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2015. 1. 20. 10:15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

“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비정규직의 모멸감과 격차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드라마 <미생(未生)>은 끝났지만, 현실의 미생은 여전히 미생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일까? 이 드라마를 패러디한 방송 프로의 이름은 <미생물(微生物)>이었다. 아예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인 이문재의 <어떤 경우>라는 시의 전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마운 시가 있는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는 깨달음은 누가 뭐래도 뜨거운 사랑이다. 그 “나”는 우리 모두다. 이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그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쉽게 보거나 짓밟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모독한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존재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그 존재감을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장일순 선생이 살아생전에 쌀 한 톨 앞에 담긴 무게를 일깨웠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도 웅장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가수 홍순관이 지은 “쌀 한 톨의 무게”는 그런 눈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그런데 쌀 한 톨과 사람을 같은 저울추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무게는 아무래도 다를 듯하다. 담겨진 우주가 각기 다르기 때문일까? 하나는 태양계이고 다른 하나는 은하계? 물론 그건 아니다. 사람은 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스며들도록 햇살과 별빛 못지않게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은 우주창조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거듭 매 순간 창조되는 우주의 한 “주역”인 셈이다. 그 쌀 한 톨이 이 주역을 길러내는 힘이 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바이나, 사람의 노고는 쌀 한 톨의 터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주역에게 주어졌던 본래의 기능을 오늘날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이야기》를 쓴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렇게 그 상실을 짚어낸다.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자연세계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산이나 계곡, 강이나 바다, 태양, 달, 별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환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우리의 옛 시조는, 태양과 비조(飛鳥)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을은 또 어떤가?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시인 나태주의 <노을>이란 시다. 석양의 붉은 빛 속에서, 하루를 마치고 이리 저리 상처받아 고단해진 인간사를 본다. 저물어가는 노을에서 여유로운 낭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우리의 삶에서 어느 새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토마스 베리 신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지구를 산업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이로운 세계, 그것을 향한 진보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를 가능케 했던 진화과정을 파괴시킨다.”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 결과다. 이런 현실에서 자연이 피 흘리는 소리와 인간이 치러내는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체감, 인간과 우주와의 일체감은 인간이 인간되는 근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이 매일 호흡하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질료는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 되기 마련이다. 이기심, 지배욕, 오만, 거짓 등은 모두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끝내는 자신을 실종시킨다.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을 유린하면서 행복해지겠다는 생각과 행위는 마침내는 인간 자신을 향한 공격이 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인간은 풀잎 하나, 나비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하지만 그걸 지켜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게 달려 있다. 그건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우주 전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마음에서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어져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생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있다는 걸 느끼는 기쁨이다. 사랑의 핵심이다. 단절은 이 기쁨을 봉쇄해버리는 폭력이다.

미생의 삶을 보다 낫게 바꾸게 하려는 노력들은 현실에서 진압되기 일쑤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다룬 영화 <카트>도 그런 진압의 현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누군가에게는 우주의 무게로 존재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고립 당한다. 서로 간에 뜨겁게 이어지는 감격이 이렇게 해서 조롱당하고 능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어짐의 관계를 복원할 때 비로소 미생에게 완생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만나고 느끼고 공감하고 끄덕이며 손을 잡고 함께 나가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로써 우주의 기운이 그런 우리에게 벅차게 스며들 것이다. 폐허가 되살아난다.

어떤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다. 이 믿음에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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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치다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1)

 

경을 치다

 


경을 친다는 말은 종을 치듯 정신이 깨지도록 혼쭐을 낸다는 의미가 담긴 상징적 언술로 들리지만 실제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형(黥刑)은 죄인의 이마나 얼굴에 먹줄로 글씨를 새겨 넣는 형벌이다. 종이 위에 매난국죽을 치듯 얼굴에 먹물을 들이기 때문에 친다고 쓴다. 문신을 새겨 죄인 됨을 공개하는 것은 머리를 베거나 목을 매달거나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형벌 보다는 가벼울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경형이란 경을 친 다음 그 때부터 형벌의 목적이 발효되는 진정한 상징적 언술이 된다. 이마에 각인된 주홍(검은)글씨는 죄인의 일생을 두고 경을 친 의미를 확인시켜줄 것이다.

