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ime to Kill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 10:29-37)


“그 날도 역시 햇살은 눈부시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 소녀는 구릿빛 피부를 햇살에 노출시키며 가게로부터 집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의 뒤를 추적하던 트럭이 아이의 길을 막아섰고, 그곳에서 내린 두 명의 건장한 사내는 아이를 노리갯감으로 만들며 자신들의 욕구분출을 위한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아이를 폭행한 이 두 사람은 이내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의 폭행사건으로 이성을 잃은 아이의 아버지는 재판을 받기위해 법원으로 들어서던 2명의 남자에게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이제 역으로 피해자의 아버지였던 이가 새로운 피의자가 되어서 차가운 감방 속에 갇히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존 그리샴(John Grisham, 1955~ )이라는 작가가 쓴 한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과도 같은 “A Time to Kill”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전히 백인 우월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 남부 미시시피 지역을 무대로 해서 그리샴은 법정소설이라는 틀 속에서 미국사회의 매우 민감한 문제들 중의 하나인 흑백문제를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 1939~ )감독이 연출한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독은 치밀한 법정공방과 양자의 심리 대결 등을 적절히 배치하며, 영화 내내 긴장감이 약해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에 관객들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법 판정의 진실성과 미국사회 내 흑백이 공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고민을 덤으로 선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는 단순한 법정 드라마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두개의 사건 때문에 촉발된 인간사회의 ‘함께 하는’ 혹은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은 끊임없이 강요받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두 차례 관람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눈에는 어김없이 성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 10장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예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죽여 놓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어느 제관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사람도 그곳에 오게 되었는데 보고서 피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던 중 그곳에 와서 보고는 불쌍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제 짐승에 태워 그를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인숙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당신에게 갚아드리겠어’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대목은 예수에게 영생의 문제를 질문하는 한 율법학자의 대화록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을 받자 예수는 곧바로 그 물음을 되받아 치십니다. “성서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질문자는 거침없이 예수의 물음에 답을 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네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율법학자의 대답은 두개의 중요한 성서적 전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전반부 하나님에 대한 부분은 신명기 6: 4-5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일명 ‘셔마’로 불리는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고백문을 아침, 저녁으로 암송합니다. 그리고 후반부 이웃사랑에 대한 부분은 레위기 19: 18의 인용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생에 이르는 최선의 방법임을 천명한 율법학자에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대꾸하십니다.


“바로 대답했습니다. 그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살게 될 것입니다.”


거의 동일한 대화록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12:28-34은 대충 이 부분에서 예수와 율법학자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자신이 채집한 예수에 대한 특수 자료를 이 대화록에 삽입시킴으로써 이 부분에 대한, 즉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과 이웃사랑에 대한 예수 자신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누가의 배려 때문에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예화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 예화는 영생의 방법을 알았지만, 구체적인 실천행위에 대해서 막막했던 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최선의 방법’임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율법학자의 질문은 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의 질문은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에 대한 대상으로 야훼 하나님에 대한 목적의식 역시 또렷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쪽으로 가면 좀 애매해집니다. 유대인의 선생임을 자임했던 율법학자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매우 분명했고 확실했던 것에 반해, ‘이웃’이라는 대상은 무언가 ‘규정’과 ‘제한’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제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제 이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때로는 사업상 만나는 이들, 공적인 만남 외에는 특별한 관계를 지속시킬 필요조차 없는 사람들. 그리고 개중에는 이웃이라고 보기에는 경쟁자, 대적자, 혹은 원수에 가까운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는 저의 이웃을 어떤 영역 안에 규정해야 합니까?”


율법학자의 ‘이웃규정’에 대한 반문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변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누가 ‘이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그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후 등장하는 예수의 답변을 추적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바로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하는 이 율법학자의 질문입니다.


이 점을 직시하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무게중심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제관·레위인·사마리아인”으로 점증되어가는 드라마틱한 인물성정에 더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이웃사랑’을 업으로 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이웃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유대계 이웃들로부터 이웃으로서의 관심마저 빼앗기고 사는 일종의 버림받은 이웃인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통해, 보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현장, 그래서 우리는 쉽게 구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따르자!!”


그러나 여기에서도 여전히 문제는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누구였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만난 이웃은 제관의, 그리고 레위인의 이웃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 “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애초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누가가 전하고 있는 예수의 최종선언은 이 부분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대화를 정리하려는 예수의 최후 질문입니다. 예수의 이 질문은 애초에 제기되었던 율법학자의 질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율법학자는 “어느 대상이 자신의 이웃이 되는가?”를 물었지만, 예수는 이웃이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대상의 이웃’이 되어줄 때 형성되는 ‘관계의 결과’임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이웃이란 이미 주어져 있는 ‘타자적 대상’이 아니라, 내 밖에 서있는 저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 아니라, 그를 이웃으로 ‘고백’하고 그에게 다가서는 나의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 속에 ‘이웃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예수는 선언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기 극적인 반전을 도모키 위한 작위적 설정일 뿐, 그 인물들 자체의 본래적 비중 찾기는 별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간에 보다 이 예화를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쓰러진 강도만난 이에게 이웃으로 다가서고 있는 ‘한 인물’일 뿐이지, 그 인물의 신분이나 지위는 결코 아닙니다.


오늘 예화 속에 그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옷 입고 있지만, 때로 그 인물은 레위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제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의 고통에 사무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과연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타인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바로 그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이웃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의 신음소리가 단지 묻혀 지나는 잡음으로만 멈추어 있을 때, 그에게 이웃이란 너무도 멉니다. 저기 쓰러져 피 흘리는 누군가가 단지 대상으로만 읽혀진다면 그에게 더 이상의 이웃이란 찾아내기 곤란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에서, 지구 골목골목마다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고통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이웃이란 머나먼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시 영화 ‘A Time to Kill’로 돌아옵니다. 피의자를 살해한 칼리의 변호사인 브리갠스는 사건 종료 시까지 단 한 가지 사실만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게 됩니다. 백인우월의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또 보수적인 남부지역에서, 그리고 심지어 배심원 전원이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딸아이의 폭행 앞에 이성을 잃고 살인을 저지른 한 흑인 아버지의 심정이 읽히도록 하는 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갠스의 노력은, 흑백의 이념적, 인종적 갈등과 날카로운 편견과 대결의식에 파묻혀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거대담론에 파묻혀 한 인간의 모습보다는 조직과 이념의 대표자로서 칼리를 해석하려 합니다. 치고받는 법정에서의 공방은 때론 피의자에게 때론, 검사측에 유리한 방향이 서로 오가는 형국입니다.


드디어 최후진술만이 남아있습니다. 이미 자신감을 잃고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변호사 브리갠스는 최종변론을 위해 입을 엽니다. “법의 눈도 사람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운을 뗀 브리갠스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최종변론을 이어갑니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제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두 눈을 감아주세요. 그리고 제 이야기와 더불어 여러분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세요. 그래요 눈을 감아주세요. 어느 날 오후,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갑자기 트럭이 서고, 트럭에서 내린 건장한 두 남자는 그 아이를 잡습니다. 근처로 그 아이를 끌고 가 그 애를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옷을 찢어냅니다. 그리곤 번갈아 가면서 그 아이를 성폭행합니다. 술과 땀 냄새에 절인채로 말입니다. 그 일이 끝난 후 아이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됩니다. 그 아이 이후의 생명들과 자손을 잉태할 기회가 더 이상 그 아이에게는 없게 됩니다. 일을 처리한 두 명의 남자는 아이를 표적삼아 먹고 난 맥주 깡통들을 집어던집니다. 얼마나 세게 던지는지 아이의 살은 찢기고 뼈는 드러납니다. 심지어 두 사내는 아이에게 오줌을 갈깁니다. 그리고 나선 아이의 목을 매답니다. 밧줄이 있습니다. 올가미를 만듭니다. 순식간에 아이의 목은 졸리고 허공 속에 끌려 올라가 발버둥 칩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나뭇가지는 튼튼하지 못해 부러지고, 아이는 떨어집니다. 다시 두 사내는 아이를 트럭에 싣고, 다리로 가서 아이를 아래로 내던집니다. 아이는 다리 밑 9미터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 아이가 보입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신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브리갠스의 구체적인 사고묘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심지어 울고 있는 배심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떨어지는 브리갠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지금껏 받고 있던 그들의 동정심을 무더기로 싸잡아 끝 간 데 없는 골짝으로 집어던지게 합니다. 사고당시를 리얼하게 묘사한 브리갠스 변호사는 길지 않은 침묵을 끝낸 후.. 마지막 말을 청중에게 던집니다.


