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송대선의 시편묵상 2021. 6. 11. 08:00

 

시편 73

 

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려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공동번역)

 

容我一申辯(용아일신변)

주님 저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락하소서주님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시편사색, 오경웅)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겪는 이유만 알아도 그 고통이 반감되는 걸 경험합니다. 왜 지금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면 비록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조금은 견딜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꺼이는 아니더라도 피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어 쉬 꺽이지 않을 결심을 다지기도 하지요. 만약 어려움이 자신의 허물로 인한 것이라면 책임지는 자세를 통해 도리어 자신의 그릇을 더 넓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언명이 오래도록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주었겠지요.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며,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한다.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어 뜻과 같지 않게 하나니 이것은 그들의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위해서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그러나 늘 이런 마음과 자세를 품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속상해서 푸념하고 털어놓을 누군가를 찾기도 하지요.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 내 잘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주는 이를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더군다나 그런 어려움이 무고(誣告)로 인한 것이라면 억울한 심정은 참 견디기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열불이 나서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마치 이 세상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니 그 어려움에는 분명 알지 못하는 숨겨진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너무도 억울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터뜨리게 되는 울분은 두서조차 없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억울한데 갈 곳마저 없습니다.

 

찾아갈 곳이 없을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울분을 통하고 자신을 변호합니다. 시편 7편의 전반부의 간구는 마침표 없이 토해내는 시인의 속마음입니다. 정말 제가 저들의 말대로 그랬다고 한다면 능욕을 겪고 흙범벅이 되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헝클어진 마음이 맘껏 솟구쳐오릅니다. 그에 비한다면 오늘의 우리 신앙은 너무 얌전하거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우 상식적인 선에서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그렇게 헝클어진 감정의 토로 가운데 시인에게서 중심이동이 일어납니다. 그의 언어는 자기의 결백에서, 원수들의 모함과 그로 인한 분노에서 점차 하느님께로 옮겨갑니다. 자신의 감정과 언어의 무게가 쏟아지는 만큼 어둠의 기운이 스러지고 이 마구잡이 토로를 받아주시는 분이 자신의 삶과 여정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떠올립니다. 마구 쏟아내던 사람이 점차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모아 이 모든 것을 들으시는 분을 향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의 고통)은 작아지고 이 모든 것을 거두시고 당신의 섭리를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더 깊은 신뢰에로 이끌립니다. 그러니 그는 어느새 흐트러진 자신은 잊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그분을 찬양하려 합니다. 악에 북받쳤던 감정이 가라앉으며 그 가운데서 미더운 분을 향한 고요하고 정제된 읊조림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네 당신이 옳습니다!”

 

그렇기에 자주 터무니없는 억울함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서 가장 억울하셨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되돌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아버지께만 토로하셨던 예수님을 제대로 우리 마음에 모실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뵐 수 있지요. 바로 거기서 그분이 기다리시지요. 그런 자리에서야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욕을 받고 버림받으셔서 구원을 이루는 신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한순간을 제대로 누릴 수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 한순간이 우리 인생 전체를 치유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히브리 시인보다 더한 감격과 찬미를 올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징숑(오경웅)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그분의 마음, 성심(聖心)에 닿는 길fzari.tistory.com/2510

 

그분의 마음, 성심(聖心)에 닿는 길

시편을 순서대로 읽되 한 시편 안에서 마음에 닿는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차례와 관계없이 공동번역과 개역개정, 오경웅의『성영역의』(《시편사색》으로 번역출간)를 중심으로 더 입에 붙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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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없어도 그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fzari.tistory.com/2512

 

아무 말 없어도 그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

시편 1편 6절b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我主識善人〔아주식선인〕 우리 주님 선한 이 알아주신다(《시편사색》, 우징숑)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에 대한 사실적인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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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fzari.tistory.com/2516?category=974810

 

한 말씀만 하소서!

