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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설교와 썰교

by 한종호 2019. 4. 2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9)

 

 설교와 썰교
   

목사로 살다보니 늘 설교를 해야 하고, 이따금씩은 다른 이의 설교를 듣게 된다. 목사에게 설교는 평생 이어가야 할 마음의 씨름일 것이다. 설교자로 살며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마른 땅에 비 내리듯, 사막에 이슬 내리듯 듣는 말씀이 마음을 적실 때가 있다. 따뜻한 위로와 선한 격려로 다가와 마음을 추스르게 할 때면 말씀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몰랐거나 무감했지만 내가 잘못 살았구나, 화들짝 놀람으로 깨닫게 만들 때면 말씀이 가진 힘을 새삼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말씀이 공허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말씀에서 길어 올린 것이 아닌 수박 겉핥기식의 가벼움, 뻔한 공식과 같은 적용, 이야기를 할 때마다 ‘的’ ‘的’ 하지만 ‘쩝, 쩝’으로 다가오는 자기 과시, 본문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단상 등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보다는 공허하게 하는 이유가 더 많지 싶다.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말씀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의 거리감이다. 구구절절 말씀은 옳다. 틀린 게 없다.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씀을 전하는 이의 삶과 상관이 없다 여겨질 때, 아뜩한 거리가 느껴질 때, 말씀은 한없이 공허하게 다가온다.

 

신학을 배우던 시절, 과목 중에는 설교학이 있었다. 첫 번째 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원용 목사님으로 기억하는데, 목사님은 우리에게 설교가 무엇인지를 물으셨다. 몇 몇 대답들이 이어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대답이 있다.


“설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썰교’입니다.”


우린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뼈 있는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설교’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은 ‘썰교’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묻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나는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일까, ‘썰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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