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문(不二門)



지난 여름 강원도 고성군 대대리를 친구와 함께 찾은 적이 있다. 대대리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강원도 고성군이면 아버지 고향인 북쪽의 통천군과 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룻밤 다녀오는 짧은 일정인지라 무얼 할까 하다가 다음날 아침 건봉사를 찾았다. 남한의 최북단에 있는 사찰로서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소개를 들었다.


기기묘묘한 금강산 풍경 속 웅장한 사찰을 그리며 갔는데,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금강산 자락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산과 다름이 없었고,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멀리 아버지 고향 한 자락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기대는 무리한 기대였다. 원래는 우리나라 4대 사찰 중 하나요, 금강산 내 사찰 중에선 규모가 제일 큰 본사였다는데 6.25 때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대웅전만 썰렁하게 남아있었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건봉사 입구 일주문에 쓰여 있는 문의 이름이었다. 낡은 현판에는 「不二門」이라 쓰여 있었다. 뭐라 명쾌하게 옮길 순 없었지만 마음으론 느낌이 다가오는 이름이었다. 


어떤 예감이 있었을까, 최북단(사실 이 말은 얼마나 슬픈 말인가, 북한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말이 맞을 텐데)에 있는 사찰 일주문의 이름이 「不二門」이라는 사실은, 비애어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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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큰 사랑이여



4박 5일, 잠깐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해 지 집사님은 여주 장에 다녀왔다.
마늘 여덟 접을 가지고 나가 팔아 돌아가는 아들 여비를 전했다. 


부모 사랑이여,
주어도 주어도 모자란, 
가난한 큰 사랑이여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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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한 숙제



“전도사님, 전도사님 속담 좀 가르쳐 줘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학교에서 속담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줬단다. 방과 후 아이들은 늘 교회에 들러 숙제를 하곤 한다. 책장에서 「俗談大成」이란 책을 찾아 전해줬다. 잠시 후 아이들은 다시 달려왔다.


“국어사전 좀 빌려줘요.”


낱말 조사는 스무 가지씩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아이는 3학년 전과 책이 없느냐며 묻는다. 교회 ‘샛별문고’ 책장을 찾아 봤지만 국어사전이 없다. 원래 없었는지 누가 빌려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할 수 없이 「새 우리말 큰사전」 두 권을 뽑아들고 교회로 갔다. 아이들과 둘러 앉아 숙제를 같이 했다. 잘 모르는 낱말을 찾아 아이들은 밑줄을 긋고, 두꺼운 사전을 뒤져 뜻을 찾았다.


어느새 스무 개, 어렵게만 생각했던 숙제를 생각보단 쉬 마친 아이들은 해방감에 좋고, 오랜만에 낱말 찾기를 하며 아이들과 어울린 난 그 어울림이 좋았다.


숙제마친 녀석들은 밤을 딴다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가벼운 발걸음, 오늘 아이들 가방마다엔 잘 익은 밤알들이 가득 할게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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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그리운 건



《갈수록 그리운 건 샘물이지 싶습니다.》
오전 내내 뚝딱거려 작업을 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연장과 나무궤짝, 그리고 주변의 각목조각들을 주워 모아 놓고 톱으로 쓸고 망치로 박고 지난번 쓰다 남은 페인트를 칠하고, 제법 분주하게 돌아쳐서야 서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교회 수도를 팔 때 교회 입구 쪽으로 수돗가를 만들었다. 길가 쪽인지라 마을 분들 일하러 지나가다 혹 목마르면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땀이라도 시원하게 씻으시라 일부러 위치를 그곳으로 잡았다.


대개가 원래 의도대로 쓰이지만 때때로 엉뚱하게 쓰이기도 한다. 몇 안 되는 동네 꼬마 놀이터(소꿉장난하며 쌀을 씻는 곳이다) 되기 일쑤고, 좀 큰 녀석들은 물싸움을 하기도 하고, 아예 호스로 물을 끌어 농약을 주기도 하고, 동네에 큰일 있을 땐 큰일에 필요한 물을 대기도 한다. 이번 여름엔 동네 할아버지가 당신네 마른 논에 물을 댄다시며 하루 종일 물을 틀어 놓은 적도 있다. 쉬 바닥나는 동네 물 사정에 비해 다행히 물은 넉넉해 그 어떤 쓰임새를 두고도 물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 봉사하기 위한 수도이기에 쓰임새가 무엇이건 싫은 말 안했지만 지나친 사용을 두곤 속상하기도 했다.