시편 1편 2절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공동번역》) 優遊聖道中 涵泳徹朝夕〔우유성도중 함영철조석〕 거룩한 말씀 새김질하며 거닐며 종일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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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는구나!fzari.tistory.com/2519?category=974810

 

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시편 2편 1-3절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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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fzari.tistory.com/2522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시편 4절 4절에서 시인은 그 난장판의 야단법석에서 하느님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 笑蜉蝣之不知自量(소부유지부지자량)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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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fzari.tistory.com/2532

 

내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시편 3편 1절 吾敵何多(오적하다) 내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시편사색》, 우징숑) 당신께 나아가기로 결심하거나 마음을 다지면 걸리는 것들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 저를 덮치면서 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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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록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fzari.tistory.com/2535

 

그럴수록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3편 4절 竭聲籲主(갈성유주) 온맘과 영혼으로 주님 당신을 부릅니다(《시편사색》, 우징숑) 그러니 그럴수록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렇게 제 속의 결심은 연약하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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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적들을 쳐주소서!fzari.tistory.com/2540?category=974810

 

저의 적들을 쳐주소서!

시편 3편 3절, 6절 그러나 야훼여! 당신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들어 주십니다.〔3절〕 적들이 밀려 와 에워 쌀지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6절〕(《공동번역》) 護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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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fzari.tistory.com/2544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시편 3편 2절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공동번역》 彼無神助 其命幾何(피무신조 기명기하) 하느님이 저를 돕지 않으시니 그 목숨 앗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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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무엇이 인생의 참된 평강인지요fzari.tistory.com/2563

 

정녕, 무엇이 인생의 참된 평강인지요

시편 4편 6절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공동번역》) 衆庶喁喁望 何日見時康(중서옹옹망 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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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fzari.tistory.com/2568

 

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

시편 4편 2절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공동번역》) 嗚呼濁世子 冥頑盍有極(오호탁세자 명관함유극)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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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https://fzari.tistory.com/2580?category=974810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시편 5편 1, 2절 한숨짓는 까닭을 알아주소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모르는 체 마소서(《공동번역》) 鑑我默默情(감아묵묵정) 聆我哀哀號(영아애애호) 침묵으로 말씀드리는 저를 살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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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https://fzari.tistory.com/2588?category=974810

 

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

시편 5편 7절 당신의 크신 사랑만을 믿고 나는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하여 엎드립니다.(《공동번역》) 我欲入主室 暢沾主膏澤(아욕입주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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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https://fzari.tistory.com/2591

 

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

시편 6편 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공동번역》) 祈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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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러지는 춤https://fzari.tistory.com/2597

 

어우러지는 춤

시편 6편 8,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공동번역》) 我泣主已聞 我求主已聽(아읍주이문 아구주이정) 有禱必見納 有感豈無應(유도필견납 유감기무웅)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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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 16: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퇴근 무렵에도 낮 동안 달구어진 지열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걷는 데도 땀이 흠뻑 뱁니다. 농부들은 보리 수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고 사시는 분들의 노동이 때로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다른 이들이 누릴 몫까지 전유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박 나세요’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유행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끌해서라도 도심에 집을 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모르진 않지만, 그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모두가 인정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불안이 불길한 안개처럼 우리 삶을 뒤덮고 있습니다. 불안은 섬뜩한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 홀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우화 속의 토끼 아시지요? 어느 날 토끼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한 알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납니다. 전후좌우를 살필 겨를조차 없이 토끼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여 질주합니다. 숲에 있던 다른 동물들도 토끼의 그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왜 달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기진할 정도로 달린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왜 달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곤 했다지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분주함과 서두름 속에서는 지혜가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책장에서 빼드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에 눈길을 주곤 합니다. 오늘도 그 중에 한 권을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만난 구절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맞서 싸우려고만 하지 않고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자(‘시간은 내 편이다.’라고 믿는 자)는 느림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즐겨야만 한다.”(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석필, p.172)

