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잘 나았심니더



“기도해 주신 덕분에 아기 잘 나았심니더.”


김남철 씨의 전화였습니다. 지난 봄 마을 보건진료소 소장님과 결혼한 김남철 씨가 아기 아빠가 되고 나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저를 꼭 닮았심니더.”


전화였지만 목소리만 듣고도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입이 귀에 닿은 웃음이 눈에 선했습니다.


낮선 마을로 들어와 마을사람들과 따뜻한 이웃되어 살아가는,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김남철 씨가 이젠 아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기를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아기 유난히 좋아하는 평소 그의 성품으로 보아 가뜩이나 정겨운 신혼살림에 더욱 더 웃음꽃 피어날 것이, 전화 속 전해온 웃음만큼이나 눈에 선했습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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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의 구별법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요일 4:20-2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하루하루 기쁘게 살고 계시는지요?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 5:20)고 말하지만, 우리는 마치 근심 걱정이 우리 소명인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은 메시야가 우리에게 틈입(闖入)하는 문이라지요? 자잘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도 잘 살펴보면 그 속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분주함에 쫓기느라 그 작고 미묘한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은 ‘지금’을 한껏 누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제는 제법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보면 서늘한 느낌이 들어 무릎 담요를 가져다 덮기도 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가을 날씨가 왜 이리 덥냐고 투덜거렸는데, 이번 주일에는 영상 4도 아래로 내려간다니 건강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옆에 있는 대추나무가 해거리를 하는지 열매가 많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대추 수확을 했는데, 나무에서 절반쯤 썩은 것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이걸 잘 말렸다가 송구영신예배 때 차로 만들어 마실 예정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매를 거두는 일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며칠 전 성서학당 시청자 한 분이 고향인 부여에 갔다가 주웠다며 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목회실 식구들과 나누며 참 기뻤습니다. 밤을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내준 분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줍기도 하고, 밤송이를 발로 밟거나 나뭇가지로 발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흥감스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어른들 속에도 아이들이 숨어 있다지요? 가끔은 그 어린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 삶이 건강해집니다. 놀이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을 파악했습니다. ‘노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근대인들에게 논다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지닐 때가 많았습니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놀 줄 알아야 삶이 주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놀이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일상의 경험과 구별되기에 비일상적 행위입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일으키는 긴장이 묘한 흥분감을 일으킵니다.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창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는 어느새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도 저는 여전히 일상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한가한 때가 별로 없지만 어쩌다 몇 시간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벼가 무르익는 논, 갈대나 억새가 흔들리는 개울가나 산야를 그저 상상 속에서만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유목적 삶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정착 생활이 주는 안온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고 홀가분하게 떠도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습니다. 떠돎을 꿈꾸면서 집토끼처럼 사는 삶에 대해 비애를 느끼기도 합니다. ‘은총의 숲’ 조성 문제 때문에 몽골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도 경험해 보았고, 초원을 가득 채운 야생화에 도취되기도 했고,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진 별 하늘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습니다. 몽골 유목민들은 유랑과 정착을 반복합니다. 가축들에게 먹일 신선한 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이사를 하기 전에 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느 쪽으로 이동할 것인지 의논하는 가족회의를 연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곳, 풀이 무성한 곳, 물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사 장소를 정하면 책력을 뒤져 길한 날을 확인한다.

유목민의 이사 준비는 게르의 중심인 난로를 해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불을 끈 후 난로를 빼고, 아궁이 굴뚝과 연통을 제거한다. 그 뒤 게르를 둘러싼 세 개의 줄을 풀면 본격적인 게르 해체가 시작된다. 게르를 해체하고 짐을 치울 때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남짓, 언제라도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삿짐을 다 싸면 그동안 잘 살았음을 감사하는 마음과, 훗날 이곳에 다시 옮겨올 때 풀이 많이 자라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나 우유를 하늘에 바친다.”(대구 MBC HD 특별 기획 10부작, <하늘과 맞닿은 바람의 나라 몽골>, 이른아침, p.228-230)

