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고난 앞에서 모른 체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286에 인용된 엘리 비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사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걷는 효창공원에 흰철쭉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질서 있게 자리바꿈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산수유꽃이 다 떨어지고 복사꽃이 시들해져서 서운했는데, 새로운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새 소리도 제법 활기찹니다. 농가월령가는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며 분분히 나는 범나비의 자유로움을 바라보면서 “미물微物도 득시得時하여 자락自樂함이 사랑홉다”고 노래합니다. 생명은 크거나 작거나 무엇이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뿐입니다. 분주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작은 생명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우주의 장엄한 춤을 추고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모든 다른 존재들에 의해 지지된다. 역으로 각 존재는 공동체 내의 모든 다른 존재들의 복리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형성하는 데에 바로 정의正義가 있다.”(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p.91)

지지받는 동시에 기여하는 것, 그 창조적 공생 관계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마치 고치 속을 파고들 듯 칩거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이제는 가정을 제외한 어떤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지요? 그만큼 지금 상황이 엄중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봄은 우리를 밖으로 자꾸 불러내려 하지만, 가급적 다중이 모인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한 뜻을 잘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세상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도처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옵니다. 칼과 창날이 부딪는 소리 못지않게 우리 심정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거친 언사들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보는 풍경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그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는 지나치게 선명한 입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흑과 백으로 가르기에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은 칼로 두부모 가르듯 산뜻하게 가를 수 없습니다. 참, 선, 빛을 지향하지만 내 속에 있는 거짓, 악, 어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다 보면 유머가 사라집니다.
삼척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과 함께 쓴 책과 더불어, 올해 맡은 6학년 학생들이 쓴 문집을 한 권 보내주셨습니다. 늘 심각한 책을 보다가 아이들의 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낄낄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진하고 거침없는 아이들의 표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전혜원 어린이의 동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동생 놈’입니다. 제목을 잡는 솜씨부터 남다르지요? 1연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와서 날 때린다.
같이 게임하다가 지면
지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한다.
그냥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게임은 승패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면 승복하면 좋으련만 동생은 패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합니다. 누나가 굳이 자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동생에게 좀 져주면 어때.’ 동생의 마음속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분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니 누나 탓이라며 누나를 때리는 겁니다. 그 귀여운 구타는 누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누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시의 2연입니다.

동생이란 존재는 참 수학책 같다.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다.
자주 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
동생도 포기해야겠다.

이 어린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동생’과 ‘수학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시적 언어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까닭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킴으로 우리 정서에 틈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누나가 동생을 보고 ‘수학책’ 같다고 말한 것은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이야 왜 없겠습니까? 다만 수학에 취미가 없다 보니 수학은 그야말로 해답 없는 영역이 된 것이지요. 이 어린 시인은 자기가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난데, 뭘 어쩌겠느냐’는 듯 천연덕스럽습니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동생도 포기해야겠다.”라는 구절에서 저는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시를 읽는 이들은 ‘동생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 심각한 관계단절의 선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동생인 걸요.

우리 어른들의 어법 속에도 이런 여유와 여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줬기에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상한 체 하는 사람들snobbish people’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입니다. 거만하다, 속물적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어 선택을 유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영국적 고상함인가요? 사람들이 그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은 그 속에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태도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똑같은 언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어를 가려 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각자의 세계관과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언어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상대의 언어가 거칠어지면 나의 언어도 따라 거칠어집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언어를 주고받다보면 마음 또한 멀어집니다. 교만과 자애심에서 나온 말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단정적인 언사는 대화의 의지를 차단합니다.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피루스는 기원전 3세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있던 에피루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더의 후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할 욕망을 품고 있던 그는 로마와의 전투에 코끼리 부대를 끌고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가까운 친구와 용맹스러운 장군들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피루스의 승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승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사는 게 꼭 이 모양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거두는 승리는 사실은 이중의 패배입니다.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 4:29-32)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말’이라 해도 적절한 때를 분간하며 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늘 살펴야 합니다.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벌써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라고 다짐했던 우리 마음도 어지간히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아픔을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한 아픔을 외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한다 해도,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한을 품고 살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기를 빕니다. 주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이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그리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4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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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작실 병직이 네가 이사를 갔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연극 발표 시간엔 아합 왕 역을 맡아 참 멋있고도 씩씩하게 연극을 잘 했던 병직이, 병직이 네가 문막으로 떠났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떠난 것은 의외였다. 곧 환갑의 나이. 아무래도 떠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그냥 내 논 부쳐도 남는 게 없는 판에 남의 땅 빌려 붙이려니 그 사정 오죽했으랴만, 두 사람이 이제 나가 무슨 일을 어찌 할까 짐작이 잘 안 된다. 빨갛게 잘 익은 산수유나무를 사이에 둔 아랫작실 양담말 앞뒷집이 모두 텅 비어 버렸다. 


며칠 있으면 종하 네가 이사를 간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 밑에서 살던 종하 종일이 종석이가 결국은 떠나게 됐다. 다 모여야 열 명뿐인 학생부에 종하, 종일이가 빠지면 그 구멍은 휑하니 클 것이다. 재워 주는 건 걱정 없으니 이사 가서라도 버스 타고 오라고, 보내기 아쉬운 교회 식구들은 거듭거듭 같은 얘길 하지만 그것 또한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김승범


교회 옆집인 승학이 네도 망설이고 있다. 지난번 종설이 종숙이가 그런 것처럼 승학이 승혜 승호를 원주 시내로 내보내려는 것이다. 시내에 집을 마련해서 보내려 하는데 아이들만 보낼 수는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리자니 노인네들 내쫓는 것 같아 쉽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


끝정자 연미 네도 떠난다는 얘기가 있다. 수원 인근에서 일을 하는 연미 아버지, 방이 마련 되는대로 떠날 모양이다. 그러면 연희 연미 연경이 경호 경민이도 떠나게 된다. 학교도 마을도 교회로 그만큼 비게 된다. 


