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례

 

먼저 떠난 큰형님의 장례를 치르고 온 반장님 댁을 방문했을 때, 반장님은 내게 넋두리를 했다. 반장님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참으로 오랫동안 병을 앓던 큰형님이 역시 앓아누운 형수님을 두고 먼저 이 땅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형수님이 교회에 다녔기에 장례는 그 교회에서 맡아서 하기로 했다. 교회에 다니진 않지만 반장님은 형의 장례를 치러주는 교회의 모든 절차를 그대로 따랐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무래도 형을 그냥 보내기엔 뭔가 속이 텅 빈 듯한, 허전하기 그지없는, 나중엔 송구한 마음이 들어 반장님은 찬밥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떠놓고 절이라도 한 번 하고 싶었다. 그래야 맞지 싶었다. 그게 형을 먼저 보내드리는 동생의 도리라 여겨졌다.


그래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어이없었지만 참고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하겠노라고, 금방 끝내겠노라고. 


그래도 거절당했다. 그게 반장님의 가슴엔 멍으로 남았다. 응어리로 맺혔다. 내 형 내가 보내며 내가 절한다는데 그걸 막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옳은 일이었을까. 그게 믿음이었을까. 이야기 끝, 담배 한 대 깊숙이 피워 물며 덧붙인 한마디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단 하룻밤만이라도 밤샘을 같이 했으면 몰라요. 그저 하루에 한두 번 찾아와 노래나 몇 곡 부르고 가고서는”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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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계가 아닌데


작실의 김천복 할머니, 섬뜰의 준이 어머니, 단강의 안갑순 집사님 마을대표인양 세 분이 모였다. 주일 낮 예배, 재종을 치고서 몇 곡 찬송을 불렀지만 더 이상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린 준이와 소리, 아내, 나까지 합하면 7명이다. 아마 교회가 세워진 이래 가장 작은 인원이 모였지 싶다. 전날 오랜만에 내린 비, 비 기다리며 미루어온 파종을 주일이라 해서 미룰 순 없었던 거다.

 

어버이 주일, 혹 모자라지 않을까 염려하며 산 카네이션 꽃이 뒤에 덩그마니 남았다. 숫자에 연연하지 말자고, 어쩜 내 견디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바로 그 숫자일 거라고 그렇게 누누이 자신에게 이르면서도 역시 견디기 어려운 건 숫자에서 오는 무게감이다. 한두 번 쌓이다 보면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게 되고, 굳게 되는 법, 두려운 건 바로 그것이다.


구릿빛 얼굴, 미안한 표정으로 저녁 예배에 나온 교우들에게 어쩌겠냐고, 지금의 형편으로야 어쩌겠냐고, 하루 빨리 마을이 복음화 되어 주일 하루만은, 오전 한때만이라도 모두들 쉬기 전에는 품앗이로 일하는 이곳에서야 어려운 일 아니겠냐고 위로를 건넨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보다도 사람은 기계가 아닌데 싶은,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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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국회의원

 

“원성 – 횡성 농민 만세!”

새벽, 의외의 결과를 대하며 내가 이긴 듯 괜히 신이 났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누구 말대로 계란으로 바윌 내려치는, 보나마나 결과가 뻔한 일이라고 밖엔 달리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당선되었다. 민주당의 박경수 후보. 내게는 집사로, 속장으로서의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바로 옆 정산교회의 충성속(담안지역) 속장이기 때문이다.

 

촌티가 흐르는 사람. 기관장들 쭉 대동하고 나타났던 민정당 후보에 비해, 조용히 초라하게 인사차 다녀가며 ‘모든 걸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고 했을 때만 해도 한편 안쓰러웠던 사람. 놀랍게도 그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를 이백 몇 십 표 간발의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원래 강원도가 여당 밭인데다 이곳 마을만 해도 기관장들의 영향 아래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선거 전날, 작실까지 버스가 들어온다 하여 진입로 공사를 하기에 일손 도우며 이야길 들으니 생각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잠시 일손 놓고 땀을 식히며 사람들은 말했다. “민정당 그 사람. 새마을 사건과 관련됐다며?” “재산 엄청나게 불었다지?” 


