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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3

크로스오버 더 스카이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를 하루 지나서 비로소 해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날 문득 한낮의 볕이 좋아서 모처럼 따뜻한 볕이 아까워서 칠순을 넘기신 엄마랑 통도사의 무풍한송로를 걸었습니다 뿌리를 내린 한 폭의 땅이 평생 살아갈 집이 되는 소나무가 춤을 추는 듯 줄줄이 선 산책길을 따라서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이 구불구불 걸어갑니다 사찰 내 서점에서 마주선 백팔 염주알을 보니 딸아이의 공깃돌을 옮겨가며 숫자를 헤아리던 기억에 책 외에 모처럼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습니다 옆에 계신 친정 엄마한테 이십여 년만에 사달라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엄마는 손수 몇 가지 염주알을 굴려보시더니 이게 제일 좋다 하시는데, 그러면 그렇지 제가 첫눈에 마음이 간 밝은 빛깔의 백팔 염주알입니다 엄마가 한 말씀 하십니다, "평.. 2021. 12. 31.
머리에 얹은 손 한해가 바뀌는 시간, 어둠속 촛불 하나씩 밝히고 예배당에 앉았습니다. 경건한 마음들. 늘 그만한 간격으로 흘러가는 시간일터이면서도 해 바뀜의 시간은 엄숙하고 무겁습니다. 더듬더듬, 기도도 빈말을 삼가게 됩니다. 돌이켜 보는 한해가 회한으로 차올라 눈물로 흐르고, 마주하는 한해가 마음을 여미게 합니다. 머리 숙인 교우들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리곤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전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 양, 시간 위에 손 얹은 양, 손도 마음도 떨립니다. 전에 없던 일, 스스로에게도 낯선 일 그 일이 그 순간 절실했던 건 내 자신 때문입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기도 받고 싶은, 문득 그런 마음이 온통 나를 눌렀습니다. 낮게 엎드려, 가장 가난한 마음 되어 단 한 번의 손길을 온통 축복으로 받고 싶은 배.. 2021. 12. 31.
어딘가엔 또 불고 있으리니 오래 전, 관옥 이현주 목사님이 보내주신 연하장에는 ‘오늘 하루’라는 붓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나를 침묵 속으로 데려가 잠시 시간을 멈추게 했습니다. ‘오늘’이라는 말과 ‘하루’라는 말이 무척 새롭게 그리고 퍽 무겁게 와 닿았습니다. 이후로 이런 하루, 저런 하루, 어떤 하루, 그때 하 루, 내일 하루… 그 하루마다 ‘오늘’이고 그 오늘마다 ‘하루’ 였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은 이 책 제목을 ‘하루 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걸음과 길’이란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내는 하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하루가 모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길은 걸음과 걸음이 모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 선생께서 말씀하신 .. 2021. 12. 31.
상희의 아픔은 펄펄 한해가 저무는 마지막 날. 상희 아버지는 한참 어둠이 내린 버스정류장을 늦도록 서성였다. 안산으로 취직을 나간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 상희가, 신정휴가를 맞아 고향에 오겠다고 뒷집을 통해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피붙이 하나 없는 객지에 어린 것이 나가 얼마나 고생이 됐을까. 먹을 것 제대로 먹기나 했는지, 딸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제법 붐빈 막차에도 상희는 내리지 않았다. 막차 지나 한참까지 기다렸지만 상희는 오지 않았다. 밤늦게 다시 걸려온 전화, 야근 나간 상희였다. 상희 아버진 된 술로 한해를 보내고, 상희의 아픔은 펄펄 흰 눈으로 내리고. - 1991년 2021. 12. 31.