“그 아이가 보이십니까? 성폭행 당하고, 매 맞고, 부러진 몸이요.. 그들의 오줌에 젖고, 자신의 피에 젖어 죽도록 남겨진 것이 지금 눈에 보입니까? 그 어린 소녀를 그려보십시오.”


“그 아이를.... 그 아이는 바로 한 백인 소녀였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브리갠스의 최종 변론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커다란 망치가 되어 배심원과 청중들의 가슴을 흔들어 깨우게 됩니다. 폭행당한 아이가 흑인이 아닌, 백인 소녀라고 생각해 달라는 브리갠스의 최종변론은 그저 먼 남의 이야기로 저 구석에 방치되었던 한 아이의 모습을 바로 내 자신의 이웃으로 끌어오게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신문기사의 한 토막 소식으로 잊혔던 아이의 신음소리가 자기 자식의 아픔이 되어 지금 그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잔디 깎는 기계의 굉음소리나, 지나치는 자동차의 경적소리, 혹은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소리 같은 정도의 의미부여밖에 받질 못했던 한 흑인 소녀의 신음 소리가 이제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 토해내는 ‘내 자식의 소리’로 들리게 된 것입니다.


브리갠스의 마지막 멘트는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그것’이 아닌 나의 ‘이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알량한 피부의 색깔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세계는 돌변하고, 요동치며 진동한 것입니다.


저 아이가 내 딸이었다면, 저 아이가 내 조카였다면, 저 아이가 내 누이였다면!!!


기껏 동물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만 치부하던 흑인의 딸아이가 백인소녀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잃어버렸던 이웃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 오늘 예수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제관이든, 레위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쓰러진 이웃의 고통 소리에 응답하는 이가 바로 이웃이며, 그런 이들 야말로 영생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


따라서 예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웃들의 신음소리에 민감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앙인의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내가 이웃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를 통해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수많은 이웃들이 신음소리를 듣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도처에, 다양한 사연들로 울고 있고, 신음하고 있는 이웃들. 그들의 신음소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우리의 손길과 다짐들 속에 바로 영생은 자리합니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신음과 호소의 웅변들.. 전에 그것을 단지 “그것”이라는 제 3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예수로 인해 변혁된 우리의 새로운 시각은 그들을 단지 그들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인간의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먼발치, 그저 3자로만 머물러있던 그들을 나의 의식과 책임의 영역 안으로 끌고 오는 일, 모셔 오는 일. 바로 그런 우리의 행위 속에 ‘이웃’은 제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제 지금이 "a Time to kill"이 아니라 "a Time to love", 그리고 “a Time to be loved”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생각해보면, 우린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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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5)


부자, 낙타, 바늘귀 그리고 천국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가 10:17~27)


사람들은 왜 종교를 선택하는지요, 그리고 왜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이란 것을 선택하는지요. 목사가 되어서도 저는 잊지 않고 이런 유의 질문을 반복해서 해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를 비롯한 여러 종교기관에 문을 두드리고 있고,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종교라는 것에 연결되어보고자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종교에 귀의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하길 원하는 것인지요.


바로 오늘 우리는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 이렇게 종교적 갈증을 해소하고자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사람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그를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이 사람은 이제 막 새로운 길을 떠나려는 예수 일행의 발걸음을 묶어두고 자신의 깊은 갈증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자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마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길을 떠나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물었다.”


이제 당연히 이 본문을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그처럼 숨차게 예수의 앞길을 막았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마가는 당시의 정황을 옮깁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 분명해졌습니다. 이 사람의 고민은 바로 ‘영생(永生)’입니다. 영생이라 함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어법에 따르자면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와도 동의어가 됩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9장 43, 45, 4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조금 살벌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하나 죄악에 빠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구절들 속에서 예수는 분명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전하고 계십니다.


흔히 영생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 ‘죽은 다음에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올라가 영원히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틀린 이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은 앞서의 설명 중 두 번째 부분, 즉 죽은 이후 천당에 올라가 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라는 개념 하에 어떠한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뜻합니다. 따라서 온전히 주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 모두를 통괄하여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생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단어만 다를 뿐 동일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앞길을 막은 이 사람의 당면한 최고의 문제는 바로 이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임을 우리는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고민은 영생이었습니다. 이승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이 땅의 부패할 것들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처럼 썩어질 속세의 것이 아닌 영구한,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속해있던 전통에서는 그것을 영생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훌륭하다고 칭송 받고 있던 저명한 랍비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묻고 물어 찾아온 것이 예수란 분입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를 만나게 되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말씀을 이미 마치고 발길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인생 최대의 난제를 해결할 분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예서 포기한다면 지금껏 숙성시켜온 자신의 고민 앞에 볼 낯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지체 높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넓죽 예수의 앞길을 온몸으로 막아서게 됩니다. 그리곤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사람의 질문처럼 어쩌면 우리 모두도 이 영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길을 옮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 신앙적 도전 내지는 설정이 미숙한 이들은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 혹은 우리 식구가 잘되기 위해서 등등의 지난한 그리고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연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자의식적인 신앙인’이라 자임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바로 오늘 예수의 앞을 가로막고 나선 이 사내의 고민에 어느 정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처럼 구원의 문제로 예수의 앞에 버티어 서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과 내포하는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우리는 세속의 문제만을 위해서 이곳, 바로 교회에 발길을 옮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애초의 발걸음은 바로 그러한 속세적 내지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앙이 몸에 배이게 되면 저도 몰래 우리는 이승보다는 저 세상을 말하게 되고, 이 땅 보다는 저 하늘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짧고 짧은 인생을 말하기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곳 피안에, 저 하늘에 있는 영생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예수의 발걸음을 묶어놓고 있는 한 사내의 질문이며 또 우리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저의 지난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나?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갖길 원하나? 도대체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위에 언급한 질문들에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오늘 이 부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사내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바로 그와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멋진 해답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예수의 해법을 옮겨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손해 끼치지 말라,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어찌해야 영생을,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사내의 질문에 예수는 무척 전통적인 해법을 내어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십계명입니다. 예수는 질문의 대답으로서 십계명의 후반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하십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는 주로 이웃 사랑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중 손해 끼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신명기 24장 14절에 나오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도 이 조항 역시 크게 보아 이웃사랑의 울타리에 포함되므로 예수의 의도는 십분 살려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답변은 평소 그분의 언행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듯이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서기관에게도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이루어지는 현장 속에 영생과 구원이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고 보고 계십니다. 이제 거의 대답은 완성된 셈입니다. 부자로 지칭되고 있는 이 사내는 예수의 이 언어를 실행에 옮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이 사내의 입을 통해 새어나옵니다.


