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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

잘못된 삭개오의 계산

by 한종호 2018. 2. 28.

 잘못된 삭개오의 계산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 19:1-10)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삭개오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의 첫발을 디딜 때 한 번쯤은 꼭 들어보는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입니다. 때로는 노래의 주인공으로, 때로는 예화의 단골손님으로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흔히 듣고 또 알고 있는 이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오직 한군데, 즉 오늘 본문으로 잡은 누가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예수의 행적을 적은 4복음서의 많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고 반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주인공 삭개오는 아주 적은 부분에만 기록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 아마도 키가 작고 세리라고 하는 그의 삶이 극적이고, 또 예화로 들기에도 좋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오늘 우리의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의 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구세주이신 이상 그 분이 가는 곳마다 구원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변함없이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하여 자신의 구원사업의 성공을 만 천하에 공언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저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 주어진 본문에 의지하여 예수께서 생각하시고 또 선포하신 ‘구원’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9절과 10절에 거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이러한 예수의 증언을 통해 볼 때 분명 삭개오의 구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어떻게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나 인격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 하면서도 그의 행실이나 인격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의 구원은 가식이거나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삭개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고백 직후,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 삭개오의 고백이 그의 구원받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이 고백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 삭개오는 세리였고, 그것도 장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이방인보다도 더 멀리하는 비난대상 1호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지배자 로마에 기대어 동포의 혈세를 뜯어낸 데에도 기인하지만, 그들이 비난을 받는 주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세리들에게는 월급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된 세금을 주민들로부터 거두어들여 그 만큼만 총독부를 통해 로마로 보내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월급이 없던 세리들은 자신들이 거두어들여야 할 세금 그 이상을 추징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천원 낼 사람은 만원을, 천원 낼 사람은 십만원을 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세리들의 수고비로 어느 정도 더 받아내는 것은 수긍이 가긴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항상 필요 이상의 돈을 동포로부터 뜯어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족이면서도 비난과 질시의 대상 1호가 되었고, 로마군인의 도움이 없이는 폭행당할 우려 때문에 거리를 신나게 활보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그러한 세리들 중에서도 장급이며, 또 재산도 많았다 하니 그의 악랄함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삭개오의 모든 재산은 사실 그의 부정행위를 통해 얻어진 것이며, 따라서 모두 토색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공언한 약속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가 자신의 약속을 모두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산보다 4배 이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초등학교 정도의 산수실력이라도 금방 나올 수 있을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공약 이후에 예수는 엄청난 선포를 하십니다.


“드디어 이 집에도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된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그런 공언을 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오늘 우리는 찾아내야만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누가는 19장의 서두에 삭개오라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의 이야기를 통해보건대, 그는 부자이고 세리장이었으며 또 키가 유난히 작은 사람입니다. 누가의 이런 묘사를 통해 우리는 삭개오가 당시 유대인들 공동체에서는 철저히 소외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신체적 특징은 어릴 적부터 그로 하여금 심한 조롱을 당하게끔 하는 큰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체의 이상을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으로 인하여 삭개오의 유소년 시절은 ‘어두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동족에 대한 증오감이 점점 깊어져 가장 악랄한 세리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을 키워갔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돈에 대한 애착이 커갔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혈통을 이어받은 삭개오는 불행하게도 ‘하나님 없는 삶’에 더 익숙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음’을 실감해 가며 또 묵인해 갔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의 눈길 속에서 점점 삭개오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끼워주지 않는, 그야말로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를 우리는 이 누가복음의 행간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소문이 유대 땅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창녀와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까지 친구라 칭하며,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병든 자들 고쳐주며, 전하는 말씀도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은 자신과도 같은 세리출신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을 접한 후 삭개오는 이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됩니다.


‘세리를 제자로!? 남들은 그렇게 비난하며 틈만 나면 잡아먹을 기세를 하고 있는 세리마저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고?’


