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깊이 날아 뜻을 품다

김기석 목사님께 2017.12.08 10:24

김기석 목사님께(4)


독수리, 깊이 날아 뜻을 품다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지 못했습니다. 도무지 ‘내 삶’에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절박한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네요. 유학 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내면을 옥죄고 있을 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스러움과 공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끈질기게 갈마들면서 영혼을 갉아먹고 있을 때, 그때 받은 목사님의 편지를 오늘 다시 읽어 봅니다. 그저 ‘나의 삶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의 주저앉은 마음을 북돋워 주었던 글입니다. 그 편지를 천천히 읽고 또 읽다 보면 마음이 가지런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솜씨 좋은 농부의 호미질이 지나가면, 어지럽게 뭉그러져 있던 흙더미들이 단단하고 단정하게 북돋워진 이랑이 됩니다. 목사님의 편지를 읽는 일이 꼭 그런 일입니다.


글에서 들려오는 ‘몸의 소리肉聲


고전어라는 산을 다 넘기도 전에 조급증에 시달리던 저의 마음을 목사님의 편지는 다정하게 타이르셨지요.


“너무 서두르지 말게. 서두른다고 빨리 가는 건 아니더라구. 물론 목표는 잃지 말아야 하지만, 무딘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보다는 날을 세워서 찍는 것이 지혜 아니겠는가? 마음을 잃고 건강을 잃으면, 남는 건 자기연민이거나 분노이기 십상이지.” “지극정성이란 결국 ‘지금 여기’에 마음을 모으고 살아가는 것이겠지. 점 하나 하나를 찍어 형태를 이루는 점묘법처럼 우리의 하루가 충실해야 인생도 충실해지는 법인데….”


그러면서 목사님의 글은 슬며시 나의 시선을 나의 문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유도하셨지요.


“어제는 산에 다녀왔네. 고난주간이긴 하지만 그저 사무실에 있으면 울적해질 것 같아서였어. 도심에 가깝긴 하지만 산에 피어난 꽃들은 어쩌면 그리 맑고 고울까. 종일 노랑제비꽃과 눈맞춤을 하면서 산을 걸었네. 우리의 삶은 자연을 향해 계속 걸어가야 온전해질 수 있음을 몸으로 느꼈네.” “프리드리히 굴다의 연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를 듣다가 그 한음 한음이 이루어내는 어울림에 사로잡혔다네.”


이윽한 귀 기울임, 곡진히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목사님의 충고는 차라리 기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고스란히 내맡긴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담담한 심경은 그 자체로 노래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글을 읽는 사이에 조금씩 온기를 되찾은 저의 내면을 향하여 매번 힘찬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눈 밝고, 귀 밝은 사람이 필요한 법이라지. 우리 정신 차리고 사세!” “히브리어와의 연애에서 얻은 기쁨이 무더위를 넉넉히 이기는 힘으로 전화되기를 비네.”


독일의 작은 대학도시 튀빙겐의 허름한 기숙사에서 목사님의 편지를 읽고 있던 저는 젊기만 했습니다. 당장 희망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써주신 희망의 ‘목소리’는 저의 눈빛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부치신 편지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편지 속에서 어떤 솔깃한 대안이나 정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희망을 끄집어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다만,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편지글을 따라 읽어가는 사람마다 그 글에서 들려오는 ‘몸의 소리肉聲’에 문득 눈빛이 밝아짐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눈으로, 머리로 읽기를 멈추고 편지글을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저만치 어딘가에서 온몸으로 어둠과 부딪쳐 파란 불꽃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가슴에 돋아나는 절망을 도려내고 다시금 길을 떠날 용기를 얻습니다(341-342쪽).



세속 먼지 뒤집어쓴다 해도 정신은 흩어지지 않는 법


목사님, “편지를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라고 하셨죠? 그러면서 그 “그리움은 ‘너’의 빈자리가 강하게 환기시킨 마음의 공허”(5쪽)라고 적으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유대인 사상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온 존재를 기울여 말 건넬 수 있는 ‘너’와의 만남 혹은 관계, 그것은 목사님의 많은 편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붉은 줄 아닐까요? 편지를 비롯하여 모든 형태의 글쓰기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만 목사님은 그 언어보다 근본적인 것, 곧 “서로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절실함과 진정성”이야말로 부버가 말하는 ‘근원어Grundwort’일 거라고 진단하셨지요(339쪽).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경험으로 구성되는 근원어의 균형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인간다움의 온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안전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유일무이한 ‘너’를 느끼지 못하는 증세가 더 큰 문제입니다. 공감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안전’은 오히려 섬뜩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안전해 보여도 “그곳은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죽음의 벌판”(143쪽)입니다.