“선생님, 그런 것은 제가 소년시절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온 몸으로 체득했을 터인데?! 또 무엇이 필요해 예수를 찾아온 것일까요? 만약 예수께서 하신 답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오늘 예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린 이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여전히 영생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면 분명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계명의 본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 혹은 예수의 답변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상을 넘어서는 사내의 대답에 예수의 반응 역시 무척 흥미롭습니다. 마가는 당시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구원의 문제로 전념하는 이 사내에 대한 예수의 따뜻한 마음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스레 여기는 예수의 태도로 보아,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것을 완벽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이 사람의 증언은 거짓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후에 등장할 예수의 답변은 영생, 구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숨죽여 예수의 답변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이제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 이 정도의 말씀이라면,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 증언하지 않고, 손해 입히지 않고, 부모 공경하기를 목숨처럼 하는 일을, 그것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킨 사내라면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예수의 마지막 권면이 꽤 부담스럽기도 할 것이겠지만,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살았다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에 대한 이 사내의 태도는 또한 뜻밖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물러갔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의 증언은 여기서 끝나고 있습니다. 이 부자로 알려진 사내는 평생을 계명을 지키고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예수의 마지막 권고에는 근심으로 빠져들 정도로 허약한 모습을 노출시키고 맙니다. 아니, 그렇다면 이 부자가 앞서 예수께 고백한 내용은 거짓이었단 말인가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 사내는 계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써왔고, 또 나름대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의 이 사내에 대한 포근한 시선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쩌면 이 부분, 즉 부자가 근심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애초에 던졌던 저의 질문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어떻게 사람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질문 말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다시 그 사내의 지고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대답에 의지해본다면, 영생은 계명의 내용을 힘써 지키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힘써 지키는 것에는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부자의 경우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됩니다. 분명히 부자는 이 모든 계명을 힘써 지켰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끓어오르는 구원에의 갈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답변대로라면 그는 이미 영생을, 구원을,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오늘도 그는 구원에 대한 갈증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 외에 또 필요한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요? 바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두 번째 대답을 곱씹어 보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예수는 이 부자에게 딱 한 가지만 부족하다고 말해줍니다. 바로 그것을 준행하면 부자는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부족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예수는 이 부족한 한 가지가 곧 ‘자신의 재산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음’이라고 지적해 줍니다. 그가 여전히 부자인 것이 부족한 바로 그 한가지라....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게 잘 다가오지 않습니다. 혹자는 후반 절에 “나를 따르도록 하라!”는 추종명령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건 조금 억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의 답변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부자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는 당연히 예수를 추종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 부자는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업을 포기하고 그처럼 선한 선생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그 한마디, 바로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고민합니다. 아, 역시 그런 것인가? 교회는 있는 재산을 다 팔아야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인가? 예수의 답변이 가지고 있는 축자적 의미가 남다른 지라 사실 많은 이들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많은 묵상과 기도 후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늘 그렇듯이 구체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계명의 내용은 지극히 실천적이요 구체적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행위의 실행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들을 규정하고 있는 ‘계명의 정신’입니다. 이 얘기는 계명의 조항을 아무리 열심히 준행한다고 하더라도 계명의 정신이 빠져있으면 그 계명에의 준행은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와 부자와의 대담이 조금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분명 이 사내는 계명의 규정을 잘 준행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계명의 정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지켜왔는데도 여전히 구원에의 갈증을 일으킬 정도로 딱 한 가지 부족한 그 무엇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지적해주고 계시는 그 딱한가지는 바로 ‘계명의 조항’이 아니라 ‘계명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구원은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라는 말로도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즉 ’공동체성에 대한 실질적인 확보‘가 구원에 이르는 전제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이 부자는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지만 여전히 그가 속한 세계에 그가 함께 해야 할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즉 그는 이웃 없이 홀로 계명 수행에만 열중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 없는 생활과 세계 속에 있었던 그에게 계명수행은 오히려 쉬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살인할, 간음할, 도둑질 할, 거짓 증언할, 손해를 끼칠 만한 이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갖춘 그는 이웃 없이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정말 이웃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며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혼자 하는 삶에 익숙한 그는 그 이외의 다른 이웃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혼자였고, 그러면서 여전히 계명을 성실히 준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계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웃이 전제되어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인데도 그는 이웃을 잃어버리고도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여전히 목마릅니다. 여전히 구원의 갈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단독자로서는 불가능한 구원의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 했기에 그는 끝없는 갈증에 허덕이게 됩니다.


“이 정도면 법 없이도 사는 나인데… 이 깊은 데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갈증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내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끝내 자신의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이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 예수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도록 하세요.”


부자인 사내가 가진 전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라는 예수의 말씀은 실제로 자신의 전 재산을 포기하라는 내용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이 권면의 언어로 그에게 잊히고 있는 이웃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이 말씀을 던지신 예수께서는 부자 사내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을 원하고 있는 이웃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길 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배부르면 그 누군가인 당신의 이웃도 배부르고 싶고, 당신이 배 골을 때에는 당신의 이웃 중 그 누군가도 굶주려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재물이라 여기는 것도 그 수없이 많은 관계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기에 결국 그것들은 함께 나누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유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적질 한 것과 진배없고, 결국 그러한 독점적 삶으로는 결코 영생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이 사내가 잃어버린 이웃을 되찾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내는 또다시 근심으로 대답합니다. 여전히 그는 이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는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 속에 영생은 요원합니다. 영생은 여전히 수천 수만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주변의 이웃을 외면하고는 결코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생을 얻고,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바로 그 이웃들을 회복한 이들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스쳐 가는 모든 이들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느끼고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자세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여전히 우리 스스로 직접적으로 맺어진 관계에서만, 혹은 기호나 선호에 따라 조성된 편벽적 모임 속에서만 신앙을 운운한다면, 그러한 우리의 모습도 예수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 가운데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경험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 고백의 존재로서 서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또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이기를 빕니다.


우리가 말하는 영생-구원-하나님의 나라는 이기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특별함’과 나의 ‘편함’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수천수만의 얼굴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나와 나의 가족만의, 혹은 나와 친한 얼굴들만 있다면 여전히 부족합니다.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웃에 대해 가급적 최선을 다해 책임지려는 모습, 그것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부자 사내와 예수의 대화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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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4)


산타가 홍포를 두른 까닭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하시니라.(마태 25:31~46)



성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는 날인데 어느 날인가부터 국적도 없이 등장한 홍포를 두른 허연 수염의 할아버지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설쳐댑니다. 이렇게 성탄의 즐거움은 교회보다는 밖에서 먼저 가로채 향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가로챈 성탄의 중앙엔 역시 예수의 모습은 순진무구한 아기의 이미지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예수의 오심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뜻을 곱씹으며 성탄의 의미를 몸으로 알아가는 이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도 대중매체를 통해 만나는 성탄의 이미지는 이미 본뜻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성탄 이미지 한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홍포를 두른 두툼한 몸매의 한 나이든 사나이가 자리합니다.


바로 그의 이름 산타 클로우즈.


지금도 여전히 해마다 그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아기 예수보다도 더 이 할아버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성탄선물을 고대하는 아이들을 위해 친히 그의 모습으로 치장하여 산타의 신화 잇기에 협력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의 이름 산타 클로스.


제 아이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저도 어린 시절 항시 그날이면 이 붉은 옷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전히 성탄이면 온 거리를 가득 메우며 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하는 이 산타 클로스. 붉은 피보다도 더 선명한 홍포를 두른 이 할아버지.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인지, 저는 그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 졌습니다.


‘도대체 산타는 어디서 오는가? 그는 왜 붉은 옷을 입고, 그것도 오리털 패딩도 아닌 두터운 솜옷을 입고 있는가? 왜 그는 벤츠도 BMW도 아닌, 아니 백번 양보하여 말이 끄는 썰매도 아니고 코가 붉은 사슴이 끄는 썰매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에스키모인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탄다고 하는데, 왜 산타는 사슴만 고집하고 있는 걸까? 왜 산타는 그처럼 통통한 몸매에도 하필이면 좁디좁은 굴뚝을 주 통로로 삼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너무도 멋지고 예쁜 선물상자들이 널려있는데, 왜 산타는 여전히 냄새나고 자그마한 양말에만 선물을 담는 것일까?’


