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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낯선 곳, 어색한 잠자리와 꿀잠

by 한종호 2017. 11. 29.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1)


 낯선 곳, 어색한 잠자리와 꿀잠


구름에 달 가듯이 그렇게 가면 얼마나 좋을까만, 시간이 지날수록 길은 멀게 느껴졌고 걸음은 무겁고 더뎌졌다. 긴장으로 응축되었던 몸과 마음이 점점 풀어지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헐거워지고 느슨해진다 싶었다.


먼 길을 격려차 찾아온 어머니와 형과 함께 점심을 먹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군대 간 아들 면회를 오신 듯 바리바리 간식이며 과일 등을 챙겨 오셨다.


철도 중단역인 백마고지역으로 달리는 경원선 열차,

 언제나 길이 열려 북쪽 끝까지 숨가쁘게 달릴 수 있는 날이 찾아올지.


오후에는 하루를 묵기로 한 대광리역까지 가야 했다. 길은 거반 개울을 따라 이어졌다. 개울을 따라 걷는 것은 아스팔트를 걷는 것에 비하면 거의 천국과 같았다. 무엇보다 한적해서 좋았고, 내달리는 자동차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훅훅 얼굴로 올라오는 아스팔트의 열기도 없었다. 경치도 좋았고 거기에다 바람도 불었다.


하지만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땡볕이었다. 제방 둑을 따라 심은 것은 대개가 꽃, 꽃은 사람에게 향기를 주지만 그늘은 주지 못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줄 수가 없는 것처럼. 중간 중간에 나무를 심은 곳도 있었지만, 아직 키가 작아 나무 또한 그늘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름만으로는 제 역할을 다 할 수가 없다는 듯이.


걷고 또 걷다가 너무 지쳤다 싶을 때면 잠깐씩 쉬었다. 한 번은 다리 밑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두 번은 수로의 수문을 관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그야말로 고꾸라지듯 쓰러져 누웠다. 벗은 배낭을 베고는 그냥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럴 줄 알았으면 깔개라도 챙길 걸.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한결 낫겠다 싶은데, 천하의 잠보에게도 잠은 쉬이 오지를 않았다. 혹 지나가는 누군가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내 모습을 봤다면 거지 아니면 간첩으로 오인을 했을 것이다.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마을에 들 수는 없지 않겠냐는 듯, 이가 드러나도록 웃으며 반겨주는 장승.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주인에게 우연히 들은 말에 의하면 군남면 옥계리 마을의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가 있다고 했다. 값도 저렴할 것이라 했다. 값도 값이지만 대광리역 앞에서 숙소를 찾는 것보다는 마을회관에서 하루를 묵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식당 주인에게서 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하여 마을 부녀회장님과 통화를 했더니, 가능하다고 했다. 생각지 않았던 일이지만 그날 밤을 기꺼이 옥계리에서 묵기로 했다. 여건이 어떨지 모르는 대광리역에서 숙소를 구할 필요가 없어지니, 마음도 훨씬 홀가분해졌다.


한적한 시골마을 옥계리에 도착을 했을 때는 긴 여름해가 기울며 조금씩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그 시간에 저녁을 먹기는 어려울 터, 마을 초입에 있는 가게에서 빵을 샀다. 아침은 부녀회장님 집에서 먹을 수가 있다고 했으니 저녁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하룻밤을 묵은 옥계리 마을회관. 길을 걷는 자에게는 어색하거나 불편한 잠자리는 따로 없었다.


겨울철이야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겠지만 한창 일철, 마을회관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일에 바쁜 부녀회장님 대신 동네의 한 아주머니가 찾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 3호이기도 한 옥계리 마을회관은 생각보다도 컸다. 숙소는 2층에 있었다. 덩그마니 커다란 방, 숙소라 하기엔 뭔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씻을 곳이 있었고, 뜻밖에도 샤워실엔 세탁기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얼른 씻고 빨래를 마친 뒤 벽에 기댄 채 빵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 조금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맞은 편 창밖으로는 이내 어둠이 내렸다. 낯선 동네 마을회관에서 묵는 하룻밤, 제법 큰 방에 혼자 누운 것도 그랬거니와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에 들어온 듯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걷는 일정이 아니었다면 그런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하여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한없이 조용한 숙소일 뿐, 잠을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잠에 빠져들기까지의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길을 걷는 사람이란 걸 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불편하고 어색하고 낯선 상황을 만나도 얼마든지 그러려니 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곳, 어색한 잠자리를 두고도 얼마든지 꿀잠을 잔 옥계리 마을회관은 그런 의미로 남아 있다.


한희철/동화자각,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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