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日記

      
          
우스운 일이다
피하듯 하늘을 외면했다
무심코 나선 거리 
매운바람 핑곌 삼아 고갤 떨궜다
구석구석 파고들어 
살갗 하나하나를 파랗게 일으켜 세우는 무서운 추위 
그 사일 헤집는 매운바람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그게 바람 탓이려니 했다
가슴속 어두움도 잿빛 하늘 탓이려니 했다
우리 거짓의 두께는 얼마만한 것인지 
우린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건지
걷고 걸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리 
쉬운 祝祭
네가 보고 싶어
이처럼 흔들릴수록 네가 보고 싶어
뭐라 이름 하지 않아도 분명한 이름 
구체적인 흔들림과 장식 없는 쓰러짐 
그 선명한 軌跡
목 아래 낀 때를 네게 보이며 
난 네 吐瀉物이 보고 싶은 거야
바람 탓이 아니다
추위 탓이 아니다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어둠속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우리들은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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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보세요

 “방앗간 참새 왔어~!”  


길 건너 덕리에 사는 권 씨 할아버지의 약국 문 여는 소리다. 스스로 참새가 되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느새 방앗간의 주인이 된다. 82세의 권할아버지는 산 밑의 오래된 옛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6남매를 낳고 키운 오래된 집은 늙은 부부의 거친 피부처럼 누런 빛깔을 띠고 여기저기 주름과 틈이 생겼으며 검은 그름이 나이테처럼 쌓여있다.


“아부지 오셨어요! 때마침 커피타임인데 아부지도 한잔 허실라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려, 한잔 줘 바. 개미다방 미스리보다 나을라나?”로 되받아 치신다.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가 요즘은 밭도 아닌 밭 비탈에 앉아 하루 종일 풀을 뜯는데 말려도 안 듣는다는 하소연부터 뒤뜰에 심겨진 감나무에 감이 얼마나 열렸는지 등 그저 그런 이야기를 곁들어 달짝지근 쌈사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할머니 안부를 물으면 할아버지는 “맨날 여기저기 아프기만 한 헌 마누라 버리고 새 마누라 하나 얻어야겠어. 아까 물은 걸 묻고 또 묻고..., 대답하기도 진이 빠져. 힘들어서 내가 먼저 죽겄어.” 하시며 투덜거리신다. 한 해 전부터 치매 약을 먹고 계시지만 할머니의 기억력은 자꾸만 나빠지고, 늙어짐은 가속도가 붙어 제어가 안 된다.  


“그럼 제가 이쁜 새 마누라 한 번 알아볼까요?”라고 너스레를 떨면 “그려!” 답하시고 우린 허허실실 웃는다. 말 안 듣는 미운 아이가 되가는 헌 마누라에게 입힐 고운 빛깔의 새 옷을 사고, 혹 길을 잃고 헤맬까 걱정되어 읍내에 나가면 헌 마누라의 손을 꼭 잡고 다니시는 할아버지는 “우리 할멈 입맛 돋게 하는 약 없을까?”라고 내게 묻는다. 방앗간 약사를 깔깔 웃게 하다가도 훅 하는 사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참새 할아버지는 돌담마을의 늙은 채플린이 되려나 보다.  

 

사진/김승범


창문을 여니 텃밭에서 열심히 배추를 손질하는 뒷집 할머니가 보인다.


“어머니, 올해 배추 잘 키우셨네! 추운데 너무 밭에 오래 계시지 말고 쉬엄쉬엄 하세요. 독감예방주사는 맞으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럼 평소 말이 없는 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드신다.


김 할머니는 봄부터 가을까지 하루 종일 밭에서 살다시피 일을 하신다. 그런데 몇 해 전 여름 할머니는 평소와 다르게 게으름을 피우셨다. 일하다 말고 집에 들어가시거나, 미룬 적 없던 밭일을 미루셨고, 어떤 날은 풀이 자란 밭에 멍하니 앉아 계신 할머니가 영 수상쩍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할머니께 “어디가 안 좋으시냐? 요즘 왜  게으름이시냐?” 물으니 이런저런 몸의 불편함을 말하시는데 그 증상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큰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 보시길 권하였지만 할머니는 자식들이 바쁘다며 자꾸만 미루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큰아들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직접 전화를 했고, 어머니가 큰 병원을 가서 검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할머니가 최근 드시는 약과 요즘 느끼시는 증상을 요약해서 문자로 보내 드린 뒤 의사에게 보여줄 것과 특별히 심장을 체크해보셨으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들과 함께 병원에 가신 할머니의 병명은 심근경색이었다. 이미 관상동맥 3곳이 막혀 있어서 진료 다음날 아침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병원에 간 다음날 바로  관상동맥 스탠드 시술을 받으셨고 무사히 퇴원하셨다. 얼마 후 김 할머니의 아들은 농사지은 블루베리 한 상자를 들고 약국에 오셨고,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실 내가 한 일이라곤 할머니의 하루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가진 것 뿐 이지만 그 사소한 관심이 할머니에게 삶을 조금 더 누릴 기회가 되었다. 오랜만에 시골동네약사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한 것 같아 보람되고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한 번의 죽을 고비를 잘 넘기셨으니, 한동안 할머니는 자신의 텃밭을 지키실 것이고 나는 텃밭의 할머니를 향해 사소한 안부를 조금 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큰 도시로 나가서 약국을 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촌스러운 사람이 ‘눈뜨고 코 베인다’는 도시에 살다가 그나마 낮은 코마저 베일까 무서워 못가요. 헤헤.” 