목사님의 편지들을 읽다가 다시 한 번 《나와 너》를 펼쳤습니다. 아예 목사님의 편지글과 포개놓고 읽었습니다. 제2부 〈사람의 세계〉에서 마르틴 부버는 ‘너’의 세계가 마비된 ‘그것’의 세계를 구석구석 소개해줍니다. ‘그것’에 갇혀 사는 사람들, ‘그것’의 세계에 만족하는 삶의 면면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이용하려는 욕망만 있지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힘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특수성을 탐닉하고 자기라는 허상에 집착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참된 ‘너’를 만나지 못하는 ‘나’는 순간적인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꼭 우리시대 도시인들의 모습 같다고 느꼈습니다.


놀랍게도 《나와 너》 초고가 나온 해가 1916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의 일이네요. 온갖 갈등과 모순이 끔찍한 전쟁으로 터져 나온 시기에 부버는 인간다움의 알짬을 ‘나-너’ 근원어에서 찾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처럼 지독한 ‘나-그것’의 세계에 포박된 우리가 어떻게 ‘나-너’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부버는 말합니다. “오직 일찍이 들어본 일이 없는 ‘전환Umkehr’ 곧 ‘돌파Durchbruch’가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결정적인 방향 전환을 뜻하는 히브리어 ‘테슈바(תשובה Teshuvah)’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환은 아무래도 수평적 차원의 돌이킴이 아니라 저 하늘을 향한 온 존재의 솟구침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테슈바’를 묵상하다가 나에게 와락 닥쳐온 시구가 있었습니다. “세속 먼지 뒤집어쓴다 해도 정신은 흩어지지 않는 법 / 자신 속으로 밀리게 될 때는 돌파하라, 위를 향해!”(요한 볼프강 폰 괴테, 〈타리스만〉 중에서) 장쾌한 시어입니다.


아등바등 일상을 기고 있는 것 같은 마음에 홀연 비상飛上의 의지를 일깨우는 글들이 있지요. 제게는 목사님의 글이 그랬습니다. 때로는 먼저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독수리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때로는 아득한 고공비행을 앞두고 시계視界를 조망하는 독수리의 눈매가 저를 상쾌하게 긴장시켰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진하 목사님의 시 〈독수리〉를 처음 읽었을 때(1997년)나 지금이나, 거기 ‘김기석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독수리는 지상의 온갖 번뇌에서 

잠시 발을 뗀 은수자처럼 보인다, 막 

털갈이를 끝낸 듯 야윈 몸뚱어리에서 

번져 나오는 은은한 광채!


어쩌면 목사님은 이 시 앞에서 손사래를 치시면서 ‘그거, 다 젊을 때 얘기야.’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썩은내 풍기는 사체 속에 부리를 / 처박고 사는 生일지언정, 드러난 부분보다 / 감춰진 것이 많은 것이 삶인 것을” 치열하게 증언하는 목사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청년의 기백, 감투敢鬪의 기상이 서려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젊은 날의 영문 모를 열정과 작별하지 못한 것”(315쪽) 같다고 하셨죠? 그런 목사님이 친근하고 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있다면 길들여진 젊음”(323쪽)일 것 같다고 하셨죠? 그런 목사님의 매서운 질타를 양약良藥으로 받아들인 젊은이는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자기만의 날갯짓을 훈련할 것입니다. 시인은 막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김 목사님에게 헌정된 시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아직 날아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푸르고, 넓고, 깊은 하늘을, 정적靜寂을

겹겹이 접어 잿빛 날개 속에 묻고 있을 뿐

(고진하, 《우주배꼽》, 세계사 1997).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이 바야흐로 높이 날아오르셨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날고 있었지. 깊게 더 깊게, 지금도 독수리는….’



번역 시학詩學 poetics의 미학


그런 목사님 곁에서 꽤 일찍부터, 꽤 오랫동안 목사님의 목회를 보고 배웠지만, 저는 3년 전 비로소 늦깎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한 지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지요. 제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할머니께서는 제가 주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는데 마흔을 넘긴 나이에 안수를 받았으니 나름 버틴다고 버틴 셈입니다.


목사님께서도 “부름 앞에서 주저하며 자꾸 뒷걸음치던”(112쪽) 마음이 있었다고 하셨지요. 목사가 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까 심각하게 궁리할 때마다 제게 떠오르던 직업은 번역가였습니다. 알량한 외국어 실력이었지만 제 삶에 이력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그것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치열한 번역 노동은 제가 수년 간 경제적 난관을 헤쳐 나가는 데 알뜰한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치고 들어가 정신의 다리를 놓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우울한 일상 속에서 느슨해진 정신의 나사를 바짝 조이는 데도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이 번역입니다. 그러니 ‘번역’ 얘기가 나오면 저의 눈과 귀가 번쩍 뜨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목사님께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번역’은 외국어의 자구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고스란히 우리말로 옮겨놓는 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기꺼이 하고 싶어 했던 그 일, 곧 번역은 훨씬 웅숭깊은 차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목사님을 통해 배운 번역 신학, 혹은 번역 시학詩學 poetics이라고나 할까요?