순식간에 산타에 대한 온갖 궁금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도저히 이 궁금증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저는 분연히 일어나 산타의 정체를 밝혀보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여러 서적을 통해 확인한 산타의 정체는 약간 의외의 모습으로 제게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잠시 산타의 정체를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타는 아마 북부 추운나라 어딘가에서 탄생했을 거라 믿는다. 실존 인물이든 상상 속의 인물이든 말이다. 그러나 산타는 과거 시이저로 하여금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했던 터키의 중앙. 아나톨리아지방의 남쪽 Myra(현재는 Kale)라는 곳, 그러니까 추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막지형에 가까운 곳에서 4세기경에 살았던 실존 인물 니콜라우스란 사람이 그 모델이 된 것이다. 어린이를 특히 좋아했다는 그는 평생 갖가지 선행을 행했다는데 그 중에서도 세 명의 자매가 구혼자가 있음에도 가난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자 이들을 몰래 도와주기 위해 저녁에 그 집 지붕에 올라가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그 금 주머니가 우연찮게 벽난로에 걸어 두었던 양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기대치 않는 선물을 받았을 경우에는 항상 이 니콜라우스에게 감사하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이 니콜라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네덜란드인에 의해 뉴욕에 자리 잡은 후 자본화, 상품화의 연금술사인 미국인들에 의해 재창조되어 지금의 산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전 세계로 역수출되었다고 한다.


산타의 고향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다고 여겨져 그곳에 설립되어진 후 매년 전 세계 어린이들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산타본부는 원래 이 지역에서 구전되던 말을 타고 선물을 나눠줬다는 바이킹의 신 Odin과 염소를 타고 비슷한 일을 했다는 그의 아들 Thor의 전설이 미국식 산타와 결합하여 그리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터키에 살았던 성 니콜라우스와 염소를 타고 다녔다는 바이킹의 신이 미국에서 만나 그 후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건너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 산타할아버지라는 것이다. 배가 볼록하여 늘 기분 좋게 “ 하! 하! 하! Merry Christmas!!”라고 말하며 웃는 흰 수염의 할아버지는 성 니콜라우스의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성 니콜라스의 외모가 이랬던 것은 아니고, 흰 털이 달린 빨간 옷에 검은 벨트를 두르고 긴 모자를 쓴 모습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 니콜라스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산타클로스협회 홈페이지, <산타의 유래> 참조

http://desk.santaclaus.or.kr/shopinfo/santaclaus.html)


이상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산타의 유래입니다. 지금의 터키지역에서 남몰래 선행에 힘쓰던 니콜라우스가 산타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의 모습은 여러 목적이 섞여 들어가 재창조된 이미지들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산타의 그림도 역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의 산타만은 여타의 각색에도 좀처럼 탈색되지 않은 이미지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행에 힘쓰며 또한 그들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 니콜라우스의 모습은 사실 성탄의 의미와도 잘 부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삶도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선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오신 날에 산타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왜 제 마음은 이리 편치 않은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산타의 그림에서 변조된 무언가가 하나 둘씩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산타가 산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이웃에 대한 애정과 봉사에 있습니다. 즉 선물을 나누어주는 니콜라우스의 모습이 바로 산타의 원형인 셈입니다. 그런데 산타를 맞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니콜라우스의 모습이 아니라 선물을 받고 있는 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니콜라우스가 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만 채워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니콜라우스의 자리는 거대 기업이나 상업주의로 치장한 각종 다양한 매체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돈만큼 우리는 니콜라우스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돈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먹고 마시게 했던 니콜라우스의 모습은 이제 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세상입니다.


‘각자의 여유 있는 만큼의 자금을 가지고와 니콜라우스의 은총을 만끽하라!’


조금 아리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아들이고 있는 니콜라우스의 정확한 모습은 바로 그것일 따름입니다. 어디에도 공짜는 없습니다. 투자한 만큼의 응당한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수없이 복잡하게 오가는 자본의 흐름 속에 산타의 이미지는 상업적으로 이용되며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할 것입니다.


상황이 이쯤 이르게 되자, 저는 갑자기 산타의 이야기에서 마태가 전하고 있는 최후 심판에 대한 모습을 읽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심판의 이미지 중 가장 장엄하고 준엄한 그림을 지니고 있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오고 있는 바로 그 심판의 모습이 제 머리 속에서 곧바로 산타의 이미지를 대체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그 사연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의 최후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종말심판의 대상입니다. 사실 신구약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유대중심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박혀있는지라 이방인은 성서에서도 부정적이거나 속된 종족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구원과 믿음의 주체도 대개는 이스라엘 종족으로만 국한됩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는 우리에게 최후 심판의 대상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반부에 적혀있듯이 최후 심판의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은 특정부류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참석해야만 하는 종말심판! 바로 이 장엄한 그림을 마태는 선언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인자의 종말심판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 선언! 우리에게 주는 무게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심판을 향해 모이게 된 시점에서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이 종말심판에 대한 비유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두 번째 의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종말심판의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종교나 신앙도 아니고 기도와 예배도 아니며, 오직 불행한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들을 가련히 나의 마음속에 담아내는 행위, 그들을 애달피 여기는 정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표됩니다. 즉 이웃을 위한 내 삶의 진실도와 실행의 크기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이 비유는 확연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종말 심판의 잣대는 기존 우리가 입에 발린 듯이 외고 다녔던 ‘신앙고백이 종말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과는 적지 않은 괴리감을 줄 정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 등장하는 마태의 진술을 살펴보면 그 괴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실 마태 자신도 그의 복음서 10장 32-33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같은 복음서 7장 21-23절에 기록되어 있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범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위에 인용된 성서 구문을 생각하면 삶속에서 구현되는 실천적 신앙고백의 강조는 전혀 충돌되지 않는 지속적인 마태의 전승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태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종말심판의 기준을 잠정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의 심판 기준 역시 신앙의 고백이긴 마찬가지이나 그 신앙의 고백이 언어 속에만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신앙의 고백이 생활 속에 녹아있을 때에야 심판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통 받고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신앙이란 의미 없다는 말이 바로 이 종말이야기가 전하는 핵심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니, 니콜라우스야말로 이 심판의 기준에 가장 적합한 증인일 수 있습니다. 평생을 이웃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이미지 속에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을 통해 기다리는 것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는 산타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 있는 산타가 된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너무도 뻔 한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지만, 말씀을 매듭짓기 전에 마태의 최후심판 이야기를 잠시만 더 붙잡아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흑백논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흔한 말로 권선징악이 주는 통쾌함에 무척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종말심판을 하나의 영화로 생각하며 살펴본다면 흔한 할리우드식의 문법과는 다른 구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희미한 선악의 구분입니다. 흔히 우리들 머릿속에는 양으로 비유된 선한 그룹과 염소로 비유되는 악한 무리들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을 터인데, 실상 꼼꼼히 살펴본 이 비유의 구조는 반드시 그들이, 즉 인자의 왼편에 세운 무리들이 악인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던 왼편 염소 무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실성마저 읽어보게 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가감 없이 전해주고 있는 두 무리의 차이는 이웃에 대한 행위 바로 그것뿐입니다. 그 외에 그들이 범죄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 신앙적으로 불충분한 삶을 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유는 상당한 경지의 고감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자는 오른편의 무리들에게 축복의 언어를 던집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인자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심지어 감옥에 있을 때 그 사정을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기준으로 왼편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으로 저주의 언어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자의 판결에 항소하고 있는 이 두 무리들의 변론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변론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리고 인자의 저주를 받고 있는 무리들도 거칠게 항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심판을 받은 두 무리의 변론이 이처럼 동일하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언제 굶주리고 목마른 주님을 모른 체 했느냐?”는 저주를 받은 무리의 항변은 애끓을 만큼 사람의 마음을 진동하는 처절함으로 다가옵니다. 어찌 이 이야기만으로 그들을 악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항변은 사뭇 진실을 담고 있고 또 절박하기까지 해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정말 굶주리고 목마른, 그리고 나그네 된 주님을 결코 만난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항변을 통해 오히려 저는 그처럼 주님에 대한 절절했던 그들의 기대, 고행, 그리고 인내로 점철된 순례의 길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들은 그처럼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절절한 사연으로 주님을 찾지 않았던 사람의 입에서 그런 처절한 항소의 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애절히 언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느냐고 항변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평생 주님을 찾기 위해 애썼던 순례자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 그렇게 큰 비약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 점에서 언제 우리가 주님을 도와주었느냐고 반문하던 첫 번째 축복받은 부류의 사람들보다 더 신실하고 진지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습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처럼 억울함을 헤어날 길이 없어 쏟아내게 되는 항소의 말을 토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야 말로 주님을 찾기 위해서 평생을 허비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언제 당신이 굶주렸고, 언제 당신이 목이 말랐고, 언제 당신이 나그네가 되었고, 언제 당신이 헐벗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도대체 언제 당신이 병들었고 심지어 감옥에까지 갇혀있었습니까? 도대체 언제.... 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십니까? 더군다나 세상의 임금이요, 인자요, 심판자로 오실 당신이 어떻게 굶주리고, 목이 마르고, 나그네가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될 소리를 하십시오... 차라리 주님께서는 우리들보다 저자들을 더 편애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마세요! 애매한 착한 사람들 나쁜 놈들로 몰아가지 마시고.... 우린 평생 당신을 찾아 헤맸지만 당신의 그림자조차 만난 일이 없어요! 이거 사람 엉뚱한 일로 몰아세우지 마세욧!”


