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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3

다시 다시 보면 모두가 다 시詩 빈 하늘에 눈을 씻고서 다시 보면 땅의 모두가 다 하늘 오늘도 다시 아침해를 주시고 고된 하루에 선물처럼 다시 달밤을 주시는 순간마다 다시 숨을 불어넣으시어 주저앉으려는 몸을 다시 일으키시는 태초의 숨이 다시 숨쉬자며 처음 사랑이 다시 사랑하자고 2021. 12. 6.
거 참 보기 좋구나 아침부터 어둠이 내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차례가 돌아왔다. 한사람 끝나면 또 다음 사람, 잠시 쉴 틈이 없었다. 파마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머리를 다듬는 사람도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차례를 기다릴 때, 이런 저런 얘기로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난로 위에서 끓는 산수유차가 하얀 김으로 신이 났다. 원주 의 서명원 청년, 한 달에 이틀을 쉰다고 했다. 그 쉬는 날 중의 하루를 택해 아침 일찍 단강을 찾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마을 분들을 위해 머리 손질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일, 결코 깨끗하다 할 수 없는 다른 이의 머리를 만져야 하는 일, 늘 하던 일을 모처럼 쉬는 날 또 다시 반복하야 하는 일,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마지막 .. 2021. 12. 6.
파스 며칠 동안 머리가 아파 앓아누웠던 우영기 속장님이 주일을 맞아 어려운 걸음을 했다. 윗작실 꼭대기,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겨울만 되면 연례행사 치루 듯 병치레를 하는 속장님. 두 눈이 쑥 들어간 채였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보니 머리에 하얀 것이 붙여 있었다. 파스였다.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는 김을순 집사님을 찾았을 때, 집사님은 기도해 달라시며 주섬주섬, 아픈 다리의 옷을 걷었다. 가늘고 야윈 다리, 걷어 올린 집사님의 다리에도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언제 붙였는지 한쪽이 너덜너덜 떼진 채 겨우 매달려 있는 파스였다. 만병통치인양 아무데고 붙는 파스, 아픔을 다스릴 방법이라곤 그것이기에. - 1991년 2021. 12. 4.
고무신 어릴 적 많이 신었던 신은 고무신이었다. 고무신도 두 종류였는데, 그중 많이 신었던 건 검정고무신이었다. 시커멓게 생긴 건 영 볼품이 없었지만 질기긴 엄청 질겼다. 쉽게 닳거나 찢어지지 않아 한번 사면 싫도록 신어야 했다. 땀이 나면 잘 벗겨져 뜀박질을 할 땐 벗어 손에 들고 뛰기야 했고, 잘못 차면 공보다도 더 높이 솟아오르기도 했던 고무신, 고무신은 수륙양용이었다. 사실 고무신은 땅보다도 물에서 더 편했다. 젖는 걸 걱정할 필요 없이 언제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었고, 때론 잡은 고기를 담아두는 그릇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싫도록 신었던 고무신. 검정 고무신을 신을 때에는 흰 고무신이 부러웠다. 하얀 빛깔은 얼마나 깨끗했으며 그에 비해 검정 고무신은 얼마나 누추해 보였는지. 때가 지나 흰 고무신을 신.. 2021. 12. 3.
도리어 애틋한 시작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도리어 애틋한 시작 시간이 빈틈을 보이는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어김없는 순서로 계절은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오고,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마치 기습이나 당한 것처럼 여기기조차 합니다. “어느 새”라는 말은 우리의 무방비한 자세를 폭로하는 것이지 시간의 냉혹함을 일깨우는 말은 아닙니다. 활을 한 번도 쏘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마저도 한해의 마지막 달력을 응시하는 순간, “세월이 쏜 살 같다”는 표현이 전혀 낯설거나 또는 자주 들었다고 해서 구태의연하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나이만큼 그 속도는 비례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리 헛되지 않습니다. 남은 시간에 대한 자세의 차이가 가져오는 속도감의 격차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는 또 없을 지도 모릅니다. 나이보다는 지금 서 있는 자리.. 2021. 12. 1.
끌개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소를 끌고,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한다. 소등엔 멍에가 얹혔고, 멍에엔 커다란 돌멩이가 얹힌 나무토막이 연결되어 있다. ‘끌개’를 끌며 소가 일을 배우는 중이다. 등 뒤 벅찬 무게를 견디며 소는 묵묵히 걸어간다. 일소가 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게 많다. 곧 돌아올 일철을 앞두고 열심히 일을 배운다. 일소가 되기 위해 등 뒤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소, 등짝이 까지도록 끌개를 끄는 소를 보는 마음이 숙연하다. 주어진 밭을 갈기 위해 끌어야 할 끌개가 내게도 있다. 쉽지 않은 무게를 견디며 많은 시간 끌개를 끌어야 한다. 이 밭에서 저 밭으로 제 멋대로 소가 뛰는 건 제대로 일을 배우지 않은 탓이다. 쉽게 마치려 하고 쉽게 벗으려 하는 내 끌개를 몇 날 며칠 .. 2021.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