떨리는 전화 반갑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 전화가 있다. 단강에서 이사 나간 최일용 성도님과 신동희 집사님의 전화다. 최일용 성도님은 아직 배움의 길에 있는 두 형제를 데리고 부론으로 나갔다가 다시 문막으로 이사를 갔다. 막내 갑수가 고등학교 기숙사로 떠나 이젠 백수와 둘이서 지낸다. 문막 농공단지 내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신동희 집사님 또한 마찬가지다. 어린 병관이와 둘이서 살다가 지난해 만종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집사님은 청주 근교로 멀리 떠났다. 단칸방을 얻어 살며 어느 회사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냥 전화했어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무슨 용건이 있는 전화는 아니다. 그저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하는 전화인 것이다. 뽑아도 뽑아도 밟아도 밟아도 돋아나오는 .. 2021. 12. 30.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코바나19금'('썩은 밥에 빠진 누런 코') 한 사람이 있다. 그 옛날 친구를 따라서 뭣 모르고 찾아간 해인사의 백련암. 그리고 성철 스님께 한 말씀을 청하던 젊은이다. 그러면 부처님 앞에 삼 천 배를 올리라는 성철 스님의 한 마디에 괜히 투덜댔다가 "그라믄 니는 마, 만 배 해라!"라는 성철 스님의 엄호에 오기가 발동해서 정말로 백련암 초행길에 만 배를 올렸던 젊은이다. 그가 바로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택 스님이다. 다리가 끊어지고 온몸이 부숴지는 듯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만 배를 겨우 마친 젊은이는 기어가다시피하며 성철 스님께 한 말씀을 청하였다고 한다. 청년이 기대했던 한 말씀이란 다름 아닌 청년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한 말씀이었으리라. 성철 스님은 "지킬 수 있나?" 물으신 후 딱 한 말씀만 하시곤 내려가라 하셨다며 상좌인 원택 스님은 .. 2021. 12. 28.
십자가 나무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이 땅에 오신 십자가 나무 그러나 이 땅에 머리둘 곳 없다 하시던 마음이 가난한 나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비로소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마음으로 살으라 하신 홀로 산을 오르시어 기도하시던 나무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진리의 몸이 되신 온몸으로 시를 쓰는 마음이 따뜻한 사랑 나무 다시 하늘로 오르시어 우리에게 성령을 주고 가시며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함께 살아가든 홀로 외따로 살지라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저마다 태양을 닮은 양심이 공평하게 나를 비추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진리 안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한 그루의 평화 나무로 선 십자가 나무 예수 2021. 12. 26.
따뜻한 기억 성탄절 이른 아침 승학이 할아버지가 찾아오셨습니다. “오늘이 성탄절 맞제?” 그러면서 무언가를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 원짜리 지폐였습니다. “얘들 과자락두 사줘.” 할아버지는 이내 걸음을 돌렸습니다. 고마운 손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마다 그랬습니다. 당신은 교회에 나오지 않지만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그렇게 정성어린 손길을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넉넉지 못한 용돈을 아꼈다 전하시는 지폐도 지폐였지만, 해마다 어김없는 따뜻한 기억이 더욱더욱 고마웠습니다. - 1991년 2021. 12. 25.
별빛도 총총한 은총의 첫 새벽!, 새벽송 꿈결인 듯싶게 노래 소리가 들렸다. 자다 말고 한참을 생각했다. 꿈인가? 생시라면 누굴까? 분명 새벽 송은 안 돌기로 했는데 누구란 말인가. 한 곡이 끝나자 또 다음 곡,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엔 빙 둘러선 젊은이들, 잠이 확 달아났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머쓱한 표정을 짓는 내게 커다랗게 인사를 건넸다. 만종교회 학생들이었다. 새벽송을 돌만한 사람이 없어 올해부턴 못 돌겠다는 아쉬운 소리를 귀담아 들었던 친구 최 목사가, 먼 새벽길을 달려왔던 것이다. 그제야 보니 친구는 방앗간 앞에 차를 세워두고 있었다. 그렇게 듣는 성탄의 새벽노래는 그야말로 은총이었다. 첫 새벽 알렸던 천사들의 노래. 별빛도 총총한 은총의 첫 새벽! - 1991년 2021.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