작은 나무상자를 만들어 나무 막대기에 박고선 우물가에 세웠다. 그 안에 세수 비누와 바가지를 올려놓았다. 그 옆에 「T」자 형태의 푯말을 세워 ‘갈수록 그리운 건 샘물이지 싶습니다.’라 썼다.


‘정도를 벗어난 사용은 알아서 삼갑시다’라는 속뜻을 어렴풋 헤아려 주었음 싶었다. 어정쩡한 봉사를 한답시고 때로 껄끄럽게 바라보게 되는 내 시선을 고치고도 싶었다.


편히들 쓰십시오. 정말 바라는 건 그거랍니다.
‘갈수록 그리운 건 샘물이지 싶습니다.’란 애매한 말을 두고 선뜻 뜻을 헤아리긴 어렵겠지만 정말 속뜻은 편하게들 쓰시라는 그런 뜻이었다. 자신을 부추긴 선한 의도가 선함으로 이어지기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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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교회 성령운동의 빛과 그림자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1. 9. 18. 08:58

 

 

한국 기독교사에서 성령 이해의 매우 중요한 분수령은 1970년대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령의 역사와 관련한 개인과 교회의 전격적인 변화에 대한 증언이 존재해왔으나,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파장을 이루면서 한국인들의 신앙에 위력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성령운동이었다. 그리고 비기독교 대중들도 ‘성령’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일상적으로 접하게 된 계기가 이루어진 시점이라고 하겠다.

 

애초에는 보수교단에 의한 이단 시비로 신학적 제동이 걸렸지만, 죄의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교인들을 주눅 들게 했던 기존 교단의 엄격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영적 해방감을 신앙인들에게 맛보게 함으로써 성령운동의 파급은 막기 어려운 속도와 강도로 진행되었다. 복잡한 신학적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고, 고도성장의 사회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오는 규격화된 긴장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비정형적인 예배양식을 통해서 해소되었으며, 계층이동의 욕구를 신앙적 기원(祈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한 축복으로 이해했기에 그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확대되었다.

 

새로운 바람

 

이로써 대중들이 신앙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문이 넓어졌다. 억압적인 엄숙주의가 사라지고, 예배의 기쁨이 집단적으로 체험되기 시작했으며, 즉각적인 성령의 권능을 목격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부인하기 어려운 신앙 경험들이 축적되어 갔다. 긴장의 발산이 성령을 강조하는 부흥회에서 고도로 이루어졌고,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여온 울분과 한과 좌절 그리고 성공을 향한 기원이 거침없이 쏟아졌으며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성령의 존재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특히 육신의 병으로 고달프게 시달렸던 이들은 성령의 체험으로 종교적 열정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감을 상실했던 사람들도 성령충만의 절정을 경험하면서 생활의 자세가 달라졌다. 이로써 순복음교회의 오순절운동은 한국 기독교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고, 기성 교단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성령운동의 장력 내에 있는 사람들의 밝고 기쁜 표정은 기성교단의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던 경건주의의 딱딱한 표정과 대조되었다.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활짝 열린 이 오순절 신앙의 현장은 한국사회의 상류계층이 주도하고 있던 교회의 정돈되어 있던 기존 질서에 일대 충격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영적 에너지를 받아 가지게 된 사람들이 교회를 비롯해서, 한국사회의 약동하는 변화에 자신을 실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오순절 운동을 근거로 한 교회들의 급격한 성장은 이러한 기세에 힘입었다고 하겠다. 이제 한국 기독교에서 성령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고, 기성 교단들도 하나둘씩 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순복음교회는 더 이상 이단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성령운동은 그 동안 다분히 정죄주의적이고 율법적인 분위기가 지배해오던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다. 무엇보다도 신앙인들에게 은혜를 사모하게 만들고, 성령의 체험을 통해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은 한국사회의 역량을 높이는 데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한 셈이다. 더욱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성령운동은 그 카리스마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기쁨을 줌으로써 이 운동에 속한 사람들에게 대단한 활력을 주었다. 한마디로, 한국사회를 휩쓴 성령운동은 기성 교단의 교조적 질서와 틀에 묶인 사고에 대한 내재된 반발이 점화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믿음으로부터 오는 개인적 자유와 성취의 차원을 새롭게 열었다.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 기독교를 ‘정죄로부터 용서로’, ‘심판으로부터 복 받음으로’, 그리고 ‘내세로부터 현세로의 삶으로’ 그 신학적 담론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세속의 성공주의와 결합한 성령운동

