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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41

소에게 말을 걸다 오후에 작실에 올라갔다. 설정순 성도님네가 잎담배를 심는 날이었다. 해질녘 돌아오는 길에 일을 마친 이속장님네 소를 데리고 왔다. 낯선 이가 줄을 잡았는데도 터벅터벅 소는 여전히 제 걸음이다. 종일 된 일을 했음에도 싫은 표정이 없다. 그렇게 한 평생 일을 하고서도 죽은 다음 몸뚱이마저 고기로 남기는 착한 동물. ‘살아생전 머리에 달린 뿔은 언제, 어디에 쓰는 걸까?’ 커다란 소의 눈이 유난히 착하고 맑게 보인다. 알아들을 리 없지만 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소에게 말을 건넨다. ‘소야, 난 네가 좋단다.’ 소는 여전히 눈을 껌벅거릴 뿐이었지만. 1987년 2021. 8. 6.
어떻게, 어떻게든 된담 “나무하러 가는 사람 왜 불러요?” 저만치 산으로 나무하러 오르다 잰 걸음으로 뛰다시피 내려오신 신집사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환한 얼굴, 마음이 그런 게 아니다. 체구에 맞게 만든 작은 지게를 마당에 세워 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2월이 다가오자 집사님은 고민이 된다. 2월 1일부터는 용암 쪽으로 일을 나가기로 했는데 갈까 말까를 망설이는 것이다. 비닐하우스 재배하는 곳에 ‘취직’을 한 것이다. 한 달에 세 번 쉬고 점심은 각자 지참. 그리고 월급은 18만원이다. 오가는 차비 빼고 나면 뭐 그리 크게 남는 게 없지만 그래도 고정된 수입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것만 생각하면 취직을 하는 게 집에서 품 파는 것보다야 열 번 편한데, 문제는 땔감이다. 연탄도 기름보일러도 없기 때문에 천생 나무를 해서 때야 .. 2021. 8. 5.
창립예배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오늘 우리가 모인 이 자리를 두고 분명 거룩한 땅이라 이름 부를 것입니다.’ 끝내 목이 멨다. 창립예배를 드리며 인사말을 하는데 가슴이 떨렸고 빈말은 삼가고 싶었다. 먼 길을 달려와 마당 한가운데 둘러선 사람들. 무엇보다도 불의의 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실명한 창식이 와준 게 고마웠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그려오던 목회의 첫발. 오늘은 1987년 3월25일 수요일, 눈바람 불고 무지 추움. 이정송 감리사님과 유상국 목사님의 뒤를 이어 ‘기독교대한감리회단강교회’라 쓰인 현판을 작은 사랑방 모퉁이에 힘차게 못질을 한다. ‘이제 시작이다.’ 안쓰러운 표정을 남기고 모두들 돌아갔지만 외롭진 않았다. 삶의 터전은 다르지만 우린 모두 하나님 품속에서 사는 거니까. 난 또 이곳에서 새로운 이.. 2021. 8. 4.
첫 목양지로 가는 길 3月25日 이른 아침, 원주로 향하는 영동 고속도로엔 춘삼월에 어울리잖게 세찬 눈발이 휘날렸다. 이따금씩 비취는 햇살에 현란함을 더한 춘설은 창가보다는 창가에 기댄 가슴으로 부딪쳐 왔다. 첫 목양지로 향하는 빈 가슴이 오히려 든든했다. 내 떠남을 춘설로 기억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고마웠다. 그 길밖엔 없었다. 강원도행이 좌절됐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친구와 몇몇 선배의 얼굴이었다. 지금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여 나는 무조건 떠나야 했다. 나를 위해 다시 한 번 마련된 그 자리로 떠나는데 자존심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한 공동체가 잃어서는 안 되는, 내게 주어진 작은 십자가였다. 황동규의 시구 하나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살고 싶다, 누이여, 하나의 피해자로라도.. 2021. 8. 3.
한 목사님 아니세요? 주일저녁예배를 원주 시내에 나가 드리게 되었다. 성도교회 선교부 헌신예배에 설교를 부탁 받았다.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귀래 쪽으로 나가는데 용암을 지날 즈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 아가씨였다. 묘한 불신이 번져 있는 세상, 믿고 차를 세우는 아가씨가 뜻밖이었다. 아가씨는 뒤편 의자에 앉았다. 아무 말도 안 하며 나가는 것도 쑥스럽고, 그렇다고 뭐라 얘기하자니 그것도 그렇고, 무슨 얘길 어떻게 할까 하고 있는데 뒤의 아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한 목사님 아니세요?” 설마 나를 아는 사람? 룸미러로 뒤의 아가씨를 다시 한 번 쳐다보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 저를 알죠?” 아가씨가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제가 목사님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 버스 .. 2021.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