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의 '우화의 강'에 붙여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 1. 16. 00:45

한종호의 너른 마당(5)

마종기의 '우화의 강'에 붙여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 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우화의 강>

 

 

오늘, 우리는 깊은 인연, 오래가는 우정

그리고 늘 서로를 일깨우는 그런 벗들에 대한 소중함을

얼마나 절감하면서 살아갈까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여겼던 마음들은

어느새 퇴색해 버린 지 한참인 것 같습니다.

그와는 달리, 아무리 정겹게 얽혔어도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갑자기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양은 논리가 통하면 그것으로 일을 꾸며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지...

또한 그것은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말 잘하는 자도 거짓도 진실로 둔갑시키고 진실도 거짓으로 몰아갑니다.


우리네 본래 정서는 마음이 통하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일단 마음이 서로 통하면 논리를 뛰어 넘을 줄 압니다.

그건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마음에 내켜야 하고 마음도 “먹습니다.”

먹는 것은 곧 몸이 됩니다.

그 마음이 내 오장육부에 파고 들어 내 몸이 되면

행동은 그대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시인 마종기는 그런 우리네 정서의 정곡을 드러내 보입니다.

벗이 되면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트인다는 것입니다.

그건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 물살이 때로 느리고 때로 빠르고 하는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은 이 쪽 끝과 저 쪽 끝이 하나가 되어 있는 물결입니다.

마음의 강이 흐르는 곳에 생명이 태어나고

우정의 숲이 우거지며 삶의 기쁨은 시들지 않습니다.

 
그 강이 적시는 땅은 옥토가 되어 갑니다.

맑고 깨끗한 강이 흐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우린 상대의 마음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따뜻하게 감지할 수 있겠지요.


서울에 다시 청계천이 흐르고 사람들은 그곳을 즐겨 찾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지,

어떤 물길이 트이고 있는지는 돌아보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홀로 이 막연한 세상을 살아가며 외로울 때,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때로 힘겨워 하소연 할 때가 없어도

그를 떠올리면 다시 마음에 평안이 오는

그런 인연, 그런 우정,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

다만 아득히 먼 옛날의 우화로 남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로 남기를 빕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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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 ‘땅콩 회항’ 조현아와 박근혜 대통령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5. 1. 9. 13:49

한종호의 너른 마당(3)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 ‘땅콩 회항조현아와 박근혜 대통령 -

 

 

힘을 가지면 그 힘을 쓰고 싶게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힘의 가치는 달라진다. 생살여탈권을 가진 권력자가 사형수를 살려준다면 그것은 생명을 향한 권력이 된다. 링컨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잔인한 권력이 된다. 이런 예는 들지 않아도 너무나 많다.

 

권력의 오만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따라 살게 되는 사람과 죽게 되는 사람의 수는 많아진다. 최근 박근혜 정권 내부의 권력 암투나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된 조현아의 기내 난동사건은 모두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압살한 장본인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던 인물이니만큼 그 권력의 물리력은 대단히 강도가 높았다. 박정희의 부당한 정치에 맞서는 일은 그래서 목숨을 거는 일이 되었다. 인간의 목숨을 쉽게 짓밟고 죽이는 권력이었으니, 얼마나 살벌한 대통령이었는지는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을 모두 하루아침에 사형장으로 보내 죽인 권력자였으니, 그의 권력은 무소불위하게 보였다.

 

 

(출처: InSapphoWeTrust (https://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그러나 바로 그 무소불위한 권력이기에 박정희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힘이 강하면 세상에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여긴 그였기에 만사에 무리를 했고, 그 무리가 하나하나 쌓여 결국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된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만하고 잔혹한 권력자일수록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거꾸로 함정이 되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를 치른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건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차지하려던 자들의 잔혹함과 죄를 보여준다(마태복음 21).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자기의 힘을 과시한 일들이 자신들의 죄의 증거가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들까지 죽이면 모두가 벌벌 떨고 무서워 꼼짝 못할 줄 알았지만, 결국 주인은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포도원을 경작할 농부들을 교체해버리고 만다. 역사의 주도권은 이렇게 바뀌어 왔다.

 

사유화 된 권력의 최후

 

그 아버지에 그 딸인가? 대통령 박근혜의 권력 운용방식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방식을 보이고 있다. 권력자에게 비선(秘線)조직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 비선조직이 공조직을 대신해서 전횡하기 시작하면, 사태는 겉잡지 못하게 된다. 공조직은 무력해지고 좌절하게 된다. 국가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공조직이 무력해지면 그 여파는 모든 국민들의 삶에 미친다. 그러기에 공조직을 장악해버리는 권력자의 비선조직은 단지 권력자의 조직을 넘어, 국민적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게 해서 불거지고 있는 일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에게, 이 정부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다. 대통령은 공적 판단과 결정을 이들 비선조직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사까지 그런 식으로 하고 있으니 공적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대통령 자신이 된다. 이건 공적 최고 책임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의식 자체가 없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골탕을 먹는 것은 국민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공화국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정부의 권력은 철저하게 국민들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

 

