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흔드는 아이들

사진/심승범



원주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버스를 타고 저물녘 돌아올 때면 가끔씩 손 흔드는 아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일찌감치 버스를 피하여 길 한쪽으로 비켜서선 손을 흔듭니다. 집에서 학교까진 몇 리나 되는지, 하나씩 둘씩 저녁놀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이 손을 흔듭니다.


어깨에 둘러멘 책가방, 단발머리 여자 아이의 검고 티 없는 웃음, 아이들이 손을 흔들 때마다 같이 흔들어 줍니다. 잊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는 버스 기사분이 고맙습니다.


혹 차를 타고 어디를 간다 해도 차 창밖으로 손 흔드는 아이 만날 때면 모두가 꼭 손 흔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사를 누군가 받아 주었다는, 내가 손짓할 때 누군가 대답해 줬다는 작지만 소중한 경험을 어린 마음마다 심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불러도 대답 없다는 것, 그 차가운 인상이 어린마음에 자리 한다면 그는 그만큼 닫힌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내가 부르면 대답하는 이웃이 있다는 걸, 그 따뜻한 경험을 손 흔드는 어린 마음마다 곱게 심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손 흔드는 아이를 볼 때마다 모두들 손 흔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활짝 웃으며 말입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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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그릇과 찻잎 찌꺼기

 

 

엄마가 일하러 나간 후
배고픈 아이들만 있는 빈 집으로

짜장면, 짬뽕, 마라탕, 베트남 쌀국수, 떡볶이 국물이
이따끔 지구를 돌고 돌아가며 다국적으로 배달이 된다

늦은 밤 높이 뜬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
한 끼니용 플라스틱 그릇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공장에서 기름으로 만든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먹다가 남긴 배달음식들도 죄다 기름투성이들

주방세제를 열 번을 뭍혀가며 제 아무리 문질러도
기름과 기름은 서로 엉겨붙어 미끌미끌 나를 놀린다

그냥 대충 헹구어 재활용 폐기물로 버릴까 하다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이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 하나라도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자는 한 생각을 씨앗처럼 숨군다

주방세제를 뭍히고 또 뭍히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도 미끌미끌

저 혼자서 기름과 씨름하다 보면
이렇게 쓰는 물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집 앞으로 흐르는 강물과 바다한테까지 
내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자연한테 미안한 마음에 속울음을 울면서도
그렇게 미련한 짓을 쉬 멈출 수 없는 이유를 찾느라

기름과 물 사잇길로 사색의 풀숲을 헤치며 나가다 보면
저 멀리 사색의 길 끝으로 한 점의 별빛이 보인다

농사의 신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름 모를 풀을 먹고서 죽어가는 민초들을 불쌍히 여겨
백 가지의 풀을 먼저 먹어본 후 알려주었다는 신농

그 자신도 독초인 줄 모르고서 뜯어먹은 후 죽어가다가
우연히 바로 옆에 있던 나무의 잎을 뜯어먹게 된 신농

그 잎으로 해독이 되어서 다시 살아났다는
신농과 차나무의 이야기가 해처럼 떠오른다

차를 마신 후 무심코 버리던 찻잎 찌꺼기를 
그냥 개수대 한 곳에 모아두기로 한 후

기름으로 엉겨붙은 플라스틱 그릇을 살살 문질렀더니
찻잎 찌꺼기 점잖게 지나간 자리마다 맑게 갠 하늘이다

깨끗하게 씻긴 플라스틱 그릇에는 무엇을 담을까?
앞으로 기름기가 있는 음식은 되도록이면 피해야지

여름날 수박과 토마토를 잘라서 담아두기로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갈증도 나고 배가 출출한 아이들 

가볍고 밀폐도 잘 되는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은
아이들이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과일 그릇으로 딱이다

그리고 물로 기름때를 씻느라 설거지를 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숨어 있는 내 몸속의 길이 아득하다

지구를 세 바퀴 돌고 도는 만큼의 길이라는
내 몸속의 길로 무엇을 흘려보낼지 말지 생각하게 된다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도
마음은 이렇게 씻기어 흐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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