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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주름들 한희철의 얘기마을(91) 깊은 주름들 “아무데구 자리 좀 알아봐 조유. 당체 농산 못 짓겠어유. 남의 땅 부쳐봐야 빚만 느니.” 해 어스름, 집으로 돌아가던 작실 아저씨 한 분이 교회 마당으로 올라와 ‘취직’ 부탁을 한다. 올해 58세.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라도 좋으니 아무 자리나 알아봐 달란다. 힘껏 빨아 무는 담배 불빛에어둠 속 각인되듯 드러나는 깊은 주름들. - (1991년) 2020. 9. 22.
한참을 발 못 떼는 한희철의 얘기마을(90) 한참을 발 못 떼는 “작년에는 수해 당했다구, 얘들 학비도 줄여주구 하더니, 올핸 그런 것두 없네유. 여기저기 당해선가 봐유.” “하기사 집까지 떠내려 보내구 이적지 천막에서 사는 이도 있으니, 그런데 비한다면 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망하니까 사실 힘이 하나도 읍네유.” “강가 1500평 밭에 무수(무)와 당근이 파란 게 여간 잘된 게 아니었어유. 그런데 하나도 남은 게 없으니. 지금 봐선 내년에도 못해먹을 거 같아유.” 집에 다녀가는 출가한 딸과 손주를 배웅하러 정류장에 나온 한 아주머니가 물난리 뒷소식을 묻자 장탄식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입술이 부르텄다. 가끔씩이라도 고향을 찾는 자식들.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양식이나 마련하.. 2020. 9. 21.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신동숙의 글밭(237)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나무골이 진 마루바닥으로 아침해가 빛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아침, 이렇게 가을이 옵니다. 해의 고도가 낮아져 집안으로 깊숙히 들어오는 만큼 이제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눅눅하던 가슴으로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토요일 아침엔, 숲이 있는 한적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머물러, 그동안 안으로 여몄던 가슴을 활짝 펼쳐 널어놓고 싶은 그런 날씨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는 헤아림으로 잠시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지난 초여름 밀양 표충사 작은 암자 뒷마당에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계곡물에 산딸기를 헹구어 먹던 날, 친정 엄마하고 약속했던, 가을이 오면 해인사에 함께 가기로 한 일.. 2020. 9. 21.
가을비와 풀벌레 신동숙의 글밭(236) 가을비와 풀벌레 한밤에 내려앉는 가을 빗소리가 봄비를 닮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이면빗소리에 머물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곤 하였습니다 순하디 순한 빗소리에 느슨해진 가슴으로 반짝 풀벌레밤동무가 궁금해집니다 맨발로 풀숲을 헤치며숨은 풀벌레를 찾으려는 아이처럼 숨죽여 빗소리를 헤치며풀벌레 소리를 찾아 잠잠히밤하늘에 귀를 대어봅니다 가전 기기음인지 풀벌레음인지 마음이 문전에서 키질을 하다가자연의 소리만 남겨 맞아들입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빗소리도 발걸음을 늦추어 더 낮아지고 풀벌레 소리는 떠올라가을밤을 울리는 두 줄의 현이 되었습니다 가을비와 풀벌레는한 음에 떠는 봄비와 꽃잎의 낮은 음으로 2020. 9. 20.
나중 된 믿음이 한희철의 얘기마을(89) 나중 된 믿음이 수요 저녁예배 후, 캄캄한 작실까지 올라가야 하는 할머니가 안쓰럽습니다. 작실에서 아무도 안 내려와 혼자 가시게 된 것입니다. “어떡하죠?” 걱정스럽게 말하자 “괜찮아유. 성경책 꼭 끌어안구 가면 맘이 환한 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유.” 나중 된 믿음이 먼저 된 믿음을 밝힙니다. - (1991년) 2020. 9. 20.
껍질을 벗는다는 것 껍질을 벗는다는 것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이름을 높여 기립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코로나 블루니 코로나 레드니 하는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찾아오는 영혼의 질병인 우울증과 짜증과 분노가 심각합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교도 자꾸 미뤄지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참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10살, 8살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가 일어나 다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어떤 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습니다. 환각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이도 있고, 만취상태.. 2020. 9. 19.
붙잡힘 한희철의 얘기마을(88) 붙잡힘 체념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뿐인지도 모른다고,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던 한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불쑥 내뱉은 말을 다시 수긍하게 되는 건 쌓인 생각 때문이었을까.답답하구, 괴롭구, 끝내 송구스러워지는 삶,이렇게 가는 젊음의 한 시절.무엇일까, 이 붙잡힘이란. - (1991년) 2020. 9. 19.
혼자만의 저녁 한희철의 얘기마을(87) 혼자만의 저녁 동네서 가장 먼 집 출장소를 지나 외따로 떨어진끝정자 맨 끝집, 완태네 집저녁녘 완태가 나와 우두커니 턱 괴고 앉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꿈을 그리는 것일까.모두 떠나간 형들을 생각할까. 언제 보아도 꾸벅 인사 잘하는 6학년 완태.흐르는 강물 따라 땅거미 밀려드는완태가 맞는 혼자만의 저녁. - (1991년) 2020. 9. 17.
제풀에 쓰러지는 한희철의 얘기마을(86) 제풀에 쓰러지는 아침 잠결에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밤새 내린 비, 뜨끔했다.설마 예배당, 아니면 놀이방, 그것도 아니면 화장실, 놀라 달려 나갔을 때 무너져 내린 것은 교회 앞 김 집사님네 담배건조실이었다. 지난번 여름 장마에 한쪽 벽이 헐리고 몇 군데 굵은 금이 갔던 담배창고가 드디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제법 높다란 높이, 길 쪽으로 쓰러져도 집 쪽으로 쓰러져도 걱정이었는데 사방에서 힘을 모아 주저앉힌 듯 마당 쪽으로 무너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문 벽을 쳐서 헛간 한쪽이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동네 남자들이 모여 주저앉은 헛간을 일으켜 세웠다. 몇 곳 버팀목을 괴고 못질을 했다. 담배 창고로 끌어간, 흙더미 속에 묻힌 .. 2020.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