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마주보고 가는 바보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2015. 1. 27. 07:48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5)

바람을 마주보고 가는 바보

 

그 양반은 독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잠은 안자고 책만 읽는 바람에 머릿속 골수가 다 말려버려 마침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문제는 책이었다. , 독서도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에 해롭단다. 그걸 염려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 반대로 골수가 넘쳐나서 문제가 되려나? 이에 대한 최근 학계의 결론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아무튼 이 사나이는, 기사 소설을 잔뜩 읽은 탓에 마침내 방랑 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골수가 동이 나도 그런 결심은 가능한 모양이다. 아니 그러 길래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가? 이리하여 라 만차의 어느 시골에 사는 영감 돈 끼호떼의 기이한 유랑 행각이 시작된다.

돈 끼호떼와 산초 (출처: spotter_nl (http://www.flickr.com/photos/30733371@N00))

 

그런데 기사라면 당연히 말을 타고 다녀야 하니, 머리는 부스럼투성이에 비루먹고 마른 말이라도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어느 명마에 뒤지지 않았다. 이 말의 이름을 로신안떼로 지었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로신으로만 하면 농사를 짓던 말이라는 뜻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앞 또는 전()이라는 의미의 안떼를 붙여, 지금 농사짓는 말들보다 훨씬 앞선 최고의 말이라고 내세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와 더불어 착한 남자 산초 빤사가 그의 시종노릇을 하면서 일종의 짝패 영화(buddy movie)”를 내내 찍는다.

돈 끼호떼하면, 풍차와의 대결이 유명한데 사실 이 대목은 소설 전편에 걸쳐 아주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대목은 돈 끼호떼의 면모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들판에 풍차가 나타나자 돈 끼호떼는 거인이라며, “정의의 싸움이야. 저런 악독한 죄의 씨앗을 없애버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네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는 산초에게는, “모험이라는 걸 통 모르는 모양이구먼이라며 풍차로 돌진한다.

당연히 거센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날개의 충격으로 돈 끼호떼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살아있다.

결투라고 하는 것은 세상 어느 일보다 언제나 우여곡절이 더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코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는, “내가 아프다고 끙끙대지 않는 건, 우리 방랑기사는 어떤 상처를 입어도, 설령 배에서 창자가 다 터져 나오더라도 신음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야라고 기사도를 설명한다. 기사는 슬픈 존재다. 신음도 마음대로 못하다니.

돈 끼호떼는 사방을 다니면서 수습이 되지 않을 일만 저지르고 다닌다. 이런 일도 있다. 열두 명의 사나이들이 쇠밧줄로 목이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는데 돈 끼호테는 이들이 죄수라는 호송 군인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시비를 건다.

어떤 이유이건 간에, 이들의 의사와는 달리 억지로 데려가고 있단 말이 아닌가? 기사인 나의 할 일이 생겼네. 억지로 강압된 자들을 풀어주고, 고난에 처한 자들에게 달려가 구해주는 일이니 말일세.”

그렇게 해서 이들 열두 명의 죄수들은 돈 끼호떼의, 난동에 가까운 활약으로 풀려나게 된다.

도대체 이 엉터리 같아 보이는 이야기가 어찌해서 1605년 출간된 이래 고전의 반열에 올라 오늘날까지 경탄과 찬사를 받을까? 그건 무엇보다도 작가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익살과 해학에 찬 이야기 솜씨가 독자들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주인공 돈 끼호떼의 매력이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치광이 같지만 진지한 주제를 다룰 때에는 대단히 점잖고, 사랑하는 여인 둘씨네아에 대한 마음을 끝까지 지킨다. 그는 지식인인 동시에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억울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풍차와의 대결도,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도 피하지 않고 마주쳐 돌진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일까? 돈 끼호떼는 우리에게 그걸 묻는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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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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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

