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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물 없이 길을 간다는 것

by 다니엘심 2017. 9. 18.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2)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


단순한 실수가 중요한 실수가 될 때가 있다. 가볍고 단순하다 싶어도 실수의 결과가 치명적인 것들이 있다. 그 날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화천에서의 숙소는 생각지 못한 곳으로 정해졌다. 화천읍내에 도착을 해서 보니 거리마다 군인들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군인들끼리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면회를 온 애인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들이 흔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무슨 큰 훈련을 마친 뒤여서 그렇게 많은 군인들이 한꺼번에 외박을 나온 것이라 했다. 


거리만이 아니었다. 후배 목사를 만나기 위해 잠깐 찻집에 들렀을 때, 찻집 안을 가득 채운 것도 군인들이었다. 애인과 마주앉아, 아니면 옆자리에 앉아 마음에만 두었던 이야기와 쟁여둔 그리움을 풀어내는 모습들이 정겨워 보였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면회를 온 여자 친구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보다는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모습이 더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졌다. 어디에 앉느냐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게 하는구나!


화천에는 그냥 지나가면 서운해 할 이들이 몇 명 있지만,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었다. 주일을 앞둔 토요일이어서 행여 그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를 따로 만나는 것은 조심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많은 군인들로 화천 인근의 숙박업소가 이미 꽉 찼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길가 철물점 주인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대답을 했다. 그런 일을 자주 경험을 하는 것인지, 화천읍내 인근의 숙소가 다 찼다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투였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새삼스러웠다.


할 수 없이 후배 이 목사에게 전화를 했고, 얼마 후 이 목사를 찻집에서 만났다. 이 목사는 내 전화를 받고는 교우가 하는 숙소에 연락을 했고, 마침 빈 방이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두 가지 점에서 다행이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숙소가 정해져서 다행이었다. 없는 숙소를 찾으려면 그 또한 많은 시간과 신경을 써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우가 하는 숙소가 다음날 가야 할 길 쪽에 있다는 점이었다. 지치고 피곤했기 때문일까, 걸어가야 할 길을 차로 대신할 마음은 없었지만 막상 숙소가 그렇게 정해지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제법 터가 넓은 <시아네 펜션>은 깨끗했고 조용했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도 누렸다. 무엇보다도 숙소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도 많이 볼 수 있다는 말이 반가웠다. 
<시아>는 손녀 이름이라 했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이 그 하나만으로도 물씬 느껴진다. <시아네>는 <詩안에>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의 도움으로 하룻밤을 묵었던 시아네 펜션.
집 앞 개울에 다슬기가 많고 덕분에 반딧불이가 많다는 말이 반가웠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길을 떠나며 물을 챙기지 못했다. 물을 챙기지 못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길을 가다가 가게를 만나면 물을 사야지 했던 것이었다. 늘 그렇게 다녔으니 그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문제였다.


가도 가도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외지고 한적한 길, 가게가 나타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이 없다는 것을 알자 괜히 목이 더 마른 것 같았다. 한 번 목이 마르다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자꾸 침을 삼키게 되었고,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다.

 

길을 걷다가 만난 버스 정류장.
버스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버스 정류장은 혼자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목마름이 엄살만은 아닌 것이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된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금방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가게는 아니더라도 동네가 나타나면 물을 얻어 마셔야지 했지만 동네도 보이질 않았고, 모처럼 만난 동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누구 한 사람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집이나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물을 달라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도 그렇지만, 목마름을 참으며 길을 걷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 단순한 일, 왜 물을 챙기지 못했을까?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을 했을까?


먼 길을 걸어 지칠 대로 지쳤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 없이 먼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도 위험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겨야 했던 날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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