“천천히 가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것과 당연한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인내심을 가진 자만이 마음을 열고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앞의 책, p.177)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우리는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은 노동이 된다. 시간이 있고 시간과의 전쟁을 잊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앞의 책, p.178-9)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참 한가한 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요? 출애굽 공동체는 천천히 걸어도 한 두어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고, 애굽을 떠난 사람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광야는 출애굽 공동체가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훈련한 수도원이자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철저한 신뢰와 인내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한 분을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벌써 30년 저편의 일입니다.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려 지력을 돋우려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기자는 그 무모한 열정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래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망했지요, 뭐.”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작물들도 크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3년째 될 때부터 조금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산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기자가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망한다면 내 망신인가요? 하나님 망신이지요.” 제가 그렇게 오래 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은 그 고집스러운 농사꾼이야말로 참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시지는 않을 거다. 설사 망한다 해도 나는 망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았으니까.’ 이런 강고한 믿음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고, 지금은 그 뜻을 잇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 저는 아시아권 선교사들의 새벽기도회 모임에서 zoom을 통해 설교를 했습니다. 200명에 이르는 분들이 동참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뜨거웠습니다.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은 물론이고 선교사들이 직면한 다양한 어려움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채팅 창에 올라온 기도 제목을 보며 저는 꽤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빚진 자 되어 이국 땅, 언어와 기후, 풍토와 문화 등 모든 게 낯선 그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속절없이 쓰러진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50분 정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도 유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팬데믹 상황 이후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편협한 성경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예수님을 15명의 선지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지만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전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는 주제이면서도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지만 성심껏 대답하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려 할 때는 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정신으로 사는 이들을 마다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은결든 마음을 깊은 공감으로 다독이고, 그들 속에 있는 존엄함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선교 신학자는 선교를 가리켜 ‘매력의 감염’이라 말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바라보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이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소개하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제가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바로 선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봉사 현장에 가서 겪은 일을 들려준 바 있습니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아버지는 빈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이발 봉사를 하곤 했습니다. 아베가 따라갔던 그날, 공교롭게도 이발기계에 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끼었고, 고통을 느낀 그는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린 아베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베는 아버지에게 뭐하러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봉사할 자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선의가 선의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여전히 그 일을 지속할 힘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는 꽤 오랫동안 비대면 예배를 지속해왔습니다. 6월 20일부터 현장예배를 재개하려 합니다. 감염자가 획기적으로 줄고 있진 않지만, 많은 분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셨고, 교회 안에서의 예방 수칙에 다들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우들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대합니다. 예배당에 고요하지만 마음이 담긴 찬양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6월 1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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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를 좋아하는 그 남자의 이야기


매주 박카스를 사러 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형이다. 그는 한적한 강가에서 낚시 줄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 손녀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신기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30년 하루하루를 신발이 닳도록 성실히 일했고, 아픈 동생과 삶을 함께 해 왔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첫 인상은 50대 후반의 앞머리가 벗겨진 평안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는 제조업공장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며, 30년 넘게 함께 산 아내는 여전히 곱고 다정했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했던 동생은 좀 마르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고 무사히 자녀들을 결혼시켰으며 잘 웃었다. 남자는 인생에서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남자에게 작은 욕심이 있다면 더 늙기 전에 아내와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했던 남자의 아들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제 결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두 살배기 딸의 아버지인 아들은 뇌졸중으로 인해 반신마비가 왔고, 오랜 시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재활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젊은 아들은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은 좌절과 우울감에 빠졌다. 아들의 마음은 조급했지만 아들의 몸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남자는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와 손녀를 앞에 두고 자신의 힘든 마음을 내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는 혼자서 아픔을 삭혀야 했다. 몇 달 후 아들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아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과 하혈을 했고, 병원에서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은 후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 나이를 먹어도 새색시처럼 고왔던 아내는 몇 달 만에 십 년 세월을 삼킨 것처럼 쇠약해졌다.