“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비정규직의 모멸감과 격차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드라마 <미생(未生)>은 끝났지만, 현실의 미생은 여전히 미생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일까? 이 드라마를 패러디한 방송 프로의 이름은 <미생물(微生物)>이었다. 아예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인 이문재의 <어떤 경우>라는 시의 전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마운 시가 있는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는 깨달음은 누가 뭐래도 뜨거운 사랑이다. 그 “나”는 우리 모두다. 이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그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쉽게 보거나 짓밟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모독한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존재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그 존재감을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장일순 선생이 살아생전에 쌀 한 톨 앞에 담긴 무게를 일깨웠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도 웅장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가수 홍순관이 지은 “쌀 한 톨의 무게”는 그런 눈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그런데 쌀 한 톨과 사람을 같은 저울추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무게는 아무래도 다를 듯하다. 담겨진 우주가 각기 다르기 때문일까? 하나는 태양계이고 다른 하나는 은하계? 물론 그건 아니다. 사람은 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스며들도록 햇살과 별빛 못지않게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은 우주창조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거듭 매 순간 창조되는 우주의 한 “주역”인 셈이다. 그 쌀 한 톨이 이 주역을 길러내는 힘이 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바이나, 사람의 노고는 쌀 한 톨의 터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주역에게 주어졌던 본래의 기능을 오늘날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이야기》를 쓴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렇게 그 상실을 짚어낸다.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자연세계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산이나 계곡, 강이나 바다, 태양, 달, 별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환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우리의 옛 시조는, 태양과 비조(飛鳥)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을은 또 어떤가?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시인 나태주의 <노을>이란 시다. 석양의 붉은 빛 속에서, 하루를 마치고 이리 저리 상처받아 고단해진 인간사를 본다. 저물어가는 노을에서 여유로운 낭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우리의 삶에서 어느 새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토마스 베리 신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지구를 산업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이로운 세계, 그것을 향한 진보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를 가능케 했던 진화과정을 파괴시킨다.”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 결과다. 이런 현실에서 자연이 피 흘리는 소리와 인간이 치러내는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체감, 인간과 우주와의 일체감은 인간이 인간되는 근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이 매일 호흡하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질료는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 되기 마련이다. 이기심, 지배욕, 오만, 거짓 등은 모두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끝내는 자신을 실종시킨다.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을 유린하면서 행복해지겠다는 생각과 행위는 마침내는 인간 자신을 향한 공격이 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인간은 풀잎 하나, 나비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하지만 그걸 지켜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게 달려 있다. 그건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우주 전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마음에서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어져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생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있다는 걸 느끼는 기쁨이다. 사랑의 핵심이다. 단절은 이 기쁨을 봉쇄해버리는 폭력이다.

미생의 삶을 보다 낫게 바꾸게 하려는 노력들은 현실에서 진압되기 일쑤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다룬 영화 <카트>도 그런 진압의 현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누군가에게는 우주의 무게로 존재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고립 당한다. 서로 간에 뜨겁게 이어지는 감격이 이렇게 해서 조롱당하고 능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어짐의 관계를 복원할 때 비로소 미생에게 완생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만나고 느끼고 공감하고 끄덕이며 손을 잡고 함께 나가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로써 우주의 기운이 그런 우리에게 벅차게 스며들 것이다. 폐허가 되살아난다.

어떤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다. 이 믿음에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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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서울>, 그 부푼 꿈을 안고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

 

<럭키 서울>, 그 부푼 꿈을 안고

 

 

퀴즈 하나.

다음의 가사는 어느 노래에 나오는 것일까?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도 웃음이 솟네.

 

오늘날 우리가 키보드라고 부르는 자판의 원조는 타이프 라이터였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해방이 되자, 미군정의 영향 아래 영어 타이피스트 수요가 늘면서 곳곳에서 타자학원이 생겨난다. 타이피스트는 당대 최첨단 직종이었다. 1948년, 현인이 부른 <럭키 서울>은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라고 시작한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바로 퀴즈의 대목이었다. 일제 식민지와는 결별하고 미제(美製)인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 근대화”에 대한 기대가 가득 담긴 노래였다. 그래서 제목도 “럭키(lucky) 서울”이라 했고, 가사의 마지막은 서울을 영어로 표기한 에스(S) 이(E) 오(O) 유(U) 엘(L)로 마친다. 2절 가사는 “서울의 거리가 청춘의 거리”라며, “청춘의 거리에는 건설이 있다”고 내세운다. 그 건설의 방향은 결국 미국을 따라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이와 또 다른 면모가 존재하기도 했다. <럭키 서울>을 부른 현인이 1950년에 선보였던 <서울 야곡>은 서울을 애타는 사랑과 시적 낭만의 도시로 그려낸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엔

찢어 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이 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 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네온도 꺼져가는 명동의 밤거리엔

어느 님이 버리셨나

흩어진 꽃다발

레인코트 깃 쓸어 올리며

오늘 밤도 울어야 하나

내가 본 듯 맘이 아픈

서울 엘레지

 

충무로, 보신각, 명동이라는 한자로 된 거리이름에 쇼윈도 그라스, 마로니에, 네온, 레인코트, 엘레지라는 영어 단어가 하나로 묶여 펼쳐진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감수성은 이렇게 <럭키 서울>에 등장하는 “타이프”와 “빌딩”을 거쳐, 풍경과 내면을 그려내는 외래어를 통해 조형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서울이 60년대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엄청나게 넘치기 시작했다. 인구가 촌에서 서울로 유입되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서울은 야망과 미래가 약속된 곳이었고, 촌놈과 서울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이 생겨나는 현장이었다. 일단 서울이라는 도시에 발을 들여놓으면, 촌에서 맺었던 인연은 깨끗이 잊어야 할 과거지사가 되어야 했다. 아니면 계속 촌놈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갔다.

