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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68

무인도 둘러앉아 얘기하던 한 아이가 무인도에 떨어지면 뭣부터 하겠느냐 물었을 때 아이들은 돌아가며 말했지 살려 달라 모래 위에 크게 쓰든지 불을 피워 연기를 올리던지 지나가는 배를 기다려 옷을 흔들겠다고 뚱딴지 같이 어떤 녀석은 뒷간부터 짓겠다더군 뭐라 할까 망설이다 난 발가벗고 잠을 자고 싶다 했어 모두들 웃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어 인습의 굴레란 참 우스운 것이지 무섭기도 하구 언젠지도 모르고 한번 쓰기만 하면 좀체 벗기는 어려운 것 문득 거울 속 얼굴과 바라보는 마음이 다른 것 허우적거려도 잡히는 것이 철저하게 날 붙잡고 있는 것 정말이야 내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먹을 걱정 살 걱정 그런 것 모두 잊고 그냥 잠을 잘 거야 모두 벗고 팔다리 맘대로 뻗고 말야 그런데 무인도가 있을까 사람 살지 않는 섬이 아직도.. 2021. 5. 31.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입바람에 날아갈까 손바람에 흩어질까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잠잠히 있었지 몸으로 숨 한 점 잇는 일이 허공으로 손길 한 줄 긋는 일이 땅으로 한 발짝 옮기는 일이 순간을 죽었다가 영원을 사는 바람의 길이라며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숨 한 점 나누었지 하지만 한 점도 모르는 이야기 몰라도 훌훌 좋은 숨은 바람의 이야기 2021. 5. 31.
성품통과 가나다순이어서 그랬을까, 58명 중에 내 차례는 맨 나중이었다. 우르르 나가 선 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지막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인사를 했다. 간단한 소개를 들은 뒤 뒤로 돌아섰다. “可한 사람 손드시오.” “否한 사람 손드시오.” 잠시 후, “네, 됐습니다. 이상으로 준회원 허입자 성품통과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준회원 허입 성품통과가 끝났다. 이제 준회원이 된 것이다. 솔직히 난 아직도 잘 모른다. 한편 모르고도 싶다. 얼마나 지나야 목사가 되는 건지, 또 얼마가 지나야 그 불편한 시험 안 치러도 되는 건지. 지난번 시험 볼 땐 그럭저럭 외웠었는데 쉽게 잊고 말았다. 한심한 노릇이다. 잠깐, 정말 잠깐이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돌아서 있던 그 시간에 정말 기분이 묘했다... 2021. 5. 30.
에셀도서관에 부는 바람 나에게 특별한 두 편의 동화를 고르라면 와 이다. 이 책은 내가 글을 배운 이후 내가 처음 읽어 본 동화책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인 부모님은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산골마을 떠나 정읍으로 나오셨다. 고향의 논밭을 팔아 변두리에 작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착했지만 학력이 낮은 부모님이 고를 수 있는 돈벌이는 제한적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을 하셨다. 가족이 먹을 양식은 직접 농사 지으셨고, 5남매를 가르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것 같다. 보일러공, 집짓는 일, 수레에 과일과 야채를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파는 노점상, 공장직공, 청소부 등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합친다면 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경험.. 2021. 5. 30.
예배당 대청소 예배당 대청소를 했다. 몇 번 얘기가 있던 것을 하루 날을 잡아 다함께 하자 했는데, 그것이 주일낮예배 후로 정해졌다. 제단 커튼도 떼 내고, 창문 커튼도 모두 떼어냈다. 숨어있던 거미줄이 제법이었다. 막대기 끝에 빗자루를 매달아 거미줄을 걷어냈다. 유리창 틈새 먼지와 오물도 털어내고 구석구석 걸레질도 했다. 밖으로 가져나온 커튼은 커다란 함지에 세제를 풀고 발로 꾹꾹 밟아 빨았다. 남자 교우들은 예배당 주위 바깥 청소를 했다. 자루를 들고 다니며 온갖 오물과 쓰레기들을 주위 담았다. 우물가로 가보니 김천복 할머니가 발을 걷어붙인 채 양동이 안에 들어가 빨래를 꾹꾹 밟고 있다. “아니, 할머니가 다 하세요?” 했더니 할머니 대답이 걸작이다. “더 늙으면 못할까 봐유.” 내년이면 여든, 얼마 전엔 심하게 .. 2021. 5. 29.
윤동주 시인의 하늘, 그 원맥을 <나철 평전>에서 찾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일본인도 사랑하는 세계 평화의 시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 아름다운 시인, 그런 윤동주 시인의 하늘이 나는 늘 궁금했었다. 그 하늘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학술서와 문학서에선 어린 시절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마을인 북간도, 그곳 마을에 살던 이웃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윤동주 시인의 하늘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펼쳐지는 하늘은 분명히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다. 시에서 크고 밝은 한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인이 윤동주인 셈이다. 나는 늘 그의 하늘이 궁금했었다. 그 하늘의 원맥이 궁금했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과 관련한 대부분의 책들 그 어디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원맥을.. 2021. 5. 29.
오누이의 새벽기도 새벽기도회, 대개가 서너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날도 그랬다. 적은 인원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뒷문이 열렸다. 보니 승학이가 들어온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다. 그러더니 그 뒤를 이어 승혜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들어온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승학이 동생이다. 엄마 잠바를 걸치고 온 것이 쑥스러웠나 보다. 두 어린 오누이의 새벽예배 참석. 난롯가에 나란히 앉아 무릎을 꿇는 그들을 보고 난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저 아이들, 무슨 기도를 무어라 할까. 순간, 입가 가득 번지는 주님의 웃음이 보일 듯 했다. 어린이들 별나게 좋아하셨던 그분이셨기에. 1988년 2021. 5. 28.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시 84:5-7)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5월 말인데도 며칠 선득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무실에 장시간 앉아 있다가 몸이 차가워졌다 느끼면 화단에 나가 볕바라기를 합니다. 꽃들의 향연에 슬며시 끼어들어 벌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기도 합니다. 꽃은 싫은 내색조차 없이 자기 향기를 나눠줍니다. 나눠주고 나면 텅 비어 버릴까 걱정스럽지만, 향기 창고가 비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날아와 이 꽃 저 꽃 문을 .. 2021. 5. 28.
흐린 날의 日記 우스운 일이다 피하듯 하늘을 외면했다 무심코 나선 거리 매운바람 핑곌 삼아 고갤 떨궜다 구석구석 파고들어 살갗 하나하나를 파랗게 일으켜 세우는 무서운 추위 그 사일 헤집는 매운바람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그게 바람 탓이려니 했다 가슴속 어두움도 잿빛 하늘 탓이려니 했다 우리 거짓의 두께는 얼마만한 것인지 우린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건지 걷고 걸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리 쉬운 祝祭 네가 보고 싶어 이처럼 흔들릴수록 네가 보고 싶어 뭐라 이름 하지 않아도 분명한 이름 구체적인 흔들림과 장식 없는 쓰러짐 그 선명한 軌跡 목 아래 낀 때를 네게 보이며 난 네 吐瀉物이 보고 싶은 거야 바람 탓이 아니다 추위 탓이 아니다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어둠속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우리들은 1988년 2021.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