부터 시작됨을 깨닫지 못하고는 참된 지혜와 진리를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똑똑함과 잘남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유다처럼 그 똑똑함과 잘남 때문에 결국 자신을 망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입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다에게 ‘Was gehet uns das an, da siehe du zu/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후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그 은을 다시 거두어 챙깁니다.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유다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돌려주기 전에 예수를 돌려달라고 해야 마땅했습니다. 베드로같이 단순한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처럼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계산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실수하고 투박할지언정 단순하고 진실 된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그런 마음으로 단순하게 예수를 다시 돌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들이 돌려주지 않을 것을 알지만 예수를 향한 남성적인 사랑으로 불꽃이 마구 튀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와 함께 살인자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를 마구 쏟아냅니다. 예수를 향한 이 거칠고 용감하고 단순하고 열정적이며 투박한 남성적인 사랑도 예수를 향해 우리가 품어야할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아리아를 부른 가수는 독일이 자랑하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입니다. 16번째 글에 디스카우에 대한 짧은 소개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Gebt mir meinen Jesum wieder!

돌려다오,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유다의 목소리


오늘날의 연주에서는 대부분 극적인 면을 살려서 베드로와 유다를 구분하여 각기 다른 성악가를 쓰지만 지난 시간에 설명 드린 대로 우리가 함께 듣고 있는 칼 리히터의 58년 음반에서는 베드로의 목소리에 특화된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 유다의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젊고 날카로운 목소리였으면 좋았을 유다의 목소리가 아쉽지만 지금까지 더할 나위 없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던 막스 프룁스틀을 원망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과한 처사일 것입니다.

 

유다는 어떤 목소리였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아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 보면 어떨까요? 만일 여러분이 마태수난곡의 지휘자라면 유다의 역할로 어떤 목소리를 지닌 성악가를 선택하실 것 같나요?

 

그러고 보니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유다의 목소리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비유처럼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목자이신 예수의 음성도 알아야 하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유다, 우리 주위에 있는 유다의 목소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듣는 음반의 유다는 유다를 악마의 하수인으로 규정시킬 뿐 우리와의 연관성을 찾기에는 아쉬움이 많아 보입니다.

 

                                             유다,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86-1894)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를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그의 악마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마녀를 떠오르게 하는 매부리코는 기본이고 아예 사람이라기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린 그림도 많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18절의 표현에 따라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모습으로 배신자의 최후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 주는 그림도 많습니다. 유다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인과응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형성된 유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는 유다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안의 유다를 발견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성격과 외모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우들이 배역을 선택할 때도 최대한 자신의 성격을 닮은 캐릭터와 외모를 닮은 배우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악가들의 경우 성격이 진지하고 골격과 키가 크고 목이 길수록 저음 가수일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 면에서 유다의 외모를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유다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과 제임스 티소의 그림 사이에 있습니다. 유다는 생각보다 말랐을 것이고 날카롭지만 쾡하니 흔들리기도 했을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는 내면은 완전히 감추어져 음산하면서도 무언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을 법한 독특한 아우라로 드러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흐 역시 유다의 음역은 베드로와 비슷하게 설정했지만 유다에게 주어진 음표의 흐름을 보면 베드로 보다 좀 더 가볍고 예민하고 날카로운 음색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Ich habe übel getan, daß ich unschuldig Blut verraten habe/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의 마지막 목소리, 여러분에게는 이제 어떻게 들리시나요?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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