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posted by

주님, 오늘 하루도


새벽 4시 20분. 어김없이 자명종이 웁니다. 날랜 벌래 잡듯 울어대는 시계를 끕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습니다. 새벽공기 차가운 마당에 나서면 그제야 잠이 달아납니다. 가을 새벽하늘 별들은 시리도록 맑습니다. 밤새 이슬로 씻은 듯 깨끗합니다.


캄캄한 예배당, 오늘도 아무도 없습니다. 제단 쪽 형광등 2개와 십자가 네온에 불을 켭니다.


새벽종을 치기 전 늘 망설임이 지납니다. 여린 마음 탓입니다. 소리를 낮춰 종을 칩니다. 새벽 어둠속으로, 고단한 잠자리로 종소리는 달려갑니다.


잠시 후 개 짓는 소리, 그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들어서는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


대개는 둘, 간혹 셋이서 예배를 드립니다. 벼 베는 철, 납덩이 같이 무거운 몸 일으키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잠자리에서라도 기도로써 하루의 문을 열고자 한 서로의 약속을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지독한 독설과 저주, 새벽부터 그런 말씀 대하기가 꺼림칙하기도 하지만 그런 독설과 저주 밑엔 언제나 예레미야의 눈물이 있습니다. 대언자(代言者)의 안쓰러운 고뇌가 무딘 마음을 흔듭니다.


그렇게 짧은 예배를 마치고 제단에 무릎 꿇으면 말을 더듬게 됩니다. 말(言) 너머 계신 그 분께 말(言)로써 나아가는 게 늘 어렵습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들, 그리고 일들. 기도의 자리, 그 떠올림도 기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쉽게 발이 저리고 마음은 짧습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며 아직 깨지 않은 동네를 보면서야 뒤늦은 인사를 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도 평안하십시오.’

-<얘기마을> 1989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뜻  (0) 2021.09.18
형에게  (0) 2021.09.17
주님, 오늘 하루도  (0) 2021.09.16
그대 앞에 내 사랑은  (0) 2021.09.15
  (0) 2021.09.14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  (0) 2021.09.13
posted by

가을잎

 

 


푸른 하늘
길 없는 길을

하얀 뭉게 구름
흘러가는 가을날

푸른 무화과잎
소리 없는 소리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직은 뿌리가 깊어

손인사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릴 뿐

눈물처럼 떨군
가을잎 한 장

가을 바람이 좋아
얼싸 안으며 돌아

발길에 부대끼다
흙먼지로 돌아가도

이 땅이 좋아
푸른 하늘처럼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 삼  (0) 2021.09.27
용담정 툇마루  (0) 2021.09.26
가을잎  (0) 2021.09.16
말 한 톨  (0) 2021.09.09
오늘의 잔칫상  (0) 2021.09.0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0) 2021.09.06
posted by

‘염려’없는 노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3)

 

 

‘염려’없는 노동

- 전집 4권 『성서 연구』 「기독신자의 처세 원리」 -

 

 

 

 

임금피크제를 놓고 노사정간 의견조율이 안된다고 한참 시끄러웠다. 극적 타결을 보았다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결국 앞으로 차차 의논하며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가자는 데‘만’ 합의를 한 모양이다. 그럴 일이다. 서로 “네가 양보해라”라고 주장하는 협상테이블에서 무슨 실질적인 합의가 나오겠나. 직업안정성이 있는 정규직이 날로 줄어드는 이 마당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정규직 ‘부모’ 세대에게 ‘자녀’ 세대인 청년들의 고용창출을 위해 봉급을 깎자는 정부와 기업의 감성팔이는 생계형 노동현장을 살아가는 일반 시민정서에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만큼 ‘깎아서’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장되는’ 어엿한 직장을 마련해준다면 모를까, 결국 더 싼 값에 유동적으로 대체가능한 임시계약직을 늘려놓고 ‘청년일자리창출’이라고 ‘아웅’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실은 그간의 진행방향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농후하다’).

 

 

더구나 함께 논의되는 ‘일반해고 규정’은 임의대로 마음껏 해고하는 수퍼갑질을 행사할 법적 권한을 기업 경영진들의 손에 쥐어주기 십상이다. 화가 난 서민들의 댓글은 한결같다. 우선 국회의원부터 임금피크제 하자, 일반해고규정은 공무원부터 적용하자는 주장부터, 일 안하고 월세로 펑펑 쓰고 사는 건물주들에게는 왜 고통분담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주장까지! 결국 성실한 노동으로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서민들과 노동형 중산층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읽혔다.