“국회의원 되고나선 코빼기 한번 안 보이더니, 얼굴 내미는 것 보니 때가 되긴 됐나보지?” 반면 성실한 농사꾼인 박경수 후보에 대해선 동정과 기대가 모아졌다. “그 바쁜 운동기간 중에도 담배농사를 위해 꼭두새벽 일어나 거름을 져 날랐다지.” “키우던 소 몇 마리 팔아가지고 나왔대.” ’지난번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을 할 때도 혼자 많이 뛰어 다녔지.‘ “문막 유세장에 가보니 말하는 게 보통이 아니더군.”

 

민심의 흐름이랄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하나로 모이게 됐고 당당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당선자들의 신상을 알리는 TV 자막. 다른 이들에 비해 흐리고 어둡게 나온 그의 사진 밑 경력 란에는 농사라고만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이도 많았지만 그저 ’농사‘라고만 적힌 단순한 한마디가 더욱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래, 시커먼 얼굴 거친 손마디 농사꾼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렇게 시커먼 얼굴, 거친 손마디로 살아가는 이 땅 농사꾼들이 농사꾼을 뽑았다. 그게 자랑스럽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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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거기 있다고


"유약(柔弱)은 삶의 속성이요, 견강(掔剛)은 죽음의 속성 – 老子"

인간은 그 약함으로 살아남는다. – 장폴, 샤르트르

 

우연히 펼쳐든 오래된 작은 노트.
맨 앞장에 그렇게 쓰여 있다. 


언제 옮겨 적었는지. 한 겨울 눈 덮인 깊은 산 속에 있으면 뚝뚝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폭풍 속 거센 비바람을 견디던 나무가 조용히 내려앉은 눈에 꺾이더라는 法頂스님의 말.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한 때라던 바울의 말.


문득 여러 얘기들이 한 분위기가 되어 가슴으로 전해진다. 작고 여린 것, 생명은 거기 있는 거라고.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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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내 당신의 곁에 가기만 해도
내 자신이 이미 아니리만큼 당신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두우시와, 내 하찮은 밝음조차
당신의 가장자리에선 의미도 없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시선>, 구기성 역, 을유문화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무탈하신지요? 워낙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느닷없는 중병 선고는 우리 삶의 기반을 사정없이 흔들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고, 별일 없이 잘 극복하실 거라고 격려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혼돈과 두려움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 43:2)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오신 교우들을 보며 ‘이제는 예배당이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물인 공간이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빈 공간을 눈길로 더듬곤 했던 제 마음의 풍경이 공간의 외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주일을 준비하며 묘한 설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자기를 길들이면 일어날 일도 들려줍니다.

“난 보통 발소리하고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보통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굴 속으로 숨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는 소용이 없구,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금발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는 아니지만 한 분 두 분 교우들이 교회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면서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웃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한 길을 가는 벗들의 우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일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참 번거롭구나 싶지요?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성전에서 스스로 제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일이었지만,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저미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 것은 봉헌자의 몫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거둔다는 것처럼 긴장되고 꺼림칙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봉헌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밀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요즘처럼 방앗간에서 빻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절구에 밀을 넣고 공이로 찧고 또 찧었을 겁니다. 그리고 체질을 통해 거친 것들을 골라내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소금을 치고 향을 얹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통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봉헌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농사꾼으로 사셨습니다. 많진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시느라 한가한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철은 농한기이긴 하지만 필요한 가마니나 돗자리를 짜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여름은 참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토마토, 참외, 수박이 때맞춰 익어가고, 가지와 오이도 지천이었습니다. 토마토나 참외가 익어갈 무렵이 되면 어린 저는 날마다 밭에 나가 초록색 토마토 열매가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봤습니다. 며칠 후면 저걸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토마토와 참외를 살피러 밭에 나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알고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모릅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시면서 어머니가 그 열매를 따다가 목사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린 시절 저의 적이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몫을 가로챈 사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이렇게 목사로 평생을 살고 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를 노릇입니다.