사실 왼편에 있었던 이들의 언어는 제가 옮긴 내용 이상의 더 절박하고 또 더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억울함에서 터져 나온 항소의 언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따져서는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자신들만 악마와 그 심부름꾼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야만 되는 현실을 어느 누가 편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 역시 막가는 인생으로 종을 친 사람들도 아니고 구석구석 심판의 왕으로 오실 주님을 찾느라 소중한 인생을 소진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앞에 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들의 항변은 정당했고 또 마땅히 그렇게 변론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관은 이들의 항소에 정확히 답변을 해야 할 책무마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심판관의 대답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심판관의 답변은 양쪽 무리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입니다. 똑같은 항변에 똑같은 대답! 어느 유능한 작가가 이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장엄한 심판의 언어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몰래 제 주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그마한 방 하나에 뭐 특별날 것이 없는 곳이긴 하지만.... 제 삶 속에서 혹시 놓쳐 버린 주님의 모습은 없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제 고개는 연신 저의 주변을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고정된 이미지로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요란스런 홍보와 함께 뜨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내 의식 속에 아니 내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 누군가의 모습으로 나와의 만남을 계획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백 개, 천 개 혹은 만 개의 얼굴을 가지고 언제나 친근하게 혹은 귀찮게 우리 주변을 서성이듯 맴돌고 있는 분이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 진행되자, 저는 이제 마땅히 산타가 성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곤란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산 바로 니콜라우스야 말로 성탄의 의미를 십분 살리는 최상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성탄 우리 모두 산타가 되었음 어떨까 생각합니다. 받는 즐거움보다 주는 기쁨의 포근함을 우리 모두 만끽하는 그런 날이 되었음 어떨까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애꿎은 주님의 고정된 이미지를 좇아 헤매기보다 분명한 우리의 이웃 속에서 주님을 느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또한 기도해 봅니다. 그토록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던 많은 이들 가운데 스며있는 주님의 체취를, 그의 내음을, 그의 그림자를 느끼는 예민한 신앙이 우리 가운데 가득히 넘쳐나기를 또한 기도해 봅니다.


여러분, 저는 다시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우리 산타가 됩시다. 비록 우리에게 반짝이는 빨간 코를 한 수사슴은 없어도, 멋들어지게 물들인 붉은 홍포가 없어도, 또 많은 이들을 위해 그득히 담아놓은 선물꾸러미가 없어도, 우리 한번 멋진 산타가 되어봅시다. 비록 준비된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보다 멋진 산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잊힌 얼굴을 궁금해 하며, 그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근심의 마음을 담으며 그의 연락처를 열심히 확인하는 우리의 손등에서, 즐거운 일이 생긴 이에게 찾아가 기쁨을 나누어 받는 우리의 정감 속에서, 혹 근심에 빠져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 낙담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의 언어와 애달픈 정서를 건네는 우리의 신실함에서 언제나 산타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갇혀 지내는 내가 아니라 내 의식 속에 있는 모든 이들과 또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들의 내음과 음성, 웃음과 눈물, 슬픔과 걱정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이라면 결코 산타와 멀지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또 기원합니다. 눈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만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산타가 되어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하게 되기를, 또한 그러한 마음을 함께 나누게 되는 성탄이 되기를 저는 지금 간절히 기원합니다.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 빼앗긴 성탄절 http://fzari.tistory.com/1035

* 성탄전야의 유혈극http://fzari.com/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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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3)


성탄전야의 유혈극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태 2:16-18)


설교 제목을 ‘성탄전야의 유혈극’이라 뽑았지만, 본문을 살피면 정확한 표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헤롯이 새로 태어날 이스라엘의 왕을 처단하기 위해 베들레헴 근방의 사내아이를 살해한 사건은 성탄 이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상징하는 바와 성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본다는 뜻에서 무리해서 제목을 그리 뽑아보았습니다.


또 다시 성탄의 달이 돌아왔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 해 마지막달의 느슨한 분위기 때문에 올해 성탄도 우리에게 그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축제라는 이름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성탄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익숙합니다. 동방의 점성가 세 사람이 기이한 별을 감지하고, 그것을 좇아 유대 땅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곤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에게 들려 “새로 난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는가?”고 묻게 됩니다. 성서에는 이 세 사람의 신분이 박사라고 표현되어있습니다. 원문에 의하면 “동방에서 마고스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고스란 점쟁이를 지칭하는 말인데, 마태의 기술 전체를 통해 살펴보면, 그들은 별을 보고 유대 땅을 찾아왔으니 필시 점성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점성술은 인류 최초로 문명이 발생되었다고 여겨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성행하였습니다. 그러니 동방에서 왔다라고 하는 말은 그들이 바로 그 지역 출신임을 뜻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곤 더 이상의 언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분이나 이름 등 모든 것이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이들에 대한 신화화 작업이 진행되어 서기 500년경에는 이들의 신분은 점성가에서 임금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더 나아가 이들이 준비한 선물인 황금, 유향, 몰약 등 세 가지 예물을 들어 이들을 세 명이라 고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이들 점쟁이들은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는 이름마저 부여받게 됩니다. 심지어 이들 말고 또 한 사람의 동방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가 예수의 탄생이 아닌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이들의 이름은커녕 정확한 신분과 숫자도 알 수 없습니다. 성서는 그저 “동방에서 온 점쟁이들” 정도로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우리의 상상을 동원한다면, 그들이 유대 땅에 들어와 당당히 그 지역의 왕을 알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높은 신분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점성술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학문으로 지금의 미신적 행위와는 달랐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아무튼 이렇게 동방으로부터 유능한 지식인들이 유대 땅에 와서 새로운 왕의 탄생한 곳을 묻고, 헤롯은 유대의 박사들을 통해 베들레헴이 유력한 후보지임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 후 동방에서 온 점성가들은 베들레헴으로 향해 갓 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오늘 택한 본문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갈 때 꼭 들려달라는 헤롯의 부탁을 어기고 몰래 다른 지방을 통해 유대 땅을 빠져나갑니다. 이에 격분한 헤롯이 그 때를 시점으로 갓 태어난 모든 아기들을 몰살하도록 명령합니다. 장차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경쟁자를 미리 없애버리기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나 그 때 마침 예수는 천사의 현시로 인해 이집트로 도피하게 되어 그 수난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일을 마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라마의 학살로 인해 라헬이 통곡한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 증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라헬은 언니인 레아와 더불어 이스라엘 12지파 조상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베냐민이 그녀에게서 출생하였습니다. 베냐민을 낳을 때 겪은 산고로 그만 목숨을 잃은 라헬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라마지역에 묻히게 됩니다. 이 라마 지역에 가나안 땅 점령 때부터 바빌론 유배 다음까지 라헬이 낳은 베냐민의 후손이 살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에 패망하여 기원전 597년과 587년에 무수한 유대인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갈 때 라마 주변에 살던 베냐민 부족도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이 때문에 라헬의 무덤에서 구슬픈 곡소리가 들린다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렘 31:15) 그런데 또 다른 전승은 라헬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고 묻혔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창 35:19, 48:7) 마태는 바로 이 전승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어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하자 베들레헴, 곧 라마에 묻힌 라헬이 통곡하였다고 풀이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과연 베들레헴을 라마로 해석한 마태의 해석이 옳았나 아닌가를 놓고 설왕설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역사적 증언인 예수의 탄생 때문에 벌어진 이 끔찍한 학살극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설교 주제로 잡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중3이던, 이름은 이제 잊었지만 표정과 눈빛만은 여전히 생생한 한 여학생의 질문에서 오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때도 오늘처럼 성탄절이 있는 12월의 어느 한 주였습니다. 학생부 예배가 끝나자 쪼르르 그 학생은 저에게 다가오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도사님!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신 거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처럼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요….”