 

나는 왜 이 시점에 꼭 경을 칠 놈이 아니라 경을 칠 년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모름지기 역사상 경을 쳤대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많이 쳤을 것 같다. 그러나 귀에 익숙해 자연스러운 것은 경을 칠 년이다. 사극을 보면 상투머리를 산지사방 흩뜨러뜨리고 함거에 실려 귀양 가는 양반님네를 자주 본다. 혹 몇 년 유배 살다 정계에 복귀하는 운 좋은 역적도 있겠지만 한번 컨베어벨트에서 밀려나면 세상이 다 그를 적대하기 예나 지금이나 같다. 당사자는 물론 그의 일가 전체가 경을 친다. 어제까진 귀족마님으로 양가집 규수로 부잣집 도련님으로 뭇사람의 대접을 받으며 고상하고 고결하고 품위 있고 세련되고 도도하고 오만하고 안하무인으로 굴었어도 다 용납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부턴 관청의 노비나 공신댁 종으로 근본부터 자기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싫다면 산간에 도망쳐 화전민이 되거나 산악으로 도주해 군도(群盜)’에 가담하거나 다리 밑으로 도망쳐 각설이패가 되는 수밖엔 없다. 태생적 고결한 양반으로 금지옥엽 세상이 다 그런 줄 알고 살아온 처지가 당할 삶의 비참과 난센스와 아이러니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바로 경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경을 쳐도 가장 경 침을 받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아닐까. 내 귀에 경을 칠 년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런 이유. 또 그런 이유로 특히 미성숙한 어린여자들을 경책할 때 니가 경을 친다는 게 어떤 것인 줄 알어?’ 하는 가학과 피학의 기나긴 세월 무시무시한 공포가 욕설이 되어 나온 게 아닐까. 솔직히 나는 세상이 무섭다. 딸만 셋 가진 아비로서 나뿐 아니라 내 딸들이 살아갈 세상의 두려움까지 합쳐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딸들을 위해 내가 이 세상과 싸워 능진히 이겨줄 자신 없음이기도 하다

 

 

(출처: https://flic.kr/p/nn8FsV)

 

그런데 이 경을 칠 년이라는 욕설엔 아직은 유예의 시간이 남아있다. 이 욕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아직 경을 치진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권력자의 따님으로 귀족마님으로 재벌기업의 부사장으로 뭇 미생(未生)’들 위에 꼬마 대장동지 김정은처럼 방정을 떨고 군림하며 고상하고 고결하고 품위 있고 세련되고 도도하고 오만하고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다 용납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일이 잘 되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수 있는 하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만 사유와 사고의 틀이 태생적 한계이자 행운으로 주어진 사람들이 있음도 본다. 그런데 말이다. 그래서 경을 친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경이 어떤 경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경을 치진 않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진짜로 경을 치게 된다. 적어도 나의 신학과 믿음에 따른다면 이 세상에선 경을 칠 일 따위 전혀 없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직접 경을 치신다. 하늘이 사람에게 경을 치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높은 마음. 하느님은 다 봐줘도 아니꼽다 못해 가증스러운 사람은 끝내 못 봐준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태생적으로 아니꼽고 가증스럽게 높아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이루면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런 듯 군다. 경을 칠 놈이든 년이든 하늘이 치는 경이 조속히 쳐지질 않아 그것을 담대함으로 여기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작금 한 여자가 경을 칠년이라 전 국민의 욕을 먹는 이유를 그녀는 억울해 할 필요가 없겠다. 그녀는 모름지기 모든 경을 칠 연놈의 대표가 아닌가. 아직 앞길 창창 계속해 누군가 미생(未生)위에 군림하실 분이고 보면 부디 이제라도 자기를 쪼금이라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진짜 경을 치기 전 이마에 먹을 먹이듯 따끔하게 경을 쳐보는 것 그에 비하면 나쁜 일도 아니다.

 

해마다 1231일이면 서울시장과 및 유수한 인사들이 참여하는 종로 광화문앞 보신각 타종행사를 한다. 제야의 종이라 33번을 울린다. 유감스러운 것은 길게 울리는 서른 세 번의 청승맞은 종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역사의 한 구비를 넘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만 한 해 동안 외쳐댔던 고통도 억울함도 정의도 그 모든 군중의 함성을 쇠투구 철항아리처럼 찍어 누르고 있는 요지부동도 체념 가운데 넘어가 버리는 듯하다. 김수영(金洙暎, 1921~1968)<거대한 뿌리>에서 1893년 영국왕립지학협회회원(英國王立地學協會會員)으로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Lucy Bird, 1831~1904)의 여행기를 인용하여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世界)/ 화하는 극적(劇的)인 서울을 상기시킨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조선의 누추한 기록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보잘 것 없는 일상(日常)들의 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전통(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追憶)

있는 한 인간(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거대한 뿌리> 부분, 1964)

 

이 시대의 경은 누구를 위하여 치는가. 역사는 도무지 패배할 줄 모른다. 들리지 않는 가운데서 놋주발보다 쨍쨍 울리는 우리들의 역사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온통 가학과 피학의 역순환과 악순환 속에서도 지혜여 속속히 오시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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