주일을 맞이하기 전 어머니가 늘 하시는 일은 꼬깃꼬깃한 지폐를 다리미로 펴는 것이었습니다. 인두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고, 다리미에 숯을 담아 사용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바로 그런 준비 과정 자체가 어머니의 예배였습니다. 분주함 속에서 허둥거리는 현대인들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신화적 세계에 속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배는 그렇게 바쳐졌던 것입니다.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왔네요. 이번 주까지는 많지 않은 인원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7월 첫 주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신 접종을 하고 2주가 지난 분들은 20% 제한에 상관없이 예배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1미터 쯤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니 더욱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예배당에서 울려퍼지는 찬양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즘 교회학교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많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가끔 비가 내리긴 하지만 요즘 말갛게 개인 하늘과 간간이 떠있는 구름을 보노라면 저절로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로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가 떠오릅니다. 요즘은 이 곡을 많이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 곡을 흥얼거리노라면 순수하고 순박했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경의선 숲길을 걸었습니다. 양 옆으로 포플러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앙상하게 전지되어 좀 볼품이 없었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잘라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흥이 났는지 ‘미루나무가 포플러지요?’라고 물으며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만 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살짝 걸쳐놓고 갔다’는 노랫말이 참 정겹습니다. 왠지 이런 노래를 부르면 영혼이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옆지기가 이런 노래도 부르더군요.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 잘랑잘랑 소리난다 나뭇가지에 언덕 위에 가득 아 – 저 손들 나를 보고 흔드네 어서오라고”

비슷한 유년시대를 거쳤을 텐데 이 곡은 제 기억 속에 전혀 없습니다. 아내도 정말 오랜만에 이 곡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래도 그 가사를 다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정서의 원형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했군요. 삶이 무겁고 힘겨우니 가끔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이런 가벼운 일상도 즐겨보시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6월 2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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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강의 아침



새벽예배를 마치고 교회 현관에 나서면 와락 선선함이 밀려듭니다.


맑은 걸 지나 달지 싶은 그 청정한 기운이 가슴에 닿습니다. 어지러운 꿈자리, 깊은 호흡으로 어젯밤을 지워내면 가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아침기운으로 새롭습니다. 아무래도 아침을 여는 건 새들의 노래입니다. 어둠을 맞이하는 건 개구리, 어둠을 노래하는 건 소쩍이였고요. 참나무 많은 뒷산, 꾀꼬리 소리가 유난히 맑습니다.


솥이 적다고 울어댄, 어둠 묻혀 울어댄 소쩍이의 노래가 아침까지 이어집니다. 소쩍이 소릴 들으면 호루라기 안에 물을 넣고 불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오릅니다. 멀리서 뻐꾸기가 울고 꿩 소리도 납니다. 어떤 손님을 예감한 것인지, 까치가 빠지지 않습니다. 방앗간의 참새들도 야단입니다. 멀리 떨어진 작실 마을에선 장한 수탉의 울음소리도 들려옵니다.


천지에 가득한 새들 노래 소리, 단강의 아침은 그렇게 열립니다. 또 한 가지 빠짐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텅, 텅, 텅, 경운기의 발동을 거는 소리입니다. 이 마을 저 마을, 이 집 저 집 아침부터 경운기에 발동을 겁니다.


모두가 살아가는 소리입니다, 살아있는 소리입니다. 아침은 단강의 아침은, 살아있는 소리로 열립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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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그렇게 즐거운 모습을 전엔 본적이 없다. 버스 안, 좁은 의자 사이에 서서 정말 신나게들 춤을 추었다.이음천 속장님의 셋째 아들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버스 안은 온통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빠른 템포의 노래로 가득했고. 노래에 맞춘 춤으로 열기가 가득했다. 무엇 하나 막힘이 없었다.

 

오늘은 이해해 달라고 몇 분 교우들이 내 자리로 찾아와 이야기했지만 이해할 게 어디 있는가, 박수와 웃음으로 장단을 맞출 뿐 같이 흔들지 못하는 자신이 아쉬울 뿐이지. 춤과 술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만큼 나는 삶에서 멀어져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예수님이라면 그들과 어울려 좁은 틈을 헤집고서 멋있게 춤을 췄을 텐데. ‘으쌰 으쌰’ 장단을 맞춰가며종설이 아버지와 반장님의 멋진 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한쪽 다리를 흔들어 대는. 준이 아빠의 멋진 장단, 혹 밑 빠지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실 두들겨대는. 농사일에 찌든 몸과 마음, 그게 다 언제더냐 싶게 모두의 얼굴엔 함박웃음들이 번졌다.예전 같았으면 분명 나도 이런 모습을 보곤 촌스럽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전혀 아니었다. 정말로 신이 나는 일이었다. 이렇게라도 모두가 맘껏 즐거워 할 수 있다는 것, 신나게 춤추며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 추하거나 촌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속장님이 저리도 멋지게 춤 잘 추는 줄 오늘에야 알았네. ‘이보소, 속장님. 앞으로 그 춤 좀 자주 자주 구경합시다.’ 


