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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두런두런'39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두런두런(29)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강원도 단강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새집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새집을 발견하면 새집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맡다’라는 말이 묘합니다. ‘맡다’라는 말에는 ‘차지하다’는 뜻도 있고, ‘냄새를 코로 들이마셔 느끼다’ 혹은 ‘일의 형편이나 낌새를 엿보아 눈치 채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 말했던 ‘맡는다’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담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집이 어디 있는지를 눈치 챘다는 뜻도 있고, 내가 차지했다는 뜻도 담겨 있었을 테니 말이지요. 저녁 무렵 교회 뒤뜰을 거닐다가 새 한 마리를 보게 되었는데, 날아가는 모양이 특이했습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가지 저 가지를 .. 2015. 8. 27.
어떤 새 두런두런(29) 어떤 새 한 마리 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다른 새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혼자 깨어 일어나 별들 일렁이는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 그는 어김없이 둥지로 돌아왔고, 잠깐 눈을 붙였다간 다른 새들과 함께 일어나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 새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깨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뒷모습을 우연히 본 것이었습니다. 이내 눈에서 사라지는 까마득한 높이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막 둥지로 돌아온 새에게 물었습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니? -하늘. -모두들 하늘을 날잖니? -하늘은 깊어. -왜 하필.. 2015. 8. 27.
옥수수 수염 두런두런(28) 옥수수 수염 - 동화 - 이제부턴 흙길입니다. 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민구가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나서 창에 코를 박고 밖을 구경하던 민구가 따뜻한 햇살에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잘 잤니? 이제 곧 할아버지 댁이다.” 운전하는 아빠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직 졸음기가 남아있는 민구는 큰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막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민구뿐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마다 아기 손톱 같은 작은 이파리들이 조잘조잘 돋아나고 있었고, 논둑과 밭둑으로는 누군가 크레용을 칠한 것처럼 굵고 힘찬 초록색 선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창문을 열자 확, 시원한 바람이 밀려.. 2015. 8. 18.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두런두런(25)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지난 여름 독서캠프를 통해 만난 분 중에 나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풀꽃’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요. 시골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답게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처음 뵙는데, 그 분은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 신문에 쓰고 있는 칼럼을 눈여겨 읽어오고 있다 했는데, 금방 친숙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시 중에 최근에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만큼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썼다는 시였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 2015. 8. 9.
콩 고르는 하나님 두런두런(24) 콩 고르는 하나님 오래 전 농촌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며칠째 비가 내리던 오후, 겸사겸사 방앗간 아래에 살고 있는 할머니 집사님 집을 찾아갔습니다. 편한 걸음 편한 마음이었지요. 특별한 이유 없이 차 한 잔을 나누는, 그런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계세요, 계세요?” 아무도 없는 듯 집안이 조용하여 몇 번을 불렀을 때에야 부엌문이 열렸고, 부엌에 있던 집사님이 환히 웃으며 맞아주었습니다. 귀가 어두운 집사님은 날이 흐려 집안이 어둑한데도 불을 따로 켜지 않은 채 부엌 창문께 바닥에 앉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콩을 고르던 중이었습니다. 가을에 콩을 털고 콩대를 한쪽 구석에 쌓아 두었는데 겨울을 지나며 보니 콩대 아래 떨어진 콩이 보였습니다. 콩을 본 집사님은 다시 한 번 .. 2015. 7. 31.
어느 날 새벽 두런두런(25) 어느 날 새벽 새벽예배를 마치고 제단에 올라 기도 카드를 넘기다 만난 한 교우의 기도제목 “추위를 잘 지내는 이웃이 되세요.” 기도를 적은 날짜를 보니 지난해 연말 이웃들이 춥지 않게 겨울을 나기를 집사님의 기도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는데 맨 아래 적은 마지막 기도 “직장을 잃어서 실직자이오니 꼭 일자리를 주세요.” 갑자기 숨이 턱 막혀 고꾸라지는 것 같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다시 한 번 읽는데 생선가시 목에 걸리 듯 마음이 찔려오고 깨진 유리조각 손가락마다 박히는 듯 다음 카드로 넘기지 못한다. 멍하니 앉아 있다 고스란히 제단 위에 펼쳐 놓는다. 나로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눅눅한 이불 말리듯 젖은 빨래 말리듯 다만 그 분 앞에 펼쳐놓는 것 외엔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2015. 7. 30.
그럴 수 있다면 한희철의 두런두런(24) 이불 말리듯 예배당 옆 영안아파트 후문 담장을 따라 누군가 이불을 널어 말리는데 한낮의 볕이 이불 위에 맘껏 머문다 지나가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것은 마음 널어 말릴 곳 보이지 않기 때문 눅눅한 마음 지울 곳 보이지 않기 때문 눈부신 볕에 온몸을 맡기고 단잠에 빠진 이불을 두고 그럴 수 있다면 너희들 이름 하나에 별 하나씩을 바꿔 이름 하나 부르는데 별 하나 사라지고 기억 하나 붙잡는데 별자리 하나 지워진다 해도 그러느라 우리 어둠에 갇히고 어둠 속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해도 그 어둠 견뎌야 하리 그 울음 울어야 하리 그래야 칠흑 같은 어둠 속 빛 다시 스밀 터이니 스민 빛 별자리로 모여 비로소 끊긴 길 이을 터이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2015. 7. 7.
저린 발, 저린 마음의 기도 두런두런(14) 저린 발, 저린 마음의 기도 새벽 예배를 드리고 제단에 올라 무릎을 꿇으면 이내 저려오는 발 온몸의 무게가 발끝으로 모이는데 저린 만큼 마음이 간절해지기라도 하는 양 작은 불빛 아래 기도 카드를 넘긴다 아픔과 눈물 없는 삶이 없어 더듬더듬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길 잃듯 뚝뚝 끊기는 마음 그나마 같은 심정으로 같은 기도 바칠 수 있는 길이 더는 없는 듯 저린 발 저린 마음 그것밖엔 없다는 듯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2015. 6. 25.
그럴듯한 지팡이 지녔다 해도… 그럴듯한 지팡이 지녔다 해도… 바닥까지 말라버린 개울가에 주저앉아 울어본 적 없다면 고단한 길 끝에 만난 풀밭 위를 마음껏 뒹굴러 본 적 없다면 서로 몸을 기대 단잠을 자는 모습을 보며 웃어 본 적 없다면 류연복 판화 어둠을 가르는 별똥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폭풍우 속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 듣지 못한다면 사나운 짐승과 싸우느라 생긴 상처 보이지 않는다면 목자 아니다 그럴듯한 지팡이 지녔다 해도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2015.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