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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34

사방의 벽이 없는 집 사방의 벽이 없는 집 바람의 벽이 있는 방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들이 네 개의 기둥이 되고 나이가 비슷한 나무들이 가지런히 지붕이 되고 누구는 신발을 신고서 걸터 앉아 손님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신발을 벗고서 올라 앉아 주인이 되어도 좋은 에어컨도 필요 없고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벽이 없는 집 부채 하나로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면 스스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신선도 되고 먼 산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물 같이 구름 같이 그리 흘러가는 운수납자도 되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보고 있으면 그대로 보리수 나무 아래 앉은 부처가 되는 지고 가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서 십자가 나무를 생각하는 바람의 방 이곳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 위의 나그네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2021. 6. 21.
손 흔드는 아이들 원주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버스를 타고 저물녘 돌아올 때면 가끔씩 손 흔드는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일찌감치 버스를 피하여 길 한쪽으로 비켜서선 손을 흔듭니다. 집에서 학교까진 몇 리나 되는지, 하나씩 둘씩 저녁놀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이 손을 흔듭니다. 어깨에 둘러멘 책가방, 단발머리 여자 아이의 검고 티 없는 웃음, 아이들이 손을 흔들 때마다 같이 흔들어 줍니다. 잊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는 버스 기사분이 고맙습니다. 혹 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 해도 차 창밖으로 손 흔드는 아이 만날 때면 모두가 꼭 손 흔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사를 누군가 받아 주었다는, 내가 손짓할 때 누군가 대답해 줬다는 작지만 소중한 경험을 어린 마음마다 심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불러도 .. 2021. 6. 19.
플라스틱 그릇과 찻잎 찌꺼기 엄마가 일하러 나간 후 배고픈 아이들만 있는 빈 집으로 짜장면, 짬뽕, 마라탕, 베트남 쌀국수, 떡볶이 국물이 이따끔 지구를 돌고 돌아가며 다국적으로 배달이 된다 늦은 밤 높이 뜬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 한 끼니용 플라스틱 그릇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공장에서 기름으로 만든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먹다가 남긴 배달음식들도 죄다 기름투성이들 주방세제를 열 번을 뭍혀가며 제 아무리 문질러도 기름과 기름은 서로 엉겨붙어 미끌미끌 나를 놀린다 그냥 대충 헹구어 재활용 폐기물로 버릴까 하다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이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 하나라도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자는 한 생각을 씨앗처럼 숨군다 주방세제를 뭍히고 또 뭍히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도 미끌미끌 저 혼자서.. 2021. 6. 19.
나무 그늘 같은 사람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정지용, ‘나무’ 1연)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제 며칠 후면 하지입니다. 계절이 아주 빠르게 여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청명한 하늘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여주시길래 목회실 식구들도 점심 식사 후에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지붕에 올라가 남산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 십자가 탑, 햇빛 발전소, 남산 타워로 연결되는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맑은 대기 속에 머물다 보면 마음까지 절로 환해집니다. 한 동안 거기 머물다 보니 지붕의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낮 시간에 조금 움직이다 보면 저절로 그늘을 찾게 됩니다.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 걸어본 사람이라면 한 줌 그늘이 주는 위.. 2021. 6. 17.
원주에서 단강으로 오는 길은 두 개가 있습니다. 문막 부론을 지나서 오는 길과 귀래를 거쳐서 오는 것이 그것입니다. 단강이 거의 가운데쯤 되니까 시작이 다를 뿐 모두가 한 바퀴를 도는 셈입니다. 부론으로 오는 길은 포장이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부론부터 단강까진 남한강을 끼고 길이 있어 경치도 좋습니다.그러나 귀래 쪽으로 오는 길은 아직 비포장입니다. 굽이굽이 먼지 나는 길을 덜컹이며 달려야 됩니다. 똑같이 온 손님이라도 부론 쪽으로 온 사람과 귀래 쪽으로 온 사람의 단강에 대한 이미지는 다릅니다. 부론 쪽 포장길로 온 사람은 ‘그래도 야 좋다‘ 그런 식이지만, 귀래 쪽으로 온 사람은 이곳 단강을 땅끝마을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부터 귀래에서 단강까지의 길이 포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여.. 2021. 6. 17.