 

서울역사박물관 전차 (출처: Jinho Jung (https://www.flickr.com/photos/phploveme)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며 서울 간 오빠는 소식도 없다”던 1925년의 동요 최순애 작사, 박태준 작곡 <오빠생각>의 오빠는 항일투쟁에 나선 것을 암시했던 반면에, 럭키 서울로 떠난 임은 전혀 다른 처지가 된다. 서울로 떠난 오빠인 사랑하는 남자는 변심남이 된다. 1967년 이시스터즈가 부른 <서울의 아가씨>가 “서울의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라고 하는 판국에 촌 아가씨는 서울 아가씨와 경쟁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68년 이미자가 불렀던 <서울이여 안녕>은 이런 사연을 담고 있다.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그리운 님 찾아 바다 건너 천리 길

쌓이고 쌓인 회포 풀려고 왔는데

님의 마음 변하고 나 홀로 돌아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아득한 옛날 어려운 일 이기고

백년을 같이하자 맹세를 했는데

세월이 님을 앗아 나 혼자 울고가네

그래도 님 계시는 서울 하늘 바라보며

안녕 안녕 서울이여 안녕

 

서울은 백년 맹세고 뭐고 없는 그런 매정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패티 킴의 <서울의 찬가>가 곧바로 반격에 나선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서울은 “처음 만나고 사랑을 맺은” 곳이 된다. 이곳에서 이루어진 사랑은 촌색시가 울고 돌아가는 사랑이 아니다. 변함없고, 멀리 있어도 돌아와야 하는 그런 사랑이다. 안녕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 야무진 이들이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도시인 것이다. 나 혼자 울고 가네 어쩌네 하며 궁상떨지 말고 어떻게든 여기서 살겠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길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을 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1972년의 <서울로 가는 길>은 가난한 집안을 살리기 위해 도시로 떠나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전해준다.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지 삼년에

뒷산에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뒷산에 약초뿌리란 뿌리는 모두 캤지만 그것도 별무효과였고 돈이 없으니 병환을 구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아무 대책도 없는 촌구석에 그대로 있는 것도 방도가 아니다. 그러면 홀로 남게 되는 병든 부모를 누가 돌보겠는가? 이렇게 가슴에 비애를 안고 떠난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냈을까? 1992년에 나온 드라마 <서울의 달>은 시골에서 상경해 제비, 퇴물제비, 꽃뱀, 작은 회사의 경리직원, 백수 등으로 지내는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건 꿈과 좌절, 사랑과 고통이 혼재된 도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고된 서울살이에 지친 이들은 1994년 방실이가 부른 <서울 탱고>를 듣고 따라 부르며 위로를 얻는다.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모두다 부질 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고향을 잃고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인생을 살면서 더는 악다구니로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냥 쉬면서 시름 잊고 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며,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의 술잔을 권하고 있다.

 

그럼 지금의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그건 여기 소개한 노래와 드라마의 이야기를 합친 전부이기도 하면서, 새롭게 더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은 여전히 야망의 거대한 용광로이자 권력과 돈, 그리고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무섭게 작동하는 곳이다.

 

그러나 고층건물과 녹지대가 날로 더욱 어우러져 가고 정치적 열기와 문화적 상상력이 시험되는 현장이며 미래를 향한 세대의 희망이 일구어지는 터이기도 하다. 이걸 더욱 발전시켜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서울이라는 도시가 세계적으로 뛰어난 도시들에 비해 뒤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적 향연의 부재다. 런던과 파리, 피렌체와 뉴욕, 북경과 도쿄, 암스테르담과 베를린이 이끌어온 지성의 역사를 돌아보면, 서울의 자리가 훤히 드러난다. 책을 읽지 않는 도시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책 읽는 소리로 해가 저무는

서울의 거리마다 웃음이 솟네.

 

이런 가사로 노래하는 <럭키 서울>을 꿈꾸고 싶다. 그러다보면, <서울 야곡>이 이렇게 시작되는 날이 분명, 오겠지?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책방마다에 인파가 흘러 넘쳤다

 

 

김민웅/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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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중앙다방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

 

국제중앙다방

 

이 다방 이름 정말 좋지요?”

.”