물기어린 눈으로 던지는 중3 여학생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습니다. 예수가 오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생의 항변에 저는 잠시 주춤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질문은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그것의 본뜻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저 성탄의 분위기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이들에게 성탄 이후 서슬 퍼런 칼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살해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태어난 지 두 돌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다니! 당시 저는 그 학생의 도전적 질문에 나른했던 저의 성탄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제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고 꿈도 아닙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며 역사이며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역사의 흔적과 의미, 그리고 현실과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면 영원히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당시 저는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성탄은 하나의 신화일 뿐입니다. 그저 기분 좋은 추억이요 환상일 뿐입니다. 필터를 사용하여 뿌옇게 구름 위의 모습으로 꾸며놓은 장식 사진처럼 성탄은 그저 아련한 우리의 신화 속에서만 자리하고 있는 무엇입니다. 그처럼 잘 치장된 성탄의 신화 속에서 곧잘 우리는 정겨운 이와의 즐거움과 기쁨을 주고받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살피면, 성탄은 그러한 신화 속에 파묻히기에는 너무도 절절한 역사의 순간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날은 너무도 많은 아기의 피가 서린 날입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아기를 잃고 비통에 잠긴 어미와 아비의 피 토하는 억울함이 진동하는 날입니다. 그날은 세상에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아직 채 아픔의 통증도 잘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 외마디 비명으로 생을 달리한 날입니다. 그 날은 그들의 싸늘한 시신을 가슴에 묻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어야 하는, 혹 그러다 자신들마저 명을 바꾸어야 했던 어미와 아비의 날입니다. 그들의 주검과 피 앞에 우리의 성탄은 도대체 어떤 모습,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요!


오늘 설교의 소재는 예수의 오심과 라마의 대학살이 시간적으로 함께 한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두 사건을 연속선상의 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이 두 사건은 정확히 그 의미와 배후를 살펴본다면 서로 다른 두 개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먼저 예수의 오심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정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그저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겠다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 곧 예수의 오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라마의 대학살은 하나님의 사랑 표현을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한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끔찍한 사건입니다.


어찌 보면 성탄 역시 우리에게 두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 날은 기쁨의 날이 되겠고, 제 이익과 욕심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에게 그 날은 파멸과 공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구도는 지금 우리의 시대에까지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촛불 몇 개와 함께 온다는 사실 보다는 이를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성탄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날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표현되는 날인가요, 아니면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확인하는 날인가요? 이처럼 우리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두 가지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당시 저는 그 학생의 전투적인 그 질문 앞에 다음과 같은 궁색한 답변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도 만약 예수가 오지 않았다면 물론 아이들은 죽지 않았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예수의 의미를 양적인 의미로만 해석한 아주 치졸한 답변이었습니다. 예수가 와서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안 죽었다는 식의 답변 말입니다. 사실 그러한 방식으로 예수의 오심이 해석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학생의 질문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 저에겐 부담으로 남아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는 이 성탄을 도대체 어떻게 준비해야만 할까요?


생각해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저질러질 수많은 성탄 전야의 유혈극을 생각하고 여전히 자기 본위에만 빠져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노라면, 흐느끼는 라헬의 곡소리가 그리 멀 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라기는 성탄이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 빼앗긴 성탄절 http://fzari.tistory.com/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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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2)


빼앗긴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복음 1:18~23)


"Happy Xmas(The War is over)"

by John Leonnen

So this is Xmas. And what have you done.

Another year over. And a new one just begun.

And so this is Xmas. I hope you have fun.

The near and the dear one, The old and the young...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And so this is Xmas. For weak and for strong.

For rich and the poor ones.

The world is so wrong

And so happy Xmas. For black and for white.

For yellow and red ones Let's stop all the fight.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And so this is Xmas. And what have we done.

Another year over. A new one just begun.

And so happy Xmas. We hope you have fun.

The near and the dear one. The old and the young.

A very Merry Xmas. And a happy New Year.

Let's hope it's a good one Without any fear.

War is over, if you want it. War is over now.

Happy Xmas


벌써 12월입니다. 이미 11월 말부터 시작된 TV광고와 백화점의 장식등이 12월에 있는 ‘그날’이 곧 우리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려줍니다. 방금 읽어드린 존 레논의 “Happy Xmas”도 바로 12월에 있는 그 날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그날은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축제가 되어야할 성탄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입니다.


12월로 접어들기 전부터 온통 세상은 성탄절 분위기로 바뀝니다. 곳곳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캐럴 송과 성탄 장식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분명 성탄절은 예수란 인물의 탄신일임에도 요즘 성탄절 소식은 교회보다는 다른 곳에서 먼저 접하게 됩니다. 거리 구석구석 화려한 포스트에서, 매일 매일 우리 눈을 고정시키려 몸부림 치는 커다란 TV 속에서, 언제나 우리 옆에서 친근한 음악을 선사해주는 심야 라디오 디스크자키의 달콤한 멘트 속에서, 우편함을 가득 채워 쓰레기 분리의 지겨움을 선사하는 오색찬란한 각종 광고지 속에서, 언제나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교회보다 한발 앞서 인사합니다.