물론 우리가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모진 비바람을 맞아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입에 피리 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의 짐들로부터 벗어나 껄껄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잘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6,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장막에 머물며 이런저런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끌어내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 15: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굳이 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바라봄은 일상 속에 더 큰 생기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연휴 중에 공원에 앉아 두 시간쯤 책을 읽었습니다. 카페에 갈 생각이었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 옆에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는 꽤 많은 분들이 인사를 건네고, 또 잠시 그 곁에 머물다 가는 것을 보니, 공원의 단골손님임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다가와도 물리치지 않았고, 간다고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맹자에 나오는 "왕자불추往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의 경지였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와서 말을 하면 다 듣기는 했지만 이러쿵저러쿵 대꾸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떠나는 이에게는 ‘잘 가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단 종파에 속한 것이 분명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친절한 말투와 몸짓으로 할머니를 설득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내내 침묵 속에 있다가 제풀에 지친 그들이 떠날 때면 ‘잘 가요’ 하고 인사했습니다. 역정(逆情)을 내지 않는 그 평안함이 참 놀라웠습니다. 어떤 인생의 과정을 거쳐 왔기에 그런 내공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을 어떤 냉소도 조롱기도 없이 대하는 이들을 보면 우리 마음도 절로 따뜻해집니다. 거친 말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 겁니다.

오래전에 한 랍비가 자기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밤이 지나가고 낮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 한 사람이 “저 먼 데 있는 짐승이 양인지 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먼 데 있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은 어떠한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에게서 형제나 자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일세. 그럴 수 없다면 그 시간이 언제든 여전히 밤이라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형제나 자매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늘 경계심을 품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날카로운 눈빛이나 거친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그와 연루되기 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난폭함과 뻔뻔함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날 공원에서 저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난해한 시를 읽고 있었지만, 정작 제 마음에 더 큰 빛을 던져준 것은 옆 벤치에 앉아계시던 그 할머니였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서서히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회복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지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일상회복’이라는 말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도 다시 대면 예배의 시간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비대면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순례자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당을 비질하고 물을 뿌려 손님을 맞이했던 옛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준비하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0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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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의 햇살

  

그대 등 뒤로 내리는 햇살이 
따스함으로 머물도록
한 올 한 올
품안에서 머물도록
잠깐
잠깐만이라도 그대 고요하라.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비늘 같은 햇살
햇살은 거리에 널리고 
바쁜 걸음에 밟히니 
표정 잃은 등마다 낯선 슬픔 
제 집처럼 찾아드니

그대 등 뒤로 내리는 햇살이 
새근새근
고른 숨결로 머물도록
잠깐
잠깐이라도 그대 침묵하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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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하나를 돌려 깎아서
네 식구가 좋게 나누느라

누나 접시에 세 쪽
동생 접시에 다섯 쪽

아빠 접시에 세 쪽
엄마는 입에 한 쪽

저녁 준비를 하느라
잠시 고개를 돌렸다 돌아 보니

아빠 접시에 두 쪽
누나 접시에 두 쪽

이상하다
누가 먹었지 했더니

저는 안 먹었어요
아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뚝 땐 얼굴빛으로

증거 있어요?
CCTV 있어요?

엄마가 가만히 보면서
CCTV는 니 가슴에 있잖아

가슴에 손을 얹으면 
CCTV가 켜지니까

지금 바로
작동시켜봐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있고
자기가 자기를 알고 있는데

그랬더니 
순순히

제가 먹었어요
바른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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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 기다려온 씨앗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30)


박민하 성도님 네 심방을 하며 위의 성경을 읽었다. 무거운 짐, 걱정일랑 주께 맡기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말씀 중 ‘멍에’도 그랬고, ‘두 마리 소가 나란히 밭을 간다’는 농사법에 대한 얘기도 그랬다.


함께 모인 교우들이 그 말을 쉽게 이해했다. 박민하 성도님은 ‘두 마리 소’를 ‘겨릿소’로 받으셨다.

‘소나 나귀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내 백성은 나를 모른다’(이사야 1:3)는 속회공과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알아보나요?” 


여쭸더니 


“그럼요, 주인보다 먼저 알아보고 좋아하는데요.”


허석분 할머니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다. 하늘 바라 땅 일구며, 씨 뿌리고 거두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가슴에 말씀일랑 씨앗처럼 떨어진다.