삭개오는 계속 흥분합니다. 그 동안 동족에게 놀림을 당하고 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동족을 괴롭히며 받아야했던 자신만의 고민을 기억하며 그는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 수 없는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데 나를 이처럼 동요케 하는가?’


삭개오에게 있어서 예수란 존재는 ‘잊혔던 모든 것’을 회상하게끔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지금껏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삭개오의 심장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까마득히 잊혔던 사랑이니, 가족, 친구, 이웃, 정,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삼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런 고민의 연속 중에 그는 예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기 위해 삭개오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당시 돈 많은 세리장이 군중들 사이에 낀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죽음을 각오한 결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삭개오는 그의 신체적 특징으로 인하여 쉽게 사람들 눈에 뜨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수일 밤을 고민하다 결심합니다.


“그래도 난 예수를 만나야겠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키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이웃들의 놀림의 대상이었던 이놈의 작은 키가 다시금 예수로 가는 자신의 발걸음을 무겁게 합니다. 건장한 장년들 틈바구니 속에서 삭개오는 더 이상 예수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삭개오는 군중의 동요를 금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질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질시, 조롱 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롱이 이내 성난 군중들의 폭력으로 자신을 위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도 이번은 거의 마지막입니다. 정말 예수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세리마저 제자로 삼은 사람인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염치며 체면, 비난, 질시, 조롱 그리고 생명의 위험마저 모두 팽개치며 생애 최고의 도박을 감행합니다.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옆에 있던 뽕나무를 탑니다.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타자 동시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웅성거립니다.


“아니 저거 삭개오 아냐? 저 도적놈이 여기는 왜 나타나 가지고 기웃거리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세금이라도 거두려고 그러나? 아니 그런데 왜 나무는 타고 난리야…”


삭개오의 나무 타기는 뒤통수를 치는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과 더불어 이루어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간이라, 자신들과 같은 동포라, 친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도…


단지 그는 눈으로 예수의 모습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죄인의 친구로 불리는지, 단지 그것만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 후에 그가 받게 될 질책이나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을 끊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그의 삶에 이번이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가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 씨, 어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루 묶고 싶군요.”


차분한 예수의 한마디가 삭개오를 비롯한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의 말씀을 접한 삭개오의 심장은 정신없이 뛰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을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공포합니다.


“이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 동안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겠다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결심합니다. 바로 삭개오의 그 결심 안에 이미 구원의 싹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잃어버린 이웃을 돌려줍니다.


예수는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사실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오로지 그에게는 맘몬, 즉 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선포하십니다.


“삭개오 당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잃어버린 친구와 이웃을 회복하십시오. 여기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사람들 즉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여전히 혼자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는 그의 가족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이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삭개오로 하여금 잘못된 계산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의 잘, 잘못은 뒤로하고, 그의 고백이 말해주는 바는 곧 그가 잃어버렸던 가족을 찾았음을 보여줍니다. 돈이라 하는 것도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은 수단이지 가족과 이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가족이, 자신을 버렸던 이웃이 ‘자기에게 와 있음’ 그것뿐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도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계속 곱씹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이 과연 건강한 것인가를… 삭개오에게 “당신 집에 구원이 임했습니다!”라고 선포하신 예수의 의미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일

이웃 없이 살던 사람이 자신의 주변에서 이웃을 발견하는 일

가족 없이 살던 사람이 바로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임을 깨닫는 일


바로 그 속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구원의 모습이 아닙니다. 외롭거나, 외롭다거나 혹은 외로움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는 구원사역과는 너무도 먼 것들입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하나님, 이웃, 그리고 우리의 가족을 되찾으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 ‘하나 됨’, 바로 그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도 잃어버린 자가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로 인하여 혹은 나 때문에 소외받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낙오됨이 없이 우리의 공동체 안에 가족과 같이 지내며 그 안에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자리합니다. 바로 그 안에 우리가 구원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선물’이 함께 합니다.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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