이런 조짐이 11월 중순부터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대체로 교회는 잠잠합니다.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귀한 성탄 찬양은 오직 12월 25일 그날 하루만을 위해 존재하나 봅니다. 다들 벙어리인지, 아님 귀머거리인지, 교회는 고작 우리의 본질을 일깨워주기 위해 오신 이의 날을 하루 이틀 안에 해치워버리는 상당히 경제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탄의 분위기를 매년 느끼며 적잖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때로 그 느낌은 성탄을 잃어버렸다는, 아니 빼앗겨버렸다는 분노로 바뀌기도 합니다. 성탄을 빼앗긴 교회, 성탄을 잃어버린 신앙... 그것이 현대 교회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성탄은 초대교회 성도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탄생보다는 부활에 더 큰 비중과 가치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바로 예수의 행적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 중의 하나라 여기는 마가복음에 예수의 탄생기사가 빠져있다는 점에서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로마의 박해시기를 거쳐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적인 종교로 인정받음으로써 점차 예수의 탄생일은 점차 비중 있게 다뤄지기 시작합니다. 통일된 로마제국의 종교이념으로서 그리스도교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336년경에 이르러 로마인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였던 태양일 축제(동지)에 맞추어 지금의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고정됩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날짜 지정은 로마식의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과정의 부산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날짜의 기원도 아니며, 그 날짜의 진위여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날짜에 대한 ‘의미 부여’이며, ‘가치 부여’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원과 이유가 어쨌든 간에 성탄은 예수의 오신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구원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미를 주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체의 모습을 입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그분은 온 몸으로 보여주시다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그런 예수의 의미와 목적을 재확인하며 기억하여 계승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이미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성탄절은 상업주의에 멍들어 시퍼렇게 변색되어갑니다. 그 와중에 교회가 보여주는 초라한 모습은 교회의 구석구석마다 각 기관끼리 모여앉아 미리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며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지극히 성탄에 반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혹자는 깊은 밤을 깨우며 그분의 오심을 노래로 전달하는 새벽 송에 큰 의미를 두며 안위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교회 신자 집들만 방문하며 그들이 준비한 음료와 선물에만 기뻐하는 이기적 모습을 내 비칠 때는 그것 역시 위장된 안위일 뿐이라는 것이 금세 탄로 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대형교회들은 이런 저런 번거로움을 이유로 이 같은 통과의례마저 간략히 생략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에게 성탄절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더 이상 우리는 제대로 된 성탄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땅의 그릇된 모습과 방향에 채찍을 들어 포효하셨지만,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교회는 그분의 하신 일을 따라 하기는커녕 그분의 의미마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의 주인공은 더 이상 예수가 아닙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무덤에 갇히었다 3일 만에 부활한 뒤 하늘로 올라갔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한 사나이가 아니라, 매년 앞장서서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빨간 옷의 사나이, 흰 수염에 두둑한 뱃살을 자랑하는 바로 산타일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산타는 오래 전 가난한 이의 벗으로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니콜라우스도 아닙니다. 그들은 더욱더 많은 물건을 소비자들에게 안기기 위해 고용된 일용 세일즈맨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성탄이 있기 몇 달 전부터 철저한 훈련을 거친 후 고객들 앞에 다양한 매체를 타고 등장해 성탄절은 다정한 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 1년 동안 덕본 이들에게 답례품을 주는 날, 가족들과 혹은 연인과 함께 그윽한 분위기의 호텔에서 한 끼 외식을 하는 날, 좀 더 잘 나가면 그 연인과 함께 커피 향으로 무드가 익는 안락한 스위트룸에서 남은 여장을 푸는 날, 그리고 수많은 선물과 상품권들은 이해와 타산에 의해 덕 볼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는 날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성탄절 특수’란 말이 있듯이 성탄은 연인들과 가족들이 그럴듯한 영화 한편 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중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광폭의 스크린에서는 예수란 사나이와는 전혀 다른 변종의 구세주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안방극장을 방문하는 대머리에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표정이 전매특허인 브루스 윌리스의 무자비한 살인행위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구세주를 영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로만 성탄절은 장식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이상을 뛰어넘어버립니다. 지금도 내전(內戰)에 시달리는 세계 여러 나라들,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성탄절은 그야말로 의미 없는 많은 날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전히 인류의 구세주가 왔다는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총탄의 희생자가 되고 있으며, 선진 부국의 식당에서 쏟아지는 음식찌꺼기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식량문제에 여전히 많은 어린 아이들이 부황기의 얼굴로 죽어가는 그 날도 바로 12월 25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저주스러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표정 없는 이성의 힘으로 역사상 비교할 수 없을 호황기를 누리고 있으며, 지금의 농업기술은 이미 전 인류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농작물을 수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계 앞에서도 수없이 굶어주는 주검을 우리는 목격해야합니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데도 구하지 못하는 이 원통한 우리의 현실을 어찌 저주받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잠잠입니다. 지금 교회는 그 옛날 예수란 이가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권세 있는 발언’은 잊은지 오래 같습니다. 이미 교회는 벙어리가 된지 오래이며, 이런 성탄의 퇴색 속에도 흐뭇한 선물 교환과 그해 전도 왕에게 멋진 상품권 안기는 것으로 모든 것을 퉁치려 합니다.


그래도 교회는 잠잠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탈출했다 까닭모를 정치계산에 밀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수많은 난민의 두려움 속에서, 한 술의 죽이 없어 힘없이 눈을 감는 우리의 또 다른 자녀들 속에서 아기 예수 역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잠잠합니다. 우리에겐 그 귀한 잠을 참아내며 완주한 새벽송이라는 면죄부가 있기 때문일까요?


교회는 잠잠합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할 그 어떤 꿈도 꾸지 않는 채! 지금도 우리는 잠잠함으로 우리의 신을 모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성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탄의 의미로 오신 분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교회가 이 임마누엘의 신앙을 참으로 온 몸으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성탄은 산타의 몫일뿐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저주까지 퍼부어가며 욕했던 존 레논이 부르는 이 캐롤이 되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셨나요?

한 해가 지나고 막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답니다.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즐거운 일들이 함께 했기를 기대합니다.

가까운 이나 다정한 이나, 나이 든 이나 젊은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는 약한 이나 힘 있는 이나

부유한 이나 가난한 이들 모두를 위한 날이길 바랍니다.

그래요, 세상은 그처럼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피부가 검은 이나, 하얀 이, 그리고 노란 이나 붉은 이들…

그 모두에게 행복한 크리스마스이길 바랍니다.

자, 이제 모든 싸움을 끝내도록 합시다.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셨나요?

한해가 지나고 막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답니다.

그처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여러분 모두에게 즐거운 일들이 함께 했기를 기대합니다.

가까운 이나 다정한 이나, 나이 든 이나 젊은 사람 모두에게…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그날이 참 좋은 날이라 희망합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없는…

만약 여러분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전쟁은 끝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그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Happy Xmas!”


그가 홀로 외쳤듯이 우리도 외치길 바랍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싸움을 끝냅시다. 모든 전쟁을 멈춥시다. 그분이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속물의 세상을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살아가는 법을 보이신 분이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할 말을 하며, 해줄 일을 해나갈 때 잃어버린 성탄은 다시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이제 고함이라도 칩시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로 실망의 눈빛만을 쏘아붙이고 있다면, 우리가 나섭시다. 작은 소리가 큰 함성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러한 꿈을 꿉니다. 언젠가 정말 성탄다운 성탄을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임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기원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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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1)


예수를 따른 다는 것


예수의 일행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하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9:57-62)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신앙을 갖게 됨으로 마음에 지극한 평온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어두운 밤길에서도, 지독한 풍랑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혹은 이렇게 고백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일 때문에 나는 실패하던 인생이 반전하여 성공과 영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그리고 때론 이런 소리도 들려올 겁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내 삶이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라는...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소식과 소리는 먼 나라 얘기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우리 이웃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입을 모아 노래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배워 바른 길가니 우리의 삶과 생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같은 신앙인의 즐거운 삶을 따라가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조아리며, 아울러 그 때문에 촉발된 평온과 기쁨, 즐거움, 행복이 언제나 우리 안에 가득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구절에서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는 조금 다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세 번의 경우를 통하여 자신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러주시고 계십니다. 그 세 번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친히 찾아와 길가는 그의 앞을 막아서고 이렇게 고합니다.


“선생님!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이 사람에 대한 정보는 앞에 인용한 선언 말고는 전무합니다. 다만 우리는 유추를 통해 그의 대강의 모습을 그려 볼 따름입니다. 격정적이고 열의 있는 고백은 아마도 그가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음을 상상하게 해 줍니다.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혹은 친히 예수의 설교를 접하고 마음에 일어난 감동과 격동을 감출 길 없어 이 한 몸 위대한 스승을 위해 투신하겠노라고 굳은 다짐을 하고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한 젊은이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구절을 통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젊은이는 길가는 자신의 선생이 될 사람의 발걸음을 막아서며 이렇게 선언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젊은이로 추정되는 이의 소박하고 뜨거운 결심 앞에 예수가 전하는 언어는, 그러나 뜻밖에도 무척 서늘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습니다.”