그리고 또 몇 달 후 남자의 동생은 그에게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형! 지난번에 둘째가 해준 종합검진결과가 나왔는데 나 위 암이 재발했데.” 


동생은 계속 말했다. “형, 걱정 마! 미리 건강검진 하는 바람에 알게 된 거라서 암이 아주 작데. 간단하게 수술만 받으면 나을 수 있데 . 다행이지 뭐.”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버리는 동생 앞에서 찡그리고 싶어도 찡그릴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동생은 10년 전처럼 다시 위암 수술을 받았고, 위의 대부분을 절제했다. 아내와 아들과 동생이 함께 일하던 공장에 이제 남자와 직원 몇 명만 남았다. 

 


남자는 가족이 함께 해 오던 일들을 혼자서 감당한다. 남자의 양말은 젊은 시절처럼 다시 땀에 젖었고 남자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젊은 시절처럼 박카스 한 병으로 하루의 피로를 해결하기에는 이제 그의 몸이 젊지 않다. 하지만 남자는 울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으며 여전히 묵묵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툭 말을 내뱉고 나니, 뻔한 상황에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도 그는 피곤한 베인 얼굴로 동생처럼 순하게 웃었다. 남자가 내게 대답했다.  


“그냥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 생각해요. 무사히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면 또 내일을 지켜낼 수 있길 바라면서요. 힘들지만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내 아들과 내 동생이 돌아올 곳이 있거든요. 내 아들이 돌아올 곳이 있어야 내 아내가 불안하지 않거든요. 그들을 위해 나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요. 나 혼자 일하기 힘들다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를 채워 버리면 그들이 돌아 올 곳이 없잖아요. 지금 내가 할 일은 내 아들과 내 동생이 돌아올 곳을 지켜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포기하거나 도망칠 수 없어요.”

남자의 대답에서 나는 그가 지닌 묵직한 사랑과 책임감의 무게를 느꼈다. 그는 왜소한 체격을 지녔으나, 바위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고도 인생의 고개를 묵묵히 넘어가고 있는 작은 거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꼭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고향마을을 지키는 오래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닮았다. 

보통의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돌봄으로 성장한다. 성장 후 결혼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지는 일을 배우게 된다. 돌보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어른이 되어간다. 고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누군가는 돌보고 책임지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때로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관계와 책임도 있다. 누군가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치기도 하고 서로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책임을 감당하며 사는 것도 등에 등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는 일처럼 근력과 요령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육신의 근력이 단백질과 꾸준한 근력 운동을 통해 성장한다면, 마음의 근력은 사랑과 역경을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음으로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는 마음 근력을 키우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열심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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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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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잡기



며칠 동안은 저녁마다 꼬리잡기를 했습니다.교회 앞마당, 나는 도망가고 아이들은 나를 잡는 겁니다.


승호 종순이 승혜 종숙이 아직 어린 그들의 손을 피하기는 쉽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 종설이는 만만치가 않습니다.뜀도 잘 뛰지만 웬만한 속임 동작에도 속아주질 않습니다. 키 큰 전도사가 어린 꼬마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겅중겅중 뛰는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일 겁니다.


잡힐 듯 도망가는 전도사를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쫒아 다닙니다. 모두의 얼굴엔 이내 땀이 뱁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예배당 계단에 앉아 지는 해를 봅니다. 다시 또 하자 조르는 아이들을 달래 집으로 보냅니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이를 닦고, 이를 닦을 땐 위 아래로, 그렇지 그렇게 말야. 그 다음엔 손을 씻고, 그 다음엔 얼굴, 얼굴을 씻을 땐 목도 벅벅 씻어야 해. 그 다음엔 발을 씻어야 하구. 비누칠 해가지고 발가락 사이를 잘 씻어야 한다구. 알았지?”
“네!!!”
“자. 그럼, 자기 집을 향하여 앞으로 가!”