 

 

 

 

 

노동이 더 이상 정당하고 합당한 대가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세상! 숨 쉴 시간조차 없이 달려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이제 자조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서열화한다. 바야흐로 신(新)신분제의 도래다. 부모가 누구인지, 아니 할아버지가 어떤 경제적·정치적 ‘신분’인지가 나의 미래를 보장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적으로 떳떳하게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하라’고 외치던 양심적 청년들에게는 구금과 수천 만 원의 벌금형이 행사되고, 분명히 ‘불법’인 상습마약복용은 힘 있는 기득권층의 자제라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포된다. 마치 오래전 봉건제 사회처럼 이제 ‘꿈과 희망’이라는 미래보장형의 단어들은 ‘잘난 부모’ 만나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난 아이들에게만 주어져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성실히 살아보겠다고 200만원~3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밤낮없이 뛰는 서민 가장들의 노동의 대가를 이리저리 융통하여 경기를 살려보겠다니... 그야말로 벽돌 밑장 빼서 위에 얹는 꼴이지 뭔가. 결국은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노동, 혹은 과대평가된 노동의 금전적 대가에 대한 합리적 세금 부과가 먼저라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생각인데, 하필 의사결정권자들이 대부분 ‘무노동과 과대평가된 노동임에도 천문학적 대가를 받는’ 경우에 해당하다보니 그쪽 영역은 건드릴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농담이 나올까. 강남 몫 좋은 곳에 건물 몇 채 가지고 있는 집안 자손이면 그걸로 이번 생은 ‘할렐루야~’다.

 

 

이런 시절을 살아가면서, 성서적 가치를 이 땅에서 살아내고자 모인 공동체인 교회가 ‘대안’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노동 없는 부, 아니 노동의 윤리성조차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헌금 많이 내는 교인이 경건한 교인’이라는 획일적인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 강단이 여전히 많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예수의 산상수훈은 이렇게 ‘교회헌금을 많이 하라’로 등치되며 애용되는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한다. 부자들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구조조정을 당하여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신자들에게조차 ‘걱정말라’고, ‘믿음의 분량으로 헌금을 하면 결국은 잘 살게 된다’고 설득하는 설교에는 여지없이 이 본문이 등장한다.

 

 

정말 그럴까? 새들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신 예수의 설교(마태복음 6장, 누가복음 12장)는 있는 돈 탈탈 털어 교회에 헌금을 하면 앞으로 살아갈 염려는 붙들어놓아도 된다는 메시지인가? 이 본문에 대한 김교신의 묵상을 나누어 본다.

 

 

… 염려라는 원어 merimnao는 분파, 분배 등의 뜻으로부터(고린도 전서 1. 12-13 및 동 7. 34 참조) 염려, 초려 등의 뜻이 되었다. 땅과 하늘,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 마음을 이분(二分)하는 일이 곧 가장 증오할 일이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22절에 네 눈이 “성하면”이란 희랍어의 haplous 즉 ‘단일(單一)’이란 뜻이므로, 이 구는 ‘네 눈이 단일한 목적을 향하면 전신이 밝을 것이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 2개 이상의 목적을 관망하는 눈은 ‘흐린 눈’이요, 하나님이 꺼려하시는 것 중에 ‘두 마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음은 십계명의 제 1절을 보아도 잘 알 것이다. … 요컨대 믿으려거든 단일하게 믿으라. 마음이 이분(二分)하는 거기서부터 벌써 신앙이 아니요 헛된 일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사람이 어찌 먹고 사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요즘같이 아사(장기적비고용상태) 아니면 과로사(1인3역이 요구받는 노동혹사상태)를 할 경쟁적 직업 환경에서 어찌 ‘염려’가 없을까? 김교신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이 말씀이, 하늘만 쳐다보면 다 해결된다는 맹목적 신앙도, 있는 돈을 다 털어 교회에 헌금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신다는 투자성 신앙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실한 노동은 게으르면 안 될 일이다. 다만 ‘두 가지 마음’을 품는 ‘염려’가 헛된 일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일이라는 거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그것에 궁극적 마음을 두고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고 눈을 ‘흐리게’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결과에 대한 염려는 불신앙이라는 말이다. 의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마음으로 성실히 제 일을 해낸 뒤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행여 ‘먹고 살지 못하게 될까봐’(소위 ‘잘릴까봐’) 일하면서 불의와 타협하고 억울한 사람들 짓밟지 말라는 말이다.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여 더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바라는데 비중을 두고 투자하듯 헌금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노동 없는 부가 양산되고 ‘금수저’라고 찬양받는 이 시절에 대한 신앙적 물음 없이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신자의 눈을 ‘흐리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하였다. …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과 ‘근로 절검하라’는 교훈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신종의 생활에 있어서 그날그날에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는 받은바 천직에서 분골쇄신으로 자자근로하여 ‘아버지가 지금도 노작하시니 나도 노작하노라’(요한복음 5장 17절)는 그 아버지를 초사한 자녀의 생활이 자연히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하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두려워해야 한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데”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같은 삶이라고 여호와를 찬양할 일이 아니다. 목숨을 일각도 더할 수 없는, 하는 만큼 해 보았자 들의 꽃만큼도 아름답거나 영화롭지 못할 옷과 음식을 위한 ‘염려’(두 마음을 품음)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본문의 핵심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성스럽다.’ 성(聖)이 무엇인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다. 힘 있고 돈 있는 특정한 권력층이라 해도 인간이 마음대로 소유선포를 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성’스러운 것이다. 성서는 그 처음부터 노동하시는 신(神)을 고백한 텍스트다. 이 성스러운 노동은 모든 인간이 누려할 권리이며 의무이다. 많은 이들에게 성실하게 노동할 기회를 박탈하는 자, 또한 일하지 않고 입고 먹고 마시려는 자, 심지어 그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두려움으로 마태복음 6장을 다시 읽어볼 일이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