현실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권력의 사유화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시스템은 사라지고, 대통령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그 어떤 시스템의 검토나 교정과정은 이렇게 해서 삭제 당한다. 이는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 대통령과 사적 관계의 밀도가 높은 인물들이 국가권력을 자기 것처럼 여긴다면, 국민들의 삶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농락당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권력의 사유화는 이렇게 해서 정치를 말아먹는다.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를 망각해버린 자들이 흔히 하는 짓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 왕이 된 사울도 권력을 자기 것으로 여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선지자 사무엘의 경고가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나라와 그 자신 모두를 구렁텅이로 밀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땅콩 회항과 조현아의 좌절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나라 안팎을 시끄럽게 한 대한항공의 전 부사장 조현아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한항공은 사기업이기는 하지만, 그 성장과정은 국민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항공기 운행은 승객 모두의 안전과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임원 누군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좌우할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애초에 우리는 사태를 조현아의 이른바 갑질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단순한 갑질이 아니라 거의 난동 수준의 패악질이었다. 비행기나 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승객 모두의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이 되어 즉각 체포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그 모든 것의 주인인양 굴었고, 승무원과 사무장을 자기 하인정도로 여기고 모욕주고 짓밟았으니 이는 국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본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한항공 사주의 딸이자 대한항공 임원이라는 점에서 권력 휘두르는 것만 알았지, 항공기와 승객 안전을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만 온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당연히 그녀는 사법처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대한항공은 국민 앞에서 사죄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힘을 가지고 있다고 힘없는 이들을 그토록 함부로 짓밟고,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거짓말까지 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 조현아 자신에게 돌아갔고, 그녀는 지금 그녀의 40년 생애에서 가장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현아 사건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힘 가진 자들에게 중대한 경고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미생>으로 해서, 힘없는 이들의 분노가 확산되고 공유되고 있는 마당에 그런 사회심리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조현아 자신이다. 그런데 언제나 자기가 갑이고, 상대는 을인 줄로 알았다가 이렇게 상황이 반전되고 보니 얼마나 무서운가? 조현아는 세상에 무서운 것 없이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어떤 일을 겪고 있는가? 국민들의 시선 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되었고, 평생을 통해 이 낙인을 떨어내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아버지에 대한 반란과 함께 권세를 누리려 했지만, 압살롬은 바로 그 머리칼이 나무에 걸리는 바람에 창에 찔려 죽고 만다. 힘으로 여긴 것이 거꾸로 자신을 치는 칼이 되는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 조현아도 그렇게 땅콩 하나로 아랫것들의 기를 잡고 자기가 엄한 주인임을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으나 정작 엄한 주인은 국민이었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혹독하다.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낼 수밖에 없게 된 처지의 그녀는 처음에야 분노하고 잠시 겪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는 자신을 보호해주고 막아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고, 그 짐을 모두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홀로 뉴욕 공항에 내려져 비참한 기분에 좌절했을 승무장의 심정이 무엇이었을지 그제야 알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권력의 묘지

 

그나마 조현아의 경우는 일찍 그 죄가 노출되어 그녀에게 인생전환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더는 오만하게 굴면서 상전노릇 하며 살기는 쉽지 않게 되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상전들의 버릇을 고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을 테니까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 까닭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국민들에게 가한 고통이 무엇이었는지 잠시라도 성찰할 수 있다면, 권력의 사유화는 멀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그 교훈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채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박대통령의 경우는 그 잘못된 생각과 피해가 조현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현아의 경우는 그녀에게 반면교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어떤 전조라는 점을 그녀는 여전히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은 이제 그런 권력의 횡포와 부당한 처사에 대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보수신문들도 핵심지지 세력까지 이탈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지만 우리는 무척 어두운 마음에 짓눌려 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의 단초를 찾을 길이 없는 것 같다. 새 시대를 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횡행하는 거짓과 폭력을 본다. 낡은 시대의 모든 기득권은 여전히 힘쓰고 있고 미래의 희망 대신 두려움이나 불안이 더 크게 자리 잡아 간다.

 

이러한 오늘의 모습에서 우리의 옛이야기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나오는 분칠한 호랑이를 본다. 아무리 두텁게 분칠을 하고 목소리를 바꾸어도 호랑이가 어머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 호랑이는 여전히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과 폭력의 모습이다. 작은 폭력은 쉽게 눈에 띄기에 민감하게 느끼고 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나 국가의 폭력은 너무 크기에 쉽게 알아볼 수도, 단박에 시정할 수도 없다. 헌정사상 초유로 한 정당을 해산시킨 결정이 그렇다. 그러한 폭력은 불의와 거짓과 함께 엉키어 나름대로 체계화, 합리화되어 있다. 그것은 항상 정의와 평화, 진실을 풍선처럼 높이 띄어 놓을 뿐, 현실에 발붙일 틈을 주지 않는다. 폭력의 짝이 거짓과 불의이듯, 그것의 가장 무서운 적은 정의와 평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진실에 대한 믿음을, 거짓과 폭력에 대한 싸움을 멈출 수 없다. 그 길고 지리한 싸움을, 한 에디오피아 옛이야기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진실은 거짓과 싸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진실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돌아 올 것입니다. 진실은 다시 싸워야 합니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한, 진실은 거짓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패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가 교묘한 온갖 형태의 폭력과 거짓으로 분칠한 호랑이인지를 두 눈 부릅 뜨고 지켜 볼 일이다.

 

다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포도원의 주인은 자기 아들을 죽인 농부들을 내어 쫓고 새로운 세력을 내세운다. 역사는 그렇게 바뀐다. 그럴 날이 점점 더 가까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권력의 묘지가 따로 없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 이글은 <복음과 상황> 1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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