투박하고 푹푹한 땅의 가슴, 말씀은 발아 기다려온 씨앗처럼 그렇게 떨어진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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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으로 가는 길



그리운 이들 마주하면 그들 마음마다엔 끝 모를 사막 펼쳐 있음을 봅니다. 


선인장 가시 자라는 따가움과 별빛 쏟는 어둠, 


고향 지키듯 적적한 침묵 홀로 지키는 저마다의 사막이 저마다에게 있습니다.


저마다의 사막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지요?
그리운 이들 마주하면 그걸 묻고 싶습니다.


바람 자는 언덕에 말(言)을 묻곤 
사막으로 가는 길,
그걸 묻고 싶습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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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다



쌀이며 담배며 콩이며, 그동안 지은 농작물에 대한 수매가 있었다. 늘 그래왔던 대로 원하던 양도 아니었고 기대했던 가격에도 미치지 못했다. 


잠깐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농촌에선 유일하게 만져볼 수 있는 목돈의 기회이기도 하다.
쌀 미(米)자는 원래 八과 八을 합쳐 놓은 글자, 88세를 米壽라 한다. 쌀 한 톨 먹으려면 농부의 손 여든여덟 번이 가야 한다. 


농사 중 가장 많이 손 가는 게 잎담배농사라 하니, 담배는 여든여덟 번 손 가는 쌀보다도 더 손이 가는 셈이다. 재처럼 작은 씨를 모판에 심을 때부터, 몇 번이고 같은 빛깔, 같은 상태의 잎을 추리는 조리에 이르기까지 여간한 많은 품이 드는 게 아니다.

이곳에선 수매하는 일을 ‘바친다’고 한다. 잎담배 수매에 응하는 걸 ‘담배 바친다’고 한다.
‘바친다’라는 말이 아프다. 값을 매기는 쪽이 받는 쪽이니 아무래도 듣기 좋은 말로 얘기하는 것이 값 받는데 유리할 거라는 기대심리였을까, 관(官)을 어렵게만 생각해온 오래된 시간 탓일까. 그저 몇몇이 모여 의견을 모으면 그대로 값이 정해지는 숱한 공산품들을 두고, 필요 없는 걸 불쌍해서 사주는 듯, 선심 쓰듯 정해준 가격 앞에 땀 흘려 지은 농작물을 바쳤다. 

애써 거둔 먹거리를 두고 팔았다 않고 바친다 하는 농민의 뜻을 언제나 올바로 헤아려 바치는 곡물을 소중하게 받을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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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당신의 바라봄 속에 펼쳐지는 세계를 
난 사랑합니다.


끝 간 데 없는 당신. 
당신 안에 있다 해도 그게 구속 아님은 
내 아직 당신의 끝 모르기 때문입니다.


봄소식 언제인가 싶게
얼음 같은 고독
흰 눈 같은 푸근함 
아울러 지닌 

돌아가야 할 이 
있는 곳
그게 고향이라면
당신은 내 고향입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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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릿한 기도



“우린 부족한 게 많습니다. 성미도 즉고, 헌금도 즉고, 사람도 즉고, 성도도 즉고, 믿음도 즉습니다. 불쌍히 보시고 채워 주옵소서.”


지 집사님은 늘 그렇게 기도하신다.


“높고 높은 보좌에서 낮고 천한 저희들을”이라든지 “지금은 처음 시작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라든지 사람마다의 기도엔 습관처럼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지집사님의 경우엔 위와 같다.


말과 마음이 하나라면 언제나 집사님은 빈말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넉넉한 은혜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그동안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집사님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순간적으로 지나는 아릿함을 난 아직도 어쩌지 못한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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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석굴암에서 바라보는 새벽의 일출



놀이터에서 
흙구슬을 빚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흙구슬이 부서져 울상이 되던 날

물기가 너무 없어도 아니되고
너무 많아도 아니되는 흙반죽을 떠올리며

새벽마다
이슬을 빚으시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면
이슬은 터져서 볼 수 없었겠지요

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이 땅을 빚으시는지

물로 이 땅을 쓰다듬으시듯
바람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듯

오늘도 그렇게
새벽 이슬을 빚으시는 손길을 해처럼 떠올리며

저도 따라서 
제게 주신 이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애쓰지 아니하기로 
한 마음을 먹으며 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밤새 어두웠을 제 마음을 향하여 둥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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