 

그러나 ‘세상 것에 대한 거부’라는 말로 표현되는 비정치적 접근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성장주의와 결합된 신앙적 기원이 서로 모순됨이 없이 ‘오순절운동’을 떠받쳐 나감으로써, 중앙집권적 개발시대에 대한 순응주의를 길러나갔다. ‘열심히 땀 흘려 살아보자’는 구호가 전면적으로 지배했던 시기에 이 같은 신앙의 유형은 잘사는 것이 결코 종교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 안에서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이른바 ‘적극적 사고방식’의 출세주의를 촉진시키는 신학적 기반이 된 셈이다.

 

이것은 자연히 신앙인들의 사회적 관심에서 정치적 문제제기의 비판 능력을 거세하면서, ‘개인의 내면적 평화와 계층 상승의 기대감’을 하나로 묶어 매우 이기적인 경제주의에 매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잘못 건드리면 탄압이 예상될 수밖에 없는 정치의 영역은 신앙의 이름으로 퇴각시키고, 이런저런 사회적 번뇌로부터 탈출하도록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이루는 가운데 현세의 물질적 성취로 만족을 얻는 방향으로 신앙인들의 내면을 조성해 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문제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게 만들었고, 현실의 모순에 대하여는 외면하거나 침묵하게 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내가 설정한 개인적 성취의 목표에 신앙의 힘이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영적 도구처럼 인식되어 갔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위치의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령이라는 이름의 ‘도깨비 방망이’였던 셈이다. 그런 교회의 대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빈부격차의 사회경제적 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빈곤해져 갔고, 풍요가 낳은 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사람들이 이토록 헤매게 되기까지 아무런 힘있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배태된 성령운동의 주류는 결국, 한국의 역사를 바르게 잡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세우는 일과는 거리가 있는 신앙심으로 위장된 ‘이기적 자기실현의 동력’이라는 반(反) 그리스도적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나아가 교회의 양적 규모가 비록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진실된 양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이미지가 굳게 서있다면 그 종교적, 사회적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소수의 의인’일지라도 이들이 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그동안 쌓여 왔다면 개신교의 위상은 사뭇 달랐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여러 가지로 어지럽고 위태한 시대에 교회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매우 귀중한 종류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 던질 ‘소수의 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대중들의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구미에 자신을 맞추어나가는 쪽으로 시장의 논리에 따른 ‘영업’을 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미지를 주고 말았다. 그래서 영업이 잘 되는 비결을 배우려는 식으로 양적 규모에 매달리는 교회성장론이 판을 치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그 사회적 진로에 대한 깊이 있는 발언을 하는 힘은 사라지고 마는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아, 그 교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숙연해지고 양심이 뜨거워지며 무언가 나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 하는 감동을 제대로 줄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로 접근해본다면, 개신교 교회의 전반적인 위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마는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하고 만다.

 

해방의 영, 은혜의 영

 

기독교 신앙의 성령 이해는 나사렛 예수의 성령이해가 그 근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그밖의 다른 것은 어떤 인위적 목적에 반응하는 사회심리적 조합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잠재하고 있는 영적 감각과 사회적 요구가 결합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종교심리적 반응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영은 본질적으로 그 영이 임재한 사람에게 그가 세상에서 해야 할 ‘해방의 사명’에 눈뜨게 한다. 이 차원이 존재하지 않은 성령이라는 이름의 종교심리적 현상은,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말로 위장하고 은폐했든지간에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기주의에 봉사하게 될 뿐이다. 누가복음 4장의 이사야서 인용의 대목은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셨을 때 일깨워지고 드러나는 신앙의 지향점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모든 행적과 사역이 자신의 인간적 의지나 결단 또는 이념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라고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영이 그를 움직이고 있음을 먼저 선언하고 있다. ‘나를 보내셔서’라는 말에서처럼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앞으로 하게 될 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시려는 일임을 못박고 있다. 하여, 성령이 임재한 자의 모습은 자신의 소욕에 따른 행동방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 세상에 역사하시려는 바를 대리하는 자로 부각된다.