더 하자고 조르던 승호와 종순이도 누나 승혜와 언니 종숙이를 따라 집으로 갑니다. 덩그런 예배당 마당엔 저녁나절 함께 뛰며 까르르 쏟아놓은 아이들 웃음이 가득합니다. 일어서려는데 승혜가 뛰어옵니다.


“전도사님, 뭣부터 하라고 그랬죠?”
“응, 이부터 닦으라고. 이렇게 말야.”
“히잉, 알았어요.” 


이내 집까지 뛰어간 승혜가 그제야 생각난 듯 뒤돌아서서 인사를 합니다.


“전도사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이쁜 꿈 꿔라.”


하지만 뜀박질에 피곤한 승혜는 꿈꿀 새도 없이 잠을 잘 겁니다. 어쩌면 꿈속에서도 또 하고 싶던 꼬리잡기를 할지도 모르고요.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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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욕



지방 교역자들의 살림살이가 담긴 회계 보고서가 나눠졌을 때,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뭔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이없는 표정들, 뭘 계산했고 뭣 때문에 놀랐는지 말 안 해도 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놀란 건 우리 모두, 우리 자신들이다.


액수의 차이일 뿐, 그리고 그 차이란 생각만큼 많지 않은 것일 뿐 다른 게 뭐 있나. 뭘 믿고 살라고 전대 가지지 말라고, 옷 두벌 갖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했을까. 그렇게 말한 당신은 정말로 그랬을까.


삶의 근거. 버릴 것 버리고 남을, 마지막으로 남을 근거, 그게 과연 우리들에게 하나님일까.


진리를 들먹이며 내 배를 채우는 짓거리야 말로 가장 우스운 짓일 텐데. 마지막 한 개 남은 빵을 떨림 없이 나누기까진 우린 얼마나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할까. 누군가 말한 無所有慾, 그런 건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서 구름처럼 떠가는 걸까.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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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사랑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뜻, 사랑

- 전집 3권 『성서 개요』 호세아 편 -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 사람이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나의 짝이 맞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지방에서 열린 한 청년 모임에서 받은 질문이다. ‘교회를 교회되게’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특강 시간 말미에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 내 특강 논지를 열심히 들은 뒤의 질문인 것은 맞았다. 그리스도인 두 사람이 이룬 가정이라면 가정도 ‘교회의 최소단위’이기에 이미 교회의 작동 원리나 관계 방식이 그 안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진지하고 순수한 청년에게 되물었다. 가장 이상적인 두 사람의 만남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건강한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둘 다 건강해야할까요?” 내 질문에 청년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참석자들이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물론 결혼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불쌍해서, 저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결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결혼하여 이룬 가정 공동체가 ‘교회’라면,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이 누누이 설교했던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면, 결혼이 ‘손해는 보지 않고 이익은 극대화하는 무역활동’이 아니어야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서에서 가장 ‘불공정한’ 결혼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호세아가 탑 랭킹에 들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내 ‘고멜’의 외도는 호세아를 고통스런 결혼생활로 이끌었다. 김교신이 호세아와 감정이입하여 풀이한 부분은 호세아의 애통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일찍이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열정적인 호세아의 성격으로 보아서 저가 그 신부에 대한 사랑은 꿀송이보다 더 달큼하였을 것이며, 저의 경건한 생애로 보아서 저는 그 신처(新妻)의 영혼이 날로 더욱 성결하여지기를 아침저녁에 쉬지 않고 기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혼생활 중에서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서 3남매까지 낳았다. 그러나 호세아의 가정에는 명랑한 행복이 오기보다 침울한 의운(疑雲)이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의심을 금하고자 힘쓰면 힘쓸수록 처의 행동은 이상하였다. … 호세아에게는 날로 이 괴로움이 더하여 갈뿐더러 드디어 최후의 날이 왔다. 고멜은 …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여 버렸다. 순정열애의 사람 호세아의 흉중이 어떠하였으랴. … 저는 광인처럼 분하였고 절망자처럼 사나워져 배반한 처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잡을 바를 못 얻었고 몸의 둘 곳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교신이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했던가? 「호세아」 서두를 읽으면서 나 역시 어려서부터 늘 의문이 들었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2절)는 구절이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물론 예언자들이야 제 임의로 생각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預)’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었으니, ‘가서 음란한 여자랑 결혼하라’는 계시를 내리신다면 황당하고 고통스런 일이나 ‘아멘’으로 받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자주’ 인간의 상식을 넘어 있다는 것 또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십분 이해심을 발휘하여 ‘공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의 결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의 내게 하나님의 이 계시는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전혀 인격적 끌림이 없는 여자를, 그것도 앞으로 음행할 것이 예언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지만 김교신의 저 놀라운 상상력은 내가 막연하게나마 ‘그랬을 거야’라고 생각해왔던 행간 사이의 간격들을 멋지게 채워주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신앙의 경건함을 함께 누리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남편의 마음을, 그리고 그런 기대들이 ‘배반’당했을 때의 분노와 애통함을 절절한 언어로 담아내었다. 그래. 그랬을 거야.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을 거야. 그래서 결혼했고 그녀와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그의 이상이 어그러지지 시작했을 거야. 그녀를 사랑한 만큼 버림받은 분노가 컸을 거야. 필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을 거야. 왜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는 그 때 받았을 거야. 여전히 몸은 분노하고 있는데도, 자복하고 엎드려 온전히 자신의 실존을 주 앞에 내어놓은 호세아에게로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어 왔을 거야.

