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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6

악마의 성서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7) 악마의 성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라 걷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습니까?”(마가복음 7:1-23)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범죄 하나를 꼽는다면 성서를 함부로 인용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혁신의 위인 마르틴 루터를 단죄한 1520년의 교황문서(Exsurge Domine)가 “야훼여! 일어나소서. 사람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9:19)라는 성경 구절로 글을 시작하는 예를 비롯해, 교회 기득권층은 항상 미운 이를 공격할 때 대개 성스러운 성경구절을 서두로 해 공식 문서를 쓴다. 성서 주석의 역사는 오해와 이해관계가 얽이고 설키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하느님의 모상”(창세기 1:26-27)이라는 개념은 2000년 동안 인.. 2015. 4. 15.
내가 누구지?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6) 내가 누구지? “인자는 마땅히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가복음 8:27-35).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디까?” “체제에 도전하다 헤롯의 손에 목잘려 죽은 세례자 요한 같다고 하고, 통일 통일하는 엘리야 같다고 하고, 좌경용공의 예언자 그러니까 요새말로 종북세력이라고도 합디다.” 나사렛 사람은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나 보다. 갈릴리 출신인 그는 예루살렘 언론 그 어느 하나에도 호감을 못 사 집중포화를 맞던 참이었다. 그 때는 이나 기독교 방송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제자들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 2015. 4. 9.
민족의 성 금요일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5) 민족의 성 금요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누가복음 11:11-34).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네의 운명에 무엇인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음을 예감하였다. 스승 가까이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불안한 시선으로 주님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성지 주일의 열띤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전에 사도들이 들은 말씀은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그 한마디였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민족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정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눈앞에는 희망에 찬 미래가 열릴 것인가, 아니면 비극의 역사가 반복될 것인가? 그에 따른 내 일신과 내 가족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역사라는 것은 전.. 2015. 4. 2.
그리스도의 함장수들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4) 그리스도의 함장수들 한밤 중에 “신랑이다! 마중하러 나가라!”(마태복음 25:1-13). “함 사려! 함 사!” 예식장들이 분주해지는 가을철이면 우이동 골짜기 해묵은 골목에서는 간간이 함 들어오는 목청이 쩌렁쩌렁 초저녁잠을 깨우는 일이 있다. 스무 해를 눌러 사는 골목이라 주부들은 남의 집 숟가락까지 세고 있다. “무슨 소란일까?” “무슨 소란은요? 오늘 구 선생댁 은경이 함 들어오는 소리라구요.” “아이고, 누가 데려가는지 복도 많겠네. 이쁘고 참한 색시지…….” “이 동네서 태어나고 자랐지요. 코흘리개 적부터 보아 왔으니까요. 걔가 빵기를 업어 주던 때가 엊그젠데…….” 터무니없는 억지라도 함장수의 요구는 들어주어야만 골목은 다시 고요히 잠결에 빠져 간다. 마태.. 2015. 3. 26.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3)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랍니까?”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가복음 10:46-52). 간판에 씌어 있는 글씨를 보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진리를 팝니다. 각종 진리일체!” 판매원 아가씨는 매우 예의발랐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완전한 진리를 찾으세요?” “완전한 진리! 그럼요, 완전한 진리를 보여 주시오. 내게 속임수는 필요 없소! 변명도, 합리화도 필요 없소! 평이하고도 명료한 나의 진리! 그게 내가 바라는 진리입니다.” 아가씨는 가게 안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완전한 진리를 파는 곳입니다.” 그곳 판매원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값이 비싼데요, 선생.. 2015. 3. 21.
무엇을 보러 광야를 헤매는가?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2) 무엇을 보러 광야를 헤매는가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복음 11:2-11) 젊은 혼과 병든 지성은 무엇을 보려 허허한 가슴을 안은 채 유다의 저 텅 빈 들을 헤매고 있는가? “바람에 날리는” 갈대밭을 보러 가진 않았을 게다. 일찍이 뉴먼 추기경이 “사람은 주먹이 자기 면상에 날아드는 순간까지는 자기 편할 대로 믿으려 든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용기도 마음도 없을 때 맹랑한 낙천론처럼 편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 그들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갈릴리에서 도륙.. 2015. 3. 11.
단서가 붙은 인생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1) 단서가 붙은 인생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누가복음 l2:35-40) 거울 앞에서 정성을 쏟고 있는 여인, 명동 거리의 그 아름다운 자태들을 보노라면 "집과 여자는 다듬기 나름이다"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마찬가지로 셋방살이 끝에 내 집을 한 채 사고 나면 고치고 다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서울 인구 70퍼센트는 자기 집이 없다는 통계이고 보면 집을 다듬는 재미는 나머지 30퍼센트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다. 독채 전세를 들더라도 자기 돈을 들여 손질하는 일은 드물다. 남의 집이니까 언제 비워 달랠지 모르는지라 정을 못 붙이는 것이다. 남의 집이니 언제라도 비워 달라면 이사를 갈 생각으로 사는 셋집살이…. 오늘 성서.. 2015. 3. 3.
우리 시대의 순교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0) 우리 시대의 순교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선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마태복음 23:29-33). 신앙인에게 남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두 개의 눈 말고 또 하나의 눈, 신앙의 눈인 셋째 눈이 달린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유다인 예수를 우리는 “그리스도”로 섬긴다. 한낱 정치범을 “구세주”로 모신다. 죽어 버렸으니까 모두 끝장났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누구나 십자가에서 죽음의 공포를 보는데 우리는 인류의 새 생명을 보고 그 고상을 성당 지붕에 설치하고 방안에 걸고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이다. “너희가 예언자의.. 2015. 2. 23.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9) 용서가 그토록 어려운 줄이야?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Rembrandt )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시다니요!”(누가복음 15:11-32). 잘 아는 복음 대목이지만 참을성을 갖고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집에서 살기가 싫다며, 어느 날 집안의 돈을 모조리 싸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곧 돈도 다 떨어지고 실컷 고생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그가 집에 당도하자 아버지는 굵은 몽둥이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길에서 큰아들을 만났다. ‘어딜 그리도 급히 가십니까? 그것도 몽둥이를.. 2015.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