 

성령은 자신이 성취하려는 바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각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취하려는 바에 성령의 인도에 따라 쓰임받는 자라는 인식이,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 성공주의와 결합된 성령주의 운동’과는 완전히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고자 하며 또 할 수 있는 것을 극대화시켜주는 영적 능력으로서의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내 안에서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보혜사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은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이기주의와는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인간 자신은 그 안에서 소멸되고, 하나님의 뜻이 그 모든 행위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 한 바와 통하는 차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창조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내가 소멸되지만 사실은 새로운 내가 다시 생기는 것이며, 그 새롭게 생기는 나는 이전의 나와는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성령운동의 본질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따라서 일차적으로 그 인간의 내적 욕망과 성령이 투쟁하는 단계를 통과하게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의 광야시험’이 사단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이루어졌다고 증언된 점은 바로 이를 뜻하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생기도록 만드는 인간 내부의 일체의 것과 대결을 벌이며, 성령이 임한 사람은 기존의 가치관이 졸지에 붕괴하는 충격과 혼돈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을 고뇌하도록 만드는 일이며,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절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껏 인식하지 못했던 역사와 사회의 이면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며,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다가와 온몸을 이 작업에 내어맡기는 자로서의 전격적 변모를 겪게 된다. 말하자면, 나사렛 예수의 메시아적 메시지가 내포하고 있는 작업의 성격은 자기 중심적 관점에서는 도저히 주목할 수 없었던 현실이 그 시계권(視界圈) 내로 포착되어 사명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의 증언이다.

 

그가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에게 기쁜 소식과 자유와 다시 보게 됨, 그리고 해방과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맞딱뜨려야 할 일은 이들을 가난하게 하고 포로 되게 하며 눈멀게 할 뿐만이 아니라 억누르고 가두는 세력과의 대결이다. 그런 세력의 존재가 있지 아니하고는 이들의 현실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절로 가난하고, 저절로 포로 되고, 저절로 눈멀며, 또한 저절로 억눌린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은가? 나사렛 예수께서 그의 선교사역 과정에서 바리새파, 대제사장, 율법학자 등과 무수한 충돌을 겪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대결의 현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의 임재가 성령의 충만을 통해 파견자에게 주는 힘의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파괴하는 힘과의 대결에 요구되는 ‘용기와 지혜’인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존재는 세상 대세의 요구에 응하여 그에 필요한 능력을 극대화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그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의 면모를 대조적으로 증언해 주는 용기를 지니며, 그 용기가 인간에게 출로의 지혜를 주는 대안적 능력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자의 삶은 기본적으로 예언자적 성품을 가지고 있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여론에 이끌려서 자신의 입지를 팔랑개비처럼 상실해버리는 자가 아니라, 핍박과 비방이 있다 해도 그에 굴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삶을 가난하게 만들고, 무언가에 포박되게 하며, 진실에 눈 어둡게 하는 질서와 세력을 세상에 폭로해 버리고, 이들에게 인간이 자신을 내어주지 않도록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작업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풀려난 존재들이 만나게 되는 기쁜 현실, 은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이 땅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열어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한 개인의 삶을 죄와 탐욕으로부터 내적인 해방을 실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회와 역사를 뒤덮고 있는 억압을 철거하는 작업에 인간이 위엄 있게 나서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인간과 사회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채워져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억누르며 속이고 가두는 일이 없는 ‘새 하늘 새 땅의 감격’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운동의 본질’은 당연히 그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일체의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죄와 억압의 문제를 대결의 중심에 놓게 되며, 정치·경제·문화·사회 모든 면에서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도록 성령이 임재한 인간을 역동적으로 바꾸고 활약하게 만들어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번창해 가는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타락과 경제적 부패, 그리고 문화적 세뇌와 사회적 무기력을 바로잡아 나가는 능력이 극대화되어 가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성령운동은 좋게 말해서 역부족이거나 또는 분명한 거짓이다. 그것은 결국 가난한 자에게 허망한 세속적 환상을 공급하고, 포로 된 자를 포로의 위치로 그대로 고정시키며, 눈먼 자에게 눈이 감겨 있어도 행복을 느끼라고 세뇌하며, 억눌린 자의 마음에 복종의 윤리를 심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맞서서 무너뜨리려 했던 일체의 세력을 돕는 하늘에 대한 반역을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성령은 실로 우리들 안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 곳곳에서 그 아름다움을 펼쳐낼 수 있도록 하는 권능을 이루어내고, 그 위에 하늘의 위엄과 섭리의 역사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역사적 책무와 사회적 사명의 차원에 대한 눈뜸으로 연결되고, 그 실천의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하늘의 생명력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를 소유한 자에게 ‘이김’이 약속되어 있다.