 

때에 노도와 같이 저의 가슴에 일조(一照)의 광명이 비추이며 가늘고 고요한 소리가 들리기를 “호세아야, 네가 배반한 아내로 인하여 분하냐. 발광할 듯하냐. 당연한 일이다. 진정 사랑하는 까닭에 노할 것이다, 분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라. 배반한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 호세아의 수족은 분노의 경련을 금치 못하였을 때이나 저의 양심에는 ‘아멘’의 응답이 생겼다.

 

그리고 ‘아마도’ 호세아는 이 불행한 개인의 결혼사를 체험하면서 고통가운데 받았던 계시를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가지셨을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아내’ 이스라엘과의 황홀한 밀월에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자꾸 곁을 떠나는 그들을 보며 ‘남편’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얼마나 아프실까? 또 얼마나 분하실까? 그 고통만큼, 그 아픔만큼, 그 분노만큼 우리 이스라엘에게 갚으신다면, 우리가 어찌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호세아의 삶이 ‘불행한 남편’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의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개인적 아픔을 승화시켜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로 읽어내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읽고 나니 비로소 마음 가운데 자유함과 기쁨이 넘쳐났다. ‘내’ 하나님이 그러실 리 없었을 거라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소망에 확신을 가져다 준 풀이었기 때문이다. 호세아 한 사람의 삶 역시 아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신데, 설마 ‘공동체적 교훈’을 주시려고 호세아의 자유의지와 선택과 사랑의 관계성을 몽땅 희생하셨을 리가.

 

호세아가 고멜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것은 여느 남녀가 그러하듯 자연스런 일이었을 터이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 이후에, 그리고 오직 호세아‘만’이 받아 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호세아가 여전히 고통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는데도, 만일 옆에서 누군가가 제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훈계한다면(설사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는 ‘정답’을 먼저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그건 ‘폭력’이다. 호세아 스스로, 호세아의 자유 영혼으로, 그의 산 신앙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하다 받은 계시의 말씀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그 말씀은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었다.