나는 졸업 후 규모가 큰 대학병원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동인구가 많은 도심 지역에서 약국을 운영한 적도 있다. 우연히 지금의 약국을 인수하게 되었고, 15년 넘게 작은 시골 약국의 약사로 살고 있지만 나는 대학병원이나 도심의 약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처음 약국을 시작했을 때 나는 약국에 오시는 분에게 아픈 곳과 필요한 약만 질문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분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시며 어떻게 사는 분일까?”라는 내가 만난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약국에 오시는 분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근육통약을 사러 오신 분에게는 어떤 일을 하는지 물었고, 고혈압이나 당뇨약을 받으러 오신 분에게는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물었다. 좀 더 친해지면 지난 주말엔 무얼 하고 보내셨는지? 가족 구성원은 어찌 되는지 물었고, 멀미약을 사가지면 어떤 여행을 좋아하시는지 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대부분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신의 애기를 들려주었다. 마치 누군가 물어주길 기다린 사람처럼 내가 묻지 않는 부분도 자신의 애기를 들려주었다. 바쁜 대학병원이나 도심의 약국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인데, 한가한 시골약국이어서 이런 수다가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이를 막론하고 ‘꿈이 뭐예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말문을 닫고, 어떤 이는 생각에 잠기고, 어떤 이는 허허 웃는다. 나이가 들수록 대답은 옹색해 진다. 옹색한 꿈일지라도 나는 그들의 꿈에 대해서 듣고 싶다. 간혹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나는 그들의 꿈꾸는 표정을 보는 것과 꿈꾸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한가한 시골약사와 동네 사람의 수다는 고리에 고리가 걸려 어릴 적 기차놀이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서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진다. 나를 믿고 일부러 작은 약국을 찾아와 주는 분들에게 고맙지만, 나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부담감도 커진다. 내가 질병에 대한 최신 치료정보를 미처 몰랐거나 또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그로 인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까봐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신뢰에 대한 부담감이 익숙한 업무에 무감해지고 게을러지는 나를 자극하고 다시 공부하게 만드니 적당한 부담감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약이 된다. 하면 할수록 해야 할 공부는 왜 자꾸 늘어만 가는 지, 기억력은 자꾸 떨어지는데 이놈의 공부는 참 끝도 없다. 

처음으로 약국을 개국하는 후배약사들이 약국을 잘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해올 때가 있다. 나는 작은 시골약국의 약사인지라  말해 줄 경영노하우가 별로 없지만 나름 도움이 될 만한 경험담을 나누려고 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꼭 말해주고 싶은 게 있다. 어쩌면 너무 상투적인 말인지도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나는 후배약사에게 말한다. 

“약국을 할 때 손아래에 있는 돈 통을 보지 말고, 눈앞에서 서 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세요. 그 사람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조금 더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당신은 건강한 약국의 건강한 약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고 최고급 인테리어의 멋진 약국에서 다양한 약을 가득 쌓아놓고 있다고 해도, 당신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가 건강하도록 돕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거예요.”

한 사람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대화와 삶을 나눠야 할까 싶어 너무 막연한 말인 것 같지만, 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고 다시 되돌아 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사는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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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다. 얼마전 사별 카페에서 만난 네 분과 함께 사별 이야기를 담은책 <나는 사별하였다>를 출간하였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 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화성에서 작은 시골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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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다

 


펼치다
책의 양 날개를

두 손의 도움으로
책장들이 하얗게 날갯짓을 하노라면

살아서 펄떡이는 책의 심장으로
고요히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느리게 때론 날아서
글숲을 노닐다가 

눈길이 머무는 길목에서 멈칫
맴돌다가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의 허공을

가슴으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이 감당이 안 되거든

날개를 접으며 
도로 내려놓는다

날개를 접은 책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책이지만

아무리 내려놓을 만한
땅 한 켠 없더래도

나무로 살을 빚은 종이책 위에는 
무심코 핸드폰을 얹지 않으려 다짐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점의 숨까지
책과 자연에 대하여 지키는 한 점의 의리로

하지만 내게 있어 
책은 다 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책
탐진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을 말함이다

그러한 책 속에는
사람의 손을 빌어 쓰신 
하늘의 뜻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학급문고 만들기 숙제로 주어진
책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 처음으로 들어간

동네 모퉁이 작은 서점 그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한 그루 어린 나무가 되었다

서점 안에 있는 책들의 제목을 일일이 모두 다 
제 가슴에 비추던 중학생 그때의 마음은

오늘도 한결같아서 
고즈넉이 혼자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고

자유의 푸른 바람이 펄럭이는
하늘 냄새가 나는 그런 고마운 책에게는

자유의 날개를 펼쳐주고 싶다
내게 주신 이 작고 고마운 두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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