- 뜨거운 열기 속,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 난 흔들리는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반은 거짓이라 해도 좋고반은 위선이라 해도 좋습니다.
- 그러면 남는 게 없습니다만 그래도 나 그대들 사랑합니다.그대 슬픔 알기에 더욱 사랑합니다. 그대 설움 알기에 더더욱 사랑합니다. 물빛 꿈은 꿈으로 질뿐 메마르고 낯선 生그대 어이없음 알기에 이만치서 다만 물기어린 시선으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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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삯


“어머니, 이렇게 하루 일하는데 품삯이 얼마예요?”


부천에 살고 있는 큰 아들이 모처럼 집에 내려와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담배 대공을 뽑으며 김 집사님께 물었단다.


“삼천 원이란다.”


삼천 원이라는 말에 아들은 놀라며 삼천 원 받고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느니 차라리 동냥 하는 게 더 낫겠다고 했다 한다. 하루에 쉽게 마셔버리는 커피 서너 잔 값에 담배 몇 갑 값에 고된 품을 파는 것이 도시에 사는 아들에겐 이해가 안 됐나보다.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해 줬단다.


“얘야, 그래도 그 값에 일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농사를 짓지. 그렇지 않으면 농사 못 진다.”


그렇다. 꼭 품값이 문제가 아니다. 가뜩이나 일손 모자라는 형편인데 서로가 서로의 일을 도와야지 별 수 있는가.


하루 삼천 원에 품을 파는 걸 의아하게, 미련한 일로 바라보는 도시의 자식들은 혹 부모님의 삶마저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아닐까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든다.


품값으로 계산하지 말라. 고향에 남아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슬프도록 아름답고 힘겨운 삶을.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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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농촌


학생부 토요모임. 성서연구를 마치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주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오늘날의 농촌문제였다. 처음에는 서로가 어색했는지 머뭇거렸지만 나중엔 편하게들 이야길 나눴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교통 문제였다. 하루에 서너 번 다니는 버스. 좀 더 많이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다음은 하천문제가 나왔다. 따로 쓰레기장이 없다보니 개울이 쓰레기로 더러워졌고 깨끗한 물이 고이지 못하니 목욕도 못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가을에만 치우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새로운 재배방법을 도입하여 계절별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되었다.


또한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도시 공장으로 내보내는 부모님들의 결정이 형편 때문임을 알지만 못내 원망스러운 것이다.


농협에 대한 문제도 나왔다. 융자 이자가 높다는 것과 이자 갚다가 볼일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한 어떤 대책이 있어야겠다는 것, 저축시 농협 이자가 높지 않다는 것, 농협 직원들이 반상회에 참석하여 농사정보를 가르쳐 주면 좋지 않겠냐는 것 등이었다. 


가게와 문방구가 없다는 것, 애써 농사를 지어도 중간 상인들의 횡포가 너무 심하다는 것,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 번 알아보자고 제안을 했다.다음 주엔 그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야기를 마치려다 문득 생각이 나 학생들에게 묻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때에도 단강에 남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자식들이나 데리고 내려오겠다는 것이다. 그렇담 그때엔 누가 남아 그들을 맞아줄 수 있는 것인지. 지금 나타난 문제도 문제려니와 더 큰 문제는 현재 드러난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들만이라도 이 땅에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저 그 말은 좋은 말일뿐, 현실성이 없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오늘의 농촌, 언제나 떠난 이들이 돌아올까. 조상이 물려준 땅에 당당하게 남아 이 땅 지킬 수 있을까.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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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벽이 없는 집

 


사방의 벽이 없는 집
바람의 벽이 있는 방

오랜 세월을 견뎌낸 나무들이 
네 개의 기둥이 되고

나이가 비슷한 나무들이 
가지런히 지붕이 되고

누구는 신발을 신고서 걸터 앉아 
손님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신발을 벗고서 올라 앉아 
주인이 되어도 좋은

에어컨도 필요 없고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벽이 없는 집

부채 하나로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면
스스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신선도 되고

먼 산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물 같이 구름 같이 그리 흘러가는 운수납자도 되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보고 있으면 
그대로 보리수 나무 아래 앉은 부처가 되는 

지고 가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서
십자가 나무를 생각하는 바람의 방

이곳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든지 길 위의 나그네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집

바람의 벽이 있는 방
바람이 주인이 되는 방에서 

한 점의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가
흔적 없이 지나는 순례자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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