 

간통죄 폐지가 결정된 이후 신문사나 지인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 찬성이냐고, 반대냐고. 그들에게 되물었다. 만일, 그동안 간통이 위법행위였기 때문에 외도를 못했던 커플이라면, 꾹꾹 참았던 커플이라면 그 둘은 과연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커플이겠느냐고. 구약시절처럼 ‘돌로 칠 것인가’ 모세의 법처럼 ‘이혼 증서를 써 줄 것인가’ 아니면 현대사회의 개신교 윤리처럼 ‘합법적이고 신앙적인 결혼은 한 번에 한 사람만!’(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방식으로)을 적용할 것인가는, 이 놀라운 사랑의 관계적 혁명을 체험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호세아의 선포에 직면하여 모두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감사하게도 특강에서 이런 해석을 나누는 동안 청년들의 눈빛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죽기까지 ‘타인을 위한 나’이셨던 그리스도를 ‘가장’ 삼아, 두 사람은 존재와 삶을 나누며 서로를 건설해가고자(오이코도메인) 끊임없이 ‘너’를 부르고 기다리고 섬기는 ‘공동체’를 꾸려가고 싶다고.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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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끈 등

사진/김승범


 
작실 마을 올라가는 길 쪽으로 등을 하나 달았습니다.
집 지을 때 부탁해서 사택 옥상에 등을 달았습니다.


밤이면 등을 켭니다. 
둥근 달이 걸리면 그런대로 걸을 만하지만 달이 없으면 길도 없습니다. 
더듬더듬 발걸음이 더디고 산을 끼고 도는 길, 오싹 오싹 합니다.


사랑의 빛 되었음 싶은 마음으로 불을 켭니다.
작실로 오르는 길, 밤이면 불을 켭니다.


그러나 가끔씩 실수를 합니다.
불을 켜는 걸 잊기도 하고 끄는 걸 잊기도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가르쳐 줘 날 밝은 한참 뒤 뒤늦게 끄기도 합니다.
사람 발길 끊긴 빈 길을 밤새워 밝힌 걸 생각하면 속상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날 밝도록 켜져 있던 불을 뒤늦게 끄며 마음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 그 어느 곳에도 뜻도 없이 켜져 있는 불은 없는 것일까, 때 지난 마음 접지 못하고 무심히 계속되는 미련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뒤늦게 끈 불 덕분에 마음 한 번 돌아봅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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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사는 자식들


“월급은 12만원 받는데, 엄마, 저녁이면 코피가 나와.”


얼마 전 순림이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중학교를 마치곤 곧바로 언니가 있는 서울에 올라가 낮엔 방적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순림이. 


“돈 벌기 그렇게 어려운 거란다.”


엄마 김 집사님은 그렇게 말했다지만, 마른침 삼키며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래 순림아, 삶이란 때론 터무니없이 힘겨운 것일 수도 있나 보다.


천근만근 저녁마다 두 눈이 무거워도, 선생님 뭔가를 쓰는 칠판에 낮에 일한 실올이 바둑판처럼 아릿하게 깔려도 두 눈을 크게 뜨렴. 네가 마주한 것, 배우는 것, 단순한 공부가 아닌 엄연한 삶이기에.

연신 눈물을 닦으셨다. 얼마 전 자식을 떠나보내고 남은 텅 빈 집에서 심방예배를 드리며 할머니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어린아이 하나가 어른 몇 명을 당한다는데, 매 한 번 큰소리 한 번 모르고 키운 손주자식들, 녀석들의 얼굴과 웃음이 온통 방안마다 집안마다 가득한데, 이젠 집안이 텅 비었다.


떠나간 아들은 공장에 잘 나가고 있는지, 무슨 기계를 다룬다 하는데 다치지나 말아야 할 텐데. 며느리와 손주들이 얻었다는 방은 어떤지, 연탄가스 새는 건 아닌지.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삼아 놀던 손자 손녀는 지금쯤 무얼 하는지. 낯선 세상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전엔 일 다 마치고 돌아올 저물녘이면 집안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며, 가족에겐 어서 오라는, 오늘도 수고했다는 더없이 푸근한 손짓이었다. 집안에 들어설라치면 달려 나와 인사하던 손자 손녀 그리고 웃음 많은 며느리, 그럴 때면 하루의 힘겨움은 문 밖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며느리가 떠다준 시원한 물 한 사발에 하루의 피곤을 씻고, 모두들 한자리에 둘러앉아 저녁을 들면 그러면 족했는데. 피어나는 이야기꽃, 피어나는 웃음꽃, 그게 좋아 한낮 논밭에서의 시간도 견딜 만 했는데.