도대체 예수는 무슨 의도로 이런 답변을 그에게 던지신 것일까요? 왜 그분은 자신을 평생 따르겠노라고 다짐하는 이가 지닌 가슴의 열정을 이토록 식게 만드는 차가운 답변을 내 놓은 것일까요? 참으로 고약한 답변입니다. 마치 체념한 이의 언어처럼 예수의 대답은 이 이름 모를 젊은이의 뜨거움을 순식간에 가라앉혔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눈에 별안간 자신의 길을 막고 자신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평생 따르겠노라고 다짐하는 젊은이가 처음에는 고맙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길에 대한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앞뒤 재지 않고 성급하게 추종의 고백을 던지는 그에게 자신을 따른 다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일러주어야 할 책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여보게 친구,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네의 결심과 의지는 내 고맙게 여기네. 허나 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를 아나? 그것은 외로움이 연속일세. 무수히 따르는 군중 속에서 가슴에 심은 진리 하나 부여잡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최후까지 투신해야만 하는 무척 고독한 투쟁일세. 때로는 사람들은 이렇게 진리를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대접하곤하지. 왜냐고? 그렇게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언제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일세. 그들의 관습과 전통, 혹은 버릇들마저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바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과 울타리로부터 그처럼 진리를 전하는 이들을 몰아내기 일쑤이네. 때로는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겠지. 허나 사람들은 극히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기 마련이라네. 늘 그런 진리의 영역은 먼 나라 이야기로 돌리고 당장의 현실에서 나만의 이익에 충실하기 마련일세. 우리는 그런 이들을 상대로 그동안 지니고 누려왔던 특권을 포기하라고 외쳐야만 하는 걸세. 따라서 이러한 일은 한순간의 격정과 열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끊임없는 인내와 외로움의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생활화된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세. 생각해보게, 여우같은 짐승들도 돌아갈 제 집이 있다네. 심지어 하늘을 나는 작은 새들도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진리를 전하는 이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네. 왠지 아나? 그들이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네.”


예수는 짧은 언어 속에 자신을 따른 다는 의미를 가능한 포괄적으로 담아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는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겠노라 다짐하는 자신의 동료가 될 사람을 향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본래적 외로움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러한 의도는 두 번째의 경우에 또다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예수께서 더 적극적이십니다. 예수께서 곧 다른 이를 향하여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오히려 예수께서 서늘한 답변을 접하게 됩니다.


“선생님, 제가 먼저 물러가서 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아마도 당시 예수의 추종명령을 받은 이 사람은 막 부친상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손수 완수하겠노라고 전언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관습상 지극히 당연하고 또 타당한 일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장례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상을 당한 경우에는 일상 속에서 언제나 반복해서 외워야 하는 신앙 고백문과 심지어 정해진 시간에 드려야 하는 기도마저 면제받을 정도이니까요. 이러한 관례는 후대에 이르러 상을 당한 이는 모든 율법과 계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해석까지 나오게 됩니다. 더군다나 직계 가족의 장례는 무엇보다 중하여 언제나 몸을 깨끗이 해야만 하는 제관조차도 부모와 가족의 장례는 손수 치러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중요하고 또 소중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이의 심정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져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내버려두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시오.”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뜻밖의 답변을 던지신 예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금껏 아무런 도전 없이 언제나 그럴듯한 진리로 대접받고 있던 통념을 단박에 무너뜨리시는 그분의 의도! 오히려 아직 제대로 된 사회적 규약과 법칙이 정비되어있지 않아 자신의 신분과 안녕, 그리고 복지를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가족 간의 돈독한 유대감일 텐데, 그래서 장례나 기타 가족의 경조사 참여는 본질적으로 심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시기하는 이들의 언어처럼 써늘하게 토해내는 예수의 대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기존의 통념과 질서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에 의존하여 살기보다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와 행동,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자리한다는 예수의 설명을 우리는 이 대답을 통해 읽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의 의도는 세 번째의 경우로 곧바로 연결됩니다. 이번에는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여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먼저 제가 제 집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의 의지는 초지일관 오직 하나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성격은 기존 질서와 관습과는 철저히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 의존해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질 수 없으며, 그것을 끊어버리는 결심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요원하다는 것을 예수의 대답은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늘어지는 낭만주의의 달콤한 꿈속에 있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예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은 내 일신상의 즐거움과 기쁨만을 동반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신앙을 갖게 됨으로 마음에 지극한 평온을 얻을 수 있었노라”고.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가 내 안에 있어 나는 어두운 밤길에서도, 지독한 풍랑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혹은 이렇게 고백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그 일 때문에 나는 실패하던 인생이 반전하여 성공과 영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그리고 때론 이런 소리도 들려올 겁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내 삶이 얼마나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는지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다.”라는...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소식과 소리는 먼 나라 얘기만이 아닌 바로 가까운 우리 이웃들로부터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입을 모아 노래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배워 바른 길가니 우리의 삶과 생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같은 신앙인의 즐거운 삶을 따라가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입으로는 쉬지 않고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조아리며, 아울러 그 때문에 촉발된 평온과 기쁨, 즐거움, 행복이 언제나 우리 안에 가득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고백컨대, 저는 예수로 인하여 제 마음이 즐겁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만남으로 저는 이전에 없었던 고민과 번민, 그리고 혼란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예수란 분을 내 삶의 근저에 초대함으로 저는 설명할 수 없는 아픔 또한 느껴야만 했습니다. 보다 솔직히 터놓아보자면, 예수를 알고 난 후, 내 삶에 즐거움보다는 번민과 고민의 나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 때문에 저는 보지 못하던 많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내 한 몸의 안위와 평온, 그리고 다분히 이기적인 가치관 속에 아늑한 일상을 보내던 내게 예수란 인물은 잊혔던 많은 이웃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이전에 내가 보지 못했던 수많은 이웃이 나의 무관심 속에 그들 역시 나처럼 느끼고 누려야 할 삶의 안위와 평온을 갖지 못했음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무너지며 요동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내 어미며, 형제요, 자매인가?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이 나의 가족”이라고 일갈하신 예수의 의도가 제 가슴에 박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란 분은 내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전에는 뜻하지 않게 생기게 된 선물에 큰 즐거움으로 펑펑 나름대로 기분을 내며 한턱 쏘기도 했지만, 이제 내 손에 들린 선물을 보며 나보다 이것이 더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살피게 되었고, 또 그들이 어디 숨어 이 같은 선물이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두리번거리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맛있는 식사를 앞에 두고, 아직 한 끼를 누리지 못해 배곯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자매와 형제의 모습을 기억해내곤 눈물을 뿌려야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때론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읊조리던 복음송 속에 실감나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고 섬뜩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때론 저도 아무 반성 없이 예수를 닮기 원한다고 노래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닮을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목도한 다음, 난 그 노래의 무서운 의미를 온 몸 깊숙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닮기 원한다고 반복적으로 노래하던 그분 예수는, 이 천년 전에 갓 서른을 넘은 나이에 포근한 가정하나 제대로 꾸며보지도 못하고, 단지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고, 또 그에 응당 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가장 흉측한 극형 중 하나인 십자가에 달려 명을 달리했습니다. 나무 위에 달려 신음을 토해내는 그분의 모습을 읽게 된 순간, 난 내가 닮아야 할 그분의 고통에 놀라 멀리 뒷걸음질 쳐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십자형 틀 위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받아야 했던 고통과 아픔, 그리고 슬픔을 목격했을 때. 난 신앙이 전혀 낭만이 아니며, 또 한순간의 꿈도 아닌 절절한 현실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느껴야 했던 그 섬뜩함! 그 후 전 예수를 닮겠다는 노래를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결정되어야 할 많은 것이 있어야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는 신앙이 감성의 영역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신앙이라는 것 역시, 내가 신앙적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것 역시 역사적 결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백하건대, 저는 예수란 분을 만남으로 더 큰 번민과 고민, 그리고 아픔과 갈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 들어 내 신앙의 그림자에 묻어있는 의미를 읽어보노라면, 그렇게 예수 때문에 받아야 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번민, 고통 갈등... 그 모든 것이 꼭 아픔, 슬픔, 번민, 고통, 갈등만은 아닌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예수 때문에 받아들인 아픔, 슬픔, 번민, 고통, 갈등이 나를 더 키우고, 나를 더 즐겁고, 나를 더 평화롭게 하고, 나를 더 즐겁게 하고,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예수 때문에 촉발된 갈등과 격정은 숨죽이지 않고 있지만, 꼭 그 아픔이 아픔만은 아니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지금의 저는 또다시 고백합니다. 예수란 분으로 인해 제게 찾아온 것은 참으로 섬뜩한 고민이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예수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이며, 따라서 나무 위에 달리기까지 우리에게 전하고자 애썼던 하나님의 나라 역시 현실이며 역사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의 의미가 자리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그의 고민과 고통, 슬픔과 아픔이 내 것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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