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를 좋아하는 그 남자의 이야기


매주 박카스를 사러 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형이다. 그는 한적한 강가에서 낚시 줄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 손녀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신기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30년 하루하루를 신발이 닳도록 성실히 일했고, 아픈 동생과 삶을 함께 해 왔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첫 인상은 50대 후반의 앞머리가 벗겨진 평안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는 제조업공장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며, 30년 넘게 함께 산 아내는 여전히 곱고 다정했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했던 동생은 좀 마르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고 무사히 자녀들을 결혼시켰으며 잘 웃었다. 남자는 인생에서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남자에게 작은 욕심이 있다면 더 늙기 전에 아내와 함께 여러 곳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건강했던 남자의 아들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이제 결혼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두 살배기 딸의 아버지인 아들은 뇌졸중으로 인해 반신마비가 왔고, 오랜 시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재활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젊은 아들은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몸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깊은 좌절과 우울감에 빠졌다. 아들의 마음은 조급했지만 아들의 몸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회복은 더디기만 했다.

남자는 그런 아들을 보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와 손녀를 앞에 두고 자신의 힘든 마음을 내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는 혼자서 아픔을 삭혀야 했다. 몇 달 후 아들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아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과 하혈을 했고, 병원에서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은 후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다. 나이를 먹어도 새색시처럼 고왔던 아내는 몇 달 만에 십 년 세월을 삼킨 것처럼 쇠약해졌다.

그리고 또 몇 달 후 남자의 동생은 그에게 담담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형! 지난번에 둘째가 해준 종합검진결과가 나왔는데 나 위 암이 재발했데.” 


동생은 계속 말했다. “형, 걱정 마! 미리 건강검진 하는 바람에 알게 된 거라서 암이 아주 작데. 간단하게 수술만 받으면 나을 수 있데 . 다행이지 뭐.”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어버리는 동생 앞에서 찡그리고 싶어도 찡그릴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동생은 10년 전처럼 다시 위암 수술을 받았고, 위의 대부분을 절제했다. 아내와 아들과 동생이 함께 일하던 공장에 이제 남자와 직원 몇 명만 남았다. 

 


남자는 가족이 함께 해 오던 일들을 혼자서 감당한다. 남자의 양말은 젊은 시절처럼 다시 땀에 젖었고 남자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젊은 시절처럼 박카스 한 병으로 하루의 피로를 해결하기에는 이제 그의 몸이 젊지 않다. 하지만 남자는 울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으며 여전히 묵묵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으세요?” 


툭 말을 내뱉고 나니, 뻔한 상황에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도 그는 피곤한 베인 얼굴로 동생처럼 순하게 웃었다. 남자가 내게 대답했다.  


“그냥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 생각해요. 무사히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면 또 내일을 지켜낼 수 있길 바라면서요. 힘들지만 내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내 아들과 내 동생이 돌아올 곳이 있거든요. 내 아들이 돌아올 곳이 있어야 내 아내가 불안하지 않거든요. 그들을 위해 나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요. 나 혼자 일하기 힘들다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를 채워 버리면 그들이 돌아 올 곳이 없잖아요. 지금 내가 할 일은 내 아들과 내 동생이 돌아올 곳을 지켜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포기하거나 도망칠 수 없어요.”

남자의 대답에서 나는 그가 지닌 묵직한 사랑과 책임감의 무게를 느꼈다. 그는 왜소한 체격을 지녔으나, 바위처럼 무거운 책임을 지고도 인생의 고개를 묵묵히 넘어가고 있는 작은 거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꼭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고향마을을 지키는 오래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닮았다. 

보통의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돌봄으로 성장한다. 성장 후 결혼을 하게 되면 또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며 책임지는 일을 배우게 된다. 돌보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어른이 되어간다. 고로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누군가는 돌보고 책임지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때로 바위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관계와 책임도 있다. 누군가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치기도 하고 서로를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책임을 감당하며 사는 것도 등에 등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는 일처럼 근력과 요령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육신의 근력이 단백질과 꾸준한 근력 운동을 통해 성장한다면, 마음의 근력은 사랑과 역경을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음으로 책임의 무게를 감당하는 마음 근력을 키우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열심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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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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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잡기



며칠 동안은 저녁마다 꼬리잡기를 했습니다.교회 앞마당, 나는 도망가고 아이들은 나를 잡는 겁니다.


승호 종순이 승혜 종숙이 아직 어린 그들의 손을 피하기는 쉽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간 종설이는 만만치가 않습니다.뜀도 잘 뛰지만 웬만한 속임 동작에도 속아주질 않습니다. 키 큰 전도사가 어린 꼬마들과 어울려 이리저리 겅중겅중 뛰는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일 겁니다.


잡힐 듯 도망가는 전도사를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쫒아 다닙니다. 모두의 얼굴엔 이내 땀이 뱁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예배당 계단에 앉아 지는 해를 봅니다. 다시 또 하자 조르는 아이들을 달래 집으로 보냅니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줍니다.


“제일 먼저 이를 닦고, 이를 닦을 땐 위 아래로, 그렇지 그렇게 말야. 그 다음엔 손을 씻고, 그 다음엔 얼굴, 얼굴을 씻을 땐 목도 벅벅 씻어야 해. 그 다음엔 발을 씻어야 하구. 비누칠 해가지고 발가락 사이를 잘 씻어야 한다구. 알았지?”
“네!!!”
“자. 그럼, 자기 집을 향하여 앞으로 가!”


더 하자고 조르던 승호와 종순이도 누나 승혜와 언니 종숙이를 따라 집으로 갑니다. 덩그런 예배당 마당엔 저녁나절 함께 뛰며 까르르 쏟아놓은 아이들 웃음이 가득합니다. 일어서려는데 승혜가 뛰어옵니다.


“전도사님, 뭣부터 하라고 그랬죠?”
“응, 이부터 닦으라고. 이렇게 말야.”
“히잉, 알았어요.” 


이내 집까지 뛰어간 승혜가 그제야 생각난 듯 뒤돌아서서 인사를 합니다.


“전도사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이쁜 꿈 꿔라.”


하지만 뜀박질에 피곤한 승혜는 꿈꿀 새도 없이 잠을 잘 겁니다. 어쩌면 꿈속에서도 또 하고 싶던 꼬리잡기를 할지도 모르고요.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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