이젠 저녁연기도 달려 나오는 식구도, 기다리는 저녁상도, 둘러앉을 사람도 없다. 이사 하던 날 밤 이사 잘했다고 전화한 집사님은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못했다 한다. 서로가 전화통만 붙잡고 시간 모르고 있었으리라.

흐르는 세월을 따라 단강에도 한두 집씩 전화기가 놓이고 가끔씩 그렇게 전화가 온다. 떠나간 자식들의 전화가 온다. 안녕하시냐고,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멀리 사는 자식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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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의 새벽기도

사진/김승범

 

 

오늘 새벽에도 교회로 들어서는 현관문 앞에는 작은 막대기 하나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오늘도 오셨구나.’ 김천복 할머니, 75세 되신 허리가 굽은 할머니시다. 현관에 서 있는 막대기는 할머니가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인 것이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가 새벽예배에 참석하신다. 할머니 사는 아랫 작실까지 재게 걸어도 내 걸음으로 10여분, 할머니는 훨씬 더 걸리리라.


머리 곱게 빗고 맨 앞에 앉으신 할머니, 오늘은 또 무얼 기도하실까. 얼마 전 서울로 떠난 철없는 막내아들 위해 기도하실까. 우리 전도사 좋은 목사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까. 이는 할머니의 기도 제목 중 하나다. 당신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곳 떠날 생각 아예 말라는 분이다.


교회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변정림 성도도 작실에서 내려온다. 마땅한 시계가 없어 4시 30분 예배시간을 맞추기가 어렵지만 그만큼 더 일찍 내려온다. 갑상선으로 목이 부어올라 고생하면서도 꾸준히 내려온다.


전에도 몇 번 그런 적이 있는 김을순 집사님은 이번에도 다시 한 번 같은 실수를 하였다. 자다 깨어 놀라 달려와 기도하고서 교회 벽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2시, 다시 돌아가 잠깐 누웠다가 종소리에 깨어 다시 달려왔던 것이다. 


대개는 시간이 턱에 닿아서야 졸린 눈 비비고 나가서 서는 못난 전도사의 못난 게으름은 교우들은 그렇게 말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문간에 서 있는 나무 지팡이를 보며, 나보다 먼저 와 있는 할머니의 나무 지팡이를 보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문을 연다.


무얼 그리 열심히 간구하는지 두 손 모아 허리 굽힌 채 뒤돌아보지 않는 할머니.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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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줄 타는 전도사

 

 

비가 안 와 걱정입니다.
땅 갈고 씨 뿌렸지만 비가 안 와 걱정입니다.
아직은 갈 땅이 많아 우선 갈고 씨 뿌릴 뿐입니다.
전경환인가, 대통령 동생이 어제 잡혀 갔답니다.
몇 해 전 
소 때문에 빚진 사람 이곳에도 많은데 
그걸로 입은 피해 크고 깊은데
어제 잡혀 갔답니다.
거기다가 누군가에게 뺨을 맞았다죠.
그동안 말 못했던 백성들의 손이요, 어쩜 하나님 손이었다 생각하지만
꼭 남의 일 같습니다.

오늘도 강가 밭에선 사람들이 일 합니다.
당근 씨를 뿌립니다.
땅거미를 밟고 돌아오는 경운기,
오늘도 저녁놀이 붉습니다.

이번 주일이 부활절
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지 
무얼 딛고 오는지 
설교거리 찾는 전도사
똥줄이 탑니다.
시간을 잊고 책상에 앉아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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