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거기 있다고


"유약(柔弱)은 삶의 속성이요, 견강(掔剛)은 죽음의 속성 – 老子"

인간은 그 약함으로 살아남는다. – 장폴, 샤르트르

 

우연히 펼쳐든 오래된 작은 노트.
맨 앞장에 그렇게 쓰여 있다. 


언제 옮겨 적었는지. 한 겨울 눈 덮인 깊은 산 속에 있으면 뚝뚝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폭풍 속 거센 비바람을 견디던 나무가 조용히 내려앉은 눈에 꺾이더라는 法頂스님의 말.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한 때라던 바울의 말.


문득 여러 얘기들이 한 분위기가 되어 가슴으로 전해진다. 작고 여린 것, 생명은 거기 있는 거라고.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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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내 당신의 곁에 가기만 해도
내 자신이 이미 아니리만큼 당신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두우시와, 내 하찮은 밝음조차
당신의 가장자리에선 의미도 없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시선>, 구기성 역, 을유문화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무탈하신지요? 워낙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느닷없는 중병 선고는 우리 삶의 기반을 사정없이 흔들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고, 별일 없이 잘 극복하실 거라고 격려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혼돈과 두려움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 43:2)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오신 교우들을 보며 ‘이제는 예배당이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물인 공간이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빈 공간을 눈길로 더듬곤 했던 제 마음의 풍경이 공간의 외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주일을 준비하며 묘한 설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자기를 길들이면 일어날 일도 들려줍니다.

“난 보통 발소리하고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보통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굴 속으로 숨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는 소용이 없구,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금발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는 아니지만 한 분 두 분 교우들이 교회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면서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웃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한 길을 가는 벗들의 우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일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참 번거롭구나 싶지요?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성전에서 스스로 제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일이었지만,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저미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 것은 봉헌자의 몫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거둔다는 것처럼 긴장되고 꺼림칙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봉헌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밀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요즘처럼 방앗간에서 빻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절구에 밀을 넣고 공이로 찧고 또 찧었을 겁니다. 그리고 체질을 통해 거친 것들을 골라내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소금을 치고 향을 얹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통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봉헌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농사꾼으로 사셨습니다. 많진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시느라 한가한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철은 농한기이긴 하지만 필요한 가마니나 돗자리를 짜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여름은 참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토마토, 참외, 수박이 때맞춰 익어가고, 가지와 오이도 지천이었습니다. 토마토나 참외가 익어갈 무렵이 되면 어린 저는 날마다 밭에 나가 초록색 토마토 열매가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봤습니다. 며칠 후면 저걸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토마토와 참외를 살피러 밭에 나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알고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모릅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시면서 어머니가 그 열매를 따다가 목사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린 시절 저의 적이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몫을 가로챈 사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이렇게 목사로 평생을 살고 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를 노릇입니다.

주일을 맞이하기 전 어머니가 늘 하시는 일은 꼬깃꼬깃한 지폐를 다리미로 펴는 것이었습니다. 인두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고, 다리미에 숯을 담아 사용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바로 그런 준비 과정 자체가 어머니의 예배였습니다. 분주함 속에서 허둥거리는 현대인들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신화적 세계에 속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배는 그렇게 바쳐졌던 것입니다.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왔네요. 이번 주까지는 많지 않은 인원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7월 첫 주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신 접종을 하고 2주가 지난 분들은 20% 제한에 상관없이 예배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1미터 쯤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니 더욱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예배당에서 울려퍼지는 찬양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즘 교회학교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많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가끔 비가 내리긴 하지만 요즘 말갛게 개인 하늘과 간간이 떠있는 구름을 보노라면 저절로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로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가 떠오릅니다. 요즘은 이 곡을 많이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 곡을 흥얼거리노라면 순수하고 순박했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경의선 숲길을 걸었습니다. 양 옆으로 포플러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앙상하게 전지되어 좀 볼품이 없었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잘라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흥이 났는지 ‘미루나무가 포플러지요?’라고 물으며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만 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살짝 걸쳐놓고 갔다’는 노랫말이 참 정겹습니다. 왠지 이런 노래를 부르면 영혼이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옆지기가 이런 노래도 부르더군요.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 잘랑잘랑 소리난다 나뭇가지에 언덕 위에 가득 아 – 저 손들 나를 보고 흔드네 어서오라고”

비슷한 유년시대를 거쳤을 텐데 이 곡은 제 기억 속에 전혀 없습니다. 아내도 정말 오랜만에 이 곡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래도 그 가사를 다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정서의 원형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했군요. 삶이 무겁고 힘겨우니 가끔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이런 가벼운 일상도 즐겨보시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6월 2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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