여자는 수줍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대답한다. 학송은 그녀의 웃는 모습이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다. 오늘로 겨우 세 번째 만나는 이 여성에게 벌써 프로포즈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사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아직은 서투르기만 하다.

 

두 사람이 맞장구치듯이 좋다고 한 다방 이름은 국제중앙다방이다. 이 대목은 이제 갓 40대인 박동훈 감독이 2010년에 만들었던, <계몽영화>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는 박 감독의 2005년 작품인 <전쟁영화>라는 제목의 20분짜리 독립영화 확대판으로, 일제부터 3대에 걸친 가족사와 우리 역사가 서로 만나는 이야기다.

 

영화 속의 이 장면이 담고 있는 시기는 1960년대 초반에서 중반이었는데, 당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선호도를 지닌 상호는 국제중앙이었다. “국제중앙다방은 이 두 개를 하나에 담아 쓰고 있는 셈이었다. 그 다음 순위가 제일이었다는데, 사실 이 세 단어들은 모두 당시 한국사회의 갈망과 그 정신사를 지배하다 시피 한 목표이기도 했다. “제일만 쳐도, 제일모직, 제일교회, 제일무역, 제일학원.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해방이 된 조선은 드디어 국제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더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이 시절 국제신사라는 말은 근대의 첨단에 서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단어였으며, 우물 안의 개구리를 벗어난 차원의 삶을 연상시켰다. 중화(中華)가 세계의 전부였던 시대를 지나, 일본제국주의 체제 아래 사는 것이 영원한 질서처럼 여겨졌던 때도 과거가 되었는데 미국이 중심인 세계질서 속에서 국제라는 단어는 선진(先進)”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국제시장, 국제극장, 국제상사.

 

영화의 다방 장면에서 학송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미리 넣지 말라고 주문한다. 8군 카츄사로 군대생활을 했던 그는 커피 타는 것도 이미 국제적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다방커피가 아니라, 과테말라니 예가체프니 하는 식으로 원두커피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여자 앞에서 커피 전문가처럼 광을 내는 수준이다.

 

한편 나라가 식민지였던 시절, 조선은 변방이었다. 지금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이동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그러니 모두가 중앙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 판이다. 학송은 결혼한 뒤 태어난 딸이 소풍을 갔다가 찍은 사진에서 가장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불호령을 내린다. “, 다음부턴 꼭 가운데 서서 찍어야 한다.” 그렇게 중앙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다. 중앙시장, 중앙교회, 중앙일보, 중앙극장, 중앙대학.

 

(출처: 계몽영화 공식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enlightenmentfilm)

 

 

국제중앙다방은 바로 이런 당대의 현실과 의지가 압축된 이름이라고 하겠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상호다. 이걸 오늘의 현실에서 영어로 번역해본다면, 국제니까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중앙은 센터(center), 다방은 커피 숍(coffee shop)정도로 하면 될까? 아니다. 이것도 이젠 낡아 후지다는 인상을 준다. “글로벌 허브 카페(Global Hub Cafe)” 쯤으로는 해야 이른바 먹어준다.” 그렇게 우리는 줄기차게 세상의 중심을 향해 온 사회가 에너지를 쏟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알고 보니 국제화는 미국화였고,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로 동일시되면서 우리 안에는 중앙, 또는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구조적으로 대량생산되어왔다. 이들은 우리 내부의 식민지이기도 하고 변방이기도 하며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로 전락했다. 이들에 대한 차별과 능멸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었고, 권력은 자신을 중앙에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주변으로 몰아냈다.

 

비정규직의 생존기반을 끊임없이 흔들고, 노동자들에 대한 쉬운 해고와 노인들에 대한 복지축소를 제도화하고 있는 정책이라는 괴물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국제중앙다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의 다른 이름이다. 분단과 냉전의 굴레는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 다방이 글로벌 허브 카페로 바뀐다 한들 상황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2014년은 비통함과 분노로 압축된다. 새해는 이 참담했던 세월을 극복하는 숙제를 안고 시작했다. 절망에 저항하고, 정의를 강처럼 흐르게 하는 세상을 만드는 기원과 의지가 곳곳에서 불타올라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고, 진정 존중받아야할 존재들의 삶을 지켜내는 우리로 변모해나갈 때 세상은 살만해지는 곳이 될 것이다.

 

이젠 다방이라는 이름도 없어진 시절이다. “국제중앙다방자리에 뭐가 들어서면 가장 좋을까?

이 다방 이름 정말 좋지요?”

.”

천대받고 짓밟혔던 이들이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름, 어디 없는지, 우리 모두가 감독이자 배우인 <계몽영화 2>를 올 한해 기대해본다.

 

김민웅/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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