 

오순절 운동의 성서적 모델

 

그러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순절운동의 성서적 모델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2장 1-4절은 ‘방언’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성령충만이 드러내는 현상의 본질적 성격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의 변화’이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장악하는 힘을 가진다. 말로 성처를 입기도 하고, 그로써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에게 이 말이 갖는 생명력의 차원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것을 성서는 증언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사도행전의 대목에 등장하는 ‘방언’은 일상의 차원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영적 언어가 아니라,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능력을 지닌 언어이다. 그것은 언어의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에 도달하는 힘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그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의 성품은 본문에서 바람과 불길, 하늘의 소리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첫째, 바람에 휩쓸려 가는 소리가 아니라, 그 ‘바람의 진원지’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한 자의 말은 그야말로 바람을 몰고온다. 그리고 그 바람은 세차다. 낡고 악한 것이 그 바람의 위력 앞에서 ‘흩날리는 겨’가 되는 것이다.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권능이 그 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에 충만한 자의 모습은 ‘거대한 폭풍’으로 이 시대와 마주하는 느낌을 준다. 그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세월의 바람 속에 묻히지 않고, 바람 자체가 되어 역사의 풍향을 바꾸고,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놀라움을 가져오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자가 있는 자리는 그래서 언제나 활기가 차고, 무언가 기대가 있게 되며 변화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몰고오는 기운이 있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던지는 말 한마디가 시대의 정곡을 찔러 전세(戰勢)를 뒤바꾸는 환호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면 그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둘째, 그 말은 불길이다. 불같은 뜨거움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말 속에서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논리를 뛰어넘는 이 감동의 능력이 그 말 속에 있지 않을 때 우리의 선교는 실패한다. 그래서 이 불은 작지만 온 세상을 삼키는 데에도 부족하지 않은 담대한 기세를 가지고 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말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길을 느낄 수 없는 말은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서 이끌어내지 못한다. 불이 된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우리에게 소유하게 하는 하늘의 은사이다.

 

셋째, 이 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이 아니다. 자신을 앞세우는 언어가 아닌 것이다. 지식과 경험이 성취하는 일정한 수준에서 생산되는 언어가 아니라 하늘의 기운을 담아내는, 그래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성령에 충만한 말의 본질을 결정하는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말 속에 당당함과 겸손, 권위와 온화함,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지 못하는 지혜와 사명을 명료하게 뿜어낸다.

 

이것은 모두 결국 ‘부활의 생명력’이 그 안에 간직되어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런 세 가지 기본 성품을 말에 담아 하늘의 힘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능력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우리의 말은 그와 다를 바 없이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여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언어가 오염된 이 혼탁한 시대에

 

오늘날, 말은 얼마나 힘을 잃었는가? 말은 오염되었고 독기를 뿜고 있으며, 도리어 세상의 온전한 변화를 가로막고 있지 아니한가? 말은 신뢰를 상실했고, 아름다운 창조보다는 악의적 파괴에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자의 말은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서 감사를 가르치며, 무슨 일을 만나도 인격을 보호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온전히 교통시킨다. 그래서 그 마음이 짓눌리는 일이 없게 하며, 위로할 자를 위로하고 고칠 자를 고친다. 또한 하늘의 뜻을 세우게 하며, 그를 위해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바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폭력을 막아내고 형제애적 연대를 강화하며 작은 가능성이라도 격려하며 비난과 추궁의 언어를 우리의 삶 속에서 추방한다. 인간에 대한 관대함을 배우게 하며, 역사의 희망을 기른다. 그래서 인류가 하나 되는 기쁨을 쉬지 않고 선언하며, 아무리 멀리 살아 있어도 그 뜻이 서로간에 통하는 그런 감격을 우리 안에 빛으로 창조한다.

 

그것은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를 새롭게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질서를 인간의 내면에 심고, 그로써 온 인류의 달려갈 길과 그 달려갈 힘을 함께 공급하는 그런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성령은 그래서 우리에게 ‘존재의 새로운 집’을 만들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준비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했듯이, “성령의 힘으로 충만한 우리의 언어”는 오늘 혼돈과 흑암의 소리가 되어 희망의 빛을 창조해나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들의 정신과 영혼을 기운차게 일으켜 세울 것이다.