목사님의 편지글에 나타난 그 번역 이론을 저 나름대로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진리가 몸과 마음에 배어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입니다. 그러니 방심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조급증을 내서도 안 됩니다. 공부는 문자 공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일쑤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진짜 공부는 그런 것입니다(113쪽).


진리의 말(씀)을 구체적인 삶으로 옮겨내기 위한 정성스러운 노력studium이 번역이군요. 바로 이 일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람들이 줄어들 때 종교는 하늘과 사람을 엮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허울뿐인 제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가장 뛰어난 가르침宗敎’은 또한 ‘가장 뛰어난 다리宗橋’의 기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처럼 단절과 소외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공동체적 삶을 통해 번역”(244쪽)해내는 일이었어요. 혼자서 진리를 삶으로 잘 옮겨내는 일도 소중하지만, 그 정신을 “공동체적 삶”으로 구체화하는 일은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목사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언뜻 “공동체”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영혼들의 패거리 짓기를 참 싫어하셨지요.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소수의 약자들에게 악마적 이미지를 덧씌워, 대중의 억눌린 폭력성이 그들을 향해 분출되도록 유도하는 우리 시대의 윤똑똑이,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들을 고발할 때 목사님의 문체는 허위의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는 화살을 닮았습니다. 주님께서 갈고 닦으신 화살, 그분의 화살 통에 감춰져 있다가 교만한 이들을 향해 곧게 날아가 꽂히는 예리한 화살(이사야 49:2) 말입니다. 하지만 참된 진리를 ‘공동체’적 삶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목사님의 편지에서는 햇살의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따스함이 또 애틋합니다. 아무래도 목사님이 오늘 우리 시대에 바라보고 있는 공동체적 연대의 뿌리가 ‘슬픔’인 탓인 것 같습니다.


슬픔이야말로 ‘너’에게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고통이 그냥 ‘나’만의 고통에 머물 때 감상 혹은 애상에 빠지기 쉽지만 그것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화할 때 그 고통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합니다(277쪽).


목사님은 ‘희망’의 존재 여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섣부른 희망이나 위로가 아닌 슬픔의 연대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재확인하는 길” 아니겠느냐고 되묻고 계십니다(278쪽). 그러므로 진리의 정신을 공동체적 관계로 번역해내는 일에 복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타인의 아픔을 ‘차마’ ― 이것도 목사님이 참 아끼는 표현이지요 ―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136쪽)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을 회복할 수 있겠지요? 다시 한 번 부버를 인용하자면 모든 낱낱의 ‘너’에게서 “영원한 ‘너’의 나부낌”을 들을 수 있는 능력, 모든 낱낱의 ‘너’를 통하여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보고 만질 수 있는 능력으로 말입니다.


‘번역飜譯’이라는 말을 연거푸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정성스러운, 그러면서도 탁월한 번역에 감사드리면서 저의 답장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목사님의 편지글 한 장 한 장이 그 번역의 산물이지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 그 넓고 깊은 하늘을 목사님은 쉼 없이 날고 날아서〔〕 풍요로운 성찰과 대화의 가능성을 한보따리 나눠 주십니다. 특히 사유하는 인간의 무늬〔人文〕가 아로새겨진 문예의 아름다움은 김기석이라는 번역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생생하게 스며듭니다. 그 뜻을 발견하여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품고 오래오래 날아와서 그 뜻을 기다려온 적잖은 사람들의 삶에 양식으로 안겨주는 어미 독수리! 목사님 덕분에 저는, 그리고 목사님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아름다움 앞에 자꾸 서보고,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깊어갈 때 자기중심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88쪽) 있게 되었지요. 앞으로도 한참 그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은 땅의 현실에만 눈을 돌리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하늘을 잊고 살아갑니다. 큰 정신이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있음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의 좁장한 마음을 넓혀주고, 시야를 확장시켜 주는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시대입니다(141쪽).


그렇습니다. 바로 그래서 목사님이 몹시 그립습니다. 벌써 오래 되었네요, 목사님과 흔흔하게 북한산에 올랐던 때 말입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시간을 내주시리라 생각해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목사님, 함께 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백일홍이 다 지기 전에….


손성현/창천교회 청년부 목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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