기말고사가 끝나면 <조국의 시간>을 읽기로 했다 요즘은 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코로나 안전 수칙을 잘 지키느라 등교하는 날이 많지 않다. 고1이 된 딸아이가 가끔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로만 듣는 온라인 수업이 절반이래도, 돌아오는 시험날은 나가는 월세와 월급처럼 어김이 없다. 그 옛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는 밤길이 어둑했다. 동대신동 영주터널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 서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먼저 살피다가, 머리 위에는 달이 혼자서도 밝고, 바로 옆으로 우뚝 보이는 혜광고등학교 창문들마다 그 늦은 시간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거기서 그대로 북녘 하늘로 가로선을 그으면, 저 멀리 대청공원 6·25충혼탑 꼭대기에 작은 불빛들이 마치 작은 별빛 같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 2021. 6. 14.
저 자신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시편 7편 8, 9절 야훼여, 바른 판결을 내려주소서. 사람의 마음속, 뱃속을 헤쳐보시는 공정하신 하느님(《공동번역》) 但願睿哲主 鑑察我忠義(단원예절추 감찰아충의) 按照爾公平 報答我純粹(안조이공평 보답아순수) 꿰뚫어보시는 주님 제 진실함을 보소서 당신 공평 비추시어 제 결백함 알아주소서(《시편사색》, 오경웅) 시인의 기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바른 판결을 원할 만큼 제 속마음이 깨끗하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어리석고 제 깜냥을 헤아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꿰뚫어보시는 분 앞에서 감히 진실함을 주장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늘 그렇듯 우리의 신앙은 이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그럼에도 당신 앞에서 머무는 은총을 허락.. 2021. 6. 14.
언제 가르치셨을까, 여기 저기 바쁘실 하나님이 언제 만드셨을까. 아가의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별빛 모아 담으셨나, 무엇으로 두 눈 저리 반짝이게 하셨을까. 까만 눈동자 주위엔 푸른 은하수. 언제 저리도 정갈히 심으셨나, 눈 다치지 않게 속눈썹을. 어디를 어떻게 다르게 하여 엄마 아빨 닮게 하셨을까. 어디를 조금씩 다르게 하여 다른 아이와 다르게 하셨을까. 물집 잡힌 듯 살굿빛 뽀얀 입술. 하품할 때 입안으로 보이는 여린 실핏줄. 손가락 열, 발가락 열. 그리곤 손톱도, 우렁이 뚜껑 닮은 발톱도 열. 열 번도 더 헤아려 크기와 수 틀리지 않게 하시고. 언제 가르치셨을까. 엄마 젖 먹는 것과 배고플 때 우는 것. 쉬하고 응가 하는 것. 하품과 웃음. 밤에 오래 잠자는 것. 혼자 있기보단 같이 있기 좋아하는 것. 찬찬히 엄마 얼굴 익히는 것. 햇빛에 나.. 2021. 6. 14.
자족적 관조의 삶 존경하는 페친 최창남 목사님이 내신 책 (꽃자리)를 단숨에 읽었다. 술술 잘 읽힌다. 아포리즘처럼 읽히고 수필처럼 읽히고, 또 거친 역사의 시간을 헤쳐온 한 인간의 자성적 고백처럼도 읽힌다. 최 목사님은 군부독재, 졸속근대화 시기의 거친 세월을 노동운동, 빈민운동, 문화운동과 같은 운동권에서 살아오시면서 많은 고난과 상처를 온 몸으로 겪어내셨다. 그러다가 연세 70이 가까운 시점에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집을 만들어 그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은자처럼 사신다. 많은 시간 주변의 자연물을 관조하고 지난 삶을 성찰하면서, 또 떠돌이 고양이들 친구 삼아 밥 주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 자족적으로 안돈하며 사신다. 이 책의 글들은 어찌 보면 고대 스토아 사상가들이 추구한 '초연한 무관심'(adiaphora)의 자세.. 2021.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