 

이 혼탁한 시대에 바로 그런 성령운동의 개시(開始)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심호흡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영적 존재로서의 위엄을 가진 선택된 자들이 아닌가? 성령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차원의 자존심으로 역사를 바꾸어 나가는 일에 허락된 하나님의 권능이니 이 좋은 것을 열렬히 사모하여, 우리 모두 ‘말씀의 생명력’이 풍부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이 무한한 성령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이기주의의 늪에 빠진 오늘의 현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

 

 

졸저, <밀실에 갇힌 예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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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뜻



“대통령도 밥 묵고 사는 기여. 아무리 돈 많아도 돈 먹고는 못 사는 기여.”


도로에 벼를 널고 계신 동네 할아버지. 추곡 수매가에 대한 부총리의 대답을 어젯밤 뉴스를 통해 봤다시며


“지덜이 우리가 농사 안지면 뭘 먹구 살려구.” 하며 화를 내신다.

뭐가 어떻게 남는 건지 쌀 남으니 쌀 막걸리 만들고, 논밭이나 줄이자고 하는 나라님들 고견을 두고, 한 촌로(村老)의 말씀이 무섭다.


그 말씀 속에 스민 하늘 뜻이 두렵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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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



兄,
신집사님 댁에 보일러를 놓았습니다. ‘눈구뎅이 빠지며 나무 가쟁이 꺾을’ 또 한 번의 ‘서러운 겨울’을 앞두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兄의 믿음의 힘이 컸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 드린 것이라 당연하다 겸손하게 말하지만 어찌 그 당연함이 쉽기만 하겠습니까.


보일러를 놓은 방은 작은 한 칸 방입니다. 어린 아들 데리고 둘이 살아가는 좁다란 방입니다. 그 좁은 방에도 서러움은 많고, 한 겨울 주인처럼 찾아드는 추위를 두곤 생각도 많았는데, 이젠 그런 눅눅하고 무거운 마음도 많이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 한 달 일한 품값 받으면 밀린 빚 갚고, 연탄 좀 들여 놓을 수 있고, 남은 시간 또 일하면 겨울 지낼 양식 장만은 가능할 거라시며 신집사님은 모처럼 든든하십니다.


작은 키에 움츠린 어깨, 왠지 안쓰러웠던 집사님 걸음에 모처럼 활기 넘쳐흐릅니다. 늘 그렇지만 이렇게 장만된 보일러는 좁다란 방 한 칸이 아니라 어렵게 살아가는 집사님의 서러운 생을 데우지 싶습니다.


그게 믿음의 힘이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兄.
그 나눔이.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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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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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 하루도


새벽 4시 20분. 어김없이 자명종이 웁니다. 날랜 벌래 잡듯 울어대는 시계를 끕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습니다. 새벽공기 차가운 마당에 나서면 그제야 잠이 달아납니다. 가을 새벽하늘 별들은 시리도록 맑습니다. 밤새 이슬로 씻은 듯 깨끗합니다.


캄캄한 예배당, 오늘도 아무도 없습니다. 제단 쪽 형광등 2개와 십자가 네온에 불을 켭니다.


새벽종을 치기 전 늘 망설임이 지납니다. 여린 마음 탓입니다. 소리를 낮춰 종을 칩니다. 새벽 어둠속으로, 고단한 잠자리로 종소리는 달려갑니다.


잠시 후 개 짓는 소리, 그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들어서는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


대개는 둘, 간혹 셋이서 예배를 드립니다. 벼 베는 철, 납덩이 같이 무거운 몸 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잠자리에서라도 기도로써 하루의 문을 열고자 한 서로의 약속을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지독한 독설과 저주, 새벽부터 그런 말씀 대하기가 꺼림칙하기도 하지만 그런 독설과 저주 밑엔 언제나 예레미야의 눈물이 있습니다. 대언자(代言者)의 안쓰러운 고뇌가 무딘 마음을 흔듭니다.


그렇게 짧은 예배를 마치고 제단에 무릎 꿇으면 말을 더듬게 됩니다. 말(言) 너머 계신 그 분께 말(言)로써 나아가는 게 늘 어렵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그리고 일들. 기도의 자리, 그 떠올림도 기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쉽게 발이 저리고 마음은 짧습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며 아직 깨지 않은 동네를 보면서야 뒤늦은 인사를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평안하십시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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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잎

 

 


푸른 하늘
길 없는 길을

하얀 뭉게 구름
흘러가는 가을날

푸른 무화과잎
소리 없는 소리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직은 뿌리가 깊어

손인사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릴 뿐

눈물처럼 떨군
가을잎 한 장

가을 바람이 좋아
얼싸 안으며 돌아

발길에 부대끼다
흙먼지로 돌아가도

이 땅이 좋아
푸른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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