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8)


선입견 하나를 송구함으로 버리다


벅차게 수피령을 오를 때에 비하면 내리막길은 편하고 쉬웠다. 경사가 그랬고, 바람이 그랬다. 걸음을 옮기며 따로 힘을 주지 않아도 걸음은 절로 옮겨졌다. 땀 흘린 뒤에 맞는 바람은 여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원했고 고마웠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걸어가고 있을 때 저만치 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수현공원>이었다. 인적도 없는 이 한적한 곳에 웬 공원, 생뚱맞고 어색하게 여겨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같은 이름을 가진 한 탤런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워낙 드라마와는 담을 쌓고 살지만 그래도 같은 이름을 가진 한 탤런트의 얼굴이 생각났다.


지자체마다 수익이 되는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이다보니 빚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가 그 탤런트가 태어난 곳이고, 아무리 그가 유명하다고 해도 이런 외진 곳에 공원까지 세우는 것은 지나친 발상이다 싶었다.


공원 앞을 지나칠 때 잠깐 걸음을 멈추고 공원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잠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탤런트의 얼굴이 아니라 충혼비였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원으로 걸음을 옮겨 충혼비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김수현 병장 충혼비. 외진 곳에 <수현공원>이 마련된 이유를 대번 알 수가 있었다.


<수현공원>의 주인공이자 충혼비의 주인공인 김수현 병장은 1964년 11월14일 수피골 일대 대침투작전 때 숨은 적을 추격해 1명을 사살한 후, 또 다른 1명과 전투 중 복부 관통상을 입었으나 사력을 다해 적에게 관통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남파된 북한 공작원들은 최정예 군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교전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다. <수현공원>에는 추모비를 중심으로 북한군의 침투로, 은거했던 바위, 전투호, 교전 중 발생한 피탄 흔적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적의 침투로. 글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글씨 옆으로 한 병사의 모습이 보였다.


흰색으로 표시된 작은 원들이 그려져 있는 커다란 바위가 김수현 병장과 교전하던 북한 병사가 몸을 숨기던 곳이었다. 바위에 표시된 흰색 원은 교전 중에 생긴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잠깐 <수현공원> 일대를 둘러볼 때 마음이 숙연해졌다. 1964년이라면 내 나이 겨우 5살, 내가 알지도 못할 때에 누군가는 나라를 지키다가 한창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었다. 서로 교전을 벌였던 북한 병사도 비슷한 나이 아니었을까? 그 또한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넘어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목숨을 잃었다.


서로를 향해 총을 난사했을 당시, 얼마나 두려웠을까.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생각해 보면 모두가 젊은이들, 남과 북 사는 곳은 달랐지만 모두가 이 땅의 젊은이들이었다. 분단 상황만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같은 나라 같은 젊은이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이들이었다. 어쩌면 같은 학교에서 만나 공부를 했을 수도 있고, 혹 잘하는 운동이 있었다면 같은 팀에서 운동선수로 땀을 흘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공부를 마치고는 같은 회사나 공장에 다니는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를 이들이었다.


분단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프게 전해져 왔다. 공원을 빠져나오며 처음 섰던 충혼비를 찾아가 그 앞에 다시 섰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자 나도 모르게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극도의 긴장 속에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댈 때, 얼마나 떨리며 두려웠을까?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까지를 떨리게 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 이 땅에 없기를,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추모했다.


다시 걷는 길, <수현공원> 표지판을 보며 가졌던 선입견을 미안한 마음으로 버린다. 돌아보면 우리는 별 것 아닌 것에 별별 선입견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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