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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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

사진/김승범

 





내게 있는 모든 의지를 떨구십니다

봄날의 꽃잎처럼 사방 흩어 놓으십니다

이 땅에 내 것이라 할 것 없는 나는

가난한 나무처럼 제 자리에 머물러 

가만히 눈 감고 안으로 

푸르게 깊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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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손



트럭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은 설정순 집사님도 남편 박동진 아저씨도 모두 눈이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작실로 올라가다 만난 이사 차, 고만고만한 보따리들이 차 뒤에 되는 대로 실려 있었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문막으로 이사를 나가는 길이다. 때가 겨울, 두 분 모두 환갑의 나이, 이제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내 땅 하나 없이 남의 땅 붙이는 것도 이젠 한계, 두 분은 떠밀리고 있었다. 드신 약주로 더욱 흐려진 아저씨의 젖은 두 눈이 안타까웠다. 


“건강하세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써 웃으며 그렇게 인사할 때 두 분은 차창 밖으로 내 손만 마주 쥐었다. 뭔가 하려던 말이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에 막히고 말았다.

 

마침 도로 포장을 위한 공사 중, 올라오는 차와 마주쳐 이사차가 길옆 논으로 피해 들어갔다. 한 바퀴 논을 돌아 나온다는 것이 그만 논에 빠지고 말았다.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달라붙어 밀었지만 계속 헛바퀴, 진흙만 튕겨냈다. 궂은 길, 떠나기도 쉽지 않았다. 차를 후진시킨 후 짚단을 깔고서야 어렵사리 길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이내 떠난 차. 저만치 멀어지면서도 차창 밖 한참 동안 들어갈 줄 모르는 손, 흔드는 두 손, 훠이 훠이, 이젠 돌아오기 쉽지 않을 고향을 향해,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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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책





돈냄새가 없는 책
추천사가 없는 책

전쟁 후 서울에서 태어나
이 땅을 살아오는 동안

반평생의 구비길을 넘고 넘으며
글에서 없는 냄새를 풍길 수 있다니

글을 읽으면서
있음을 찾으려다가

이 땅에서 
나를 세운 흔적이라고는

마땅히
없고 또 없어서

눈물을 지우고서 바라보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하늘처럼 

출렁이며 
때론 잠잠한 맑은 글에

비추어 되돌아볼 것은 
없는 나 자신 뿐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최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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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송대선의 시편묵상 2021. 4. 14. 06:05

시편 2편 4절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공동번역>)

 

笑蜉蝣之不知自量(소부유지부지자량)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살이의 소동이라!

 

4절에서 시인은 그 난장판의 야단법석에서 하느님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1990년 보이저 2호가 바쁜 여정을 잠시 미루어 몸체를 돌려 지구의 모습을 촬영하고는 그 사진을 지구에 전송하였지요. 61km 떨어진 곳에서 찍은 지구는 겨우 0.12 화소에 불과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우주에서 인생이 몸붙여 사는 지구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더 선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임무를 제안하고 이끌었던 칼 세이건은 그 사진을 통해 얻은 감명으로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 지구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면 지구는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류에게는 다릅니다. 저 점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 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한 자신만만했던 수 천 개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가, 수렵과 채집을 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영웅과 비겁자들이,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런 문명을 파괴한 사람들, 왕과 미천한 농부들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들, 엄마와 아빠들, 그리고 꿈 많던 아이들이, 발명가와 탐험가, 윤리도덕을 가르친 선생님과 부패한 정치인들이, '슈퍼스타'나 '위대한 영도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성자나 죄인들이 모두 바로 태양빛에 걸려있는 저 먼지 같은 작은 점 위에서 살았습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찌 이리도 무지하고 어리석을까요? 마치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고 오늘이 시간의 전부인 양 소란을 피우고, 가을을 알지 못하는 여치는 강렬한 햇살과 쏟아지는 소나기의 여름을 세계의 전부인 양 노래합니다. 그러니 철 따라 나는 새들이 말하는 내년과 사시사철 꽃이 핀다는 강남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수 억년의 시간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강건하면 80이라는 이 인생의 숫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진/김승범

 

하루를 늘리셔서는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순간순간 그 사이에 하늘의 뜻을 곡진히 담아내시곤 천 년처럼 대하시는 그분의 세밀함과 무엇하나 놓치지 않는 신비한 손길. 아울러 수많은 세대가 거듭되는 장구한 천년을 바라보시면서도 그저 해뜨고 지면 지나는 하루처럼 여기셔서 추구(芻狗)처럼 대하시는 그분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지요?

 

이러니 신앙이란 은혜을 입어 조금씩 깨달으며, 그분의 지혜를 빌어 배워갈수록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지고 알 수 없음 앞에 겸허히 무릎 꿇는 것 아닐까요? 점점 더 모르겠고, 알 수 없음에 젖어드는데 괜히 마음만은 조금씩 그분을 향한 미더움으로 든든해지고 안온해지는 것 아닐까요? 신앙이란 그분의 자비에 젖어들고 그 사랑에 맛들일수록 인생의 모호함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님의 신비를 우러르며 빈 마음이 되는 것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인생들은 신학대전을 쓰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체험하자 펜을 내리고는 입을 다물었다는 이야기를 아주 떠들썩하게 예화로 들어놓고도 그의 말없는 가르침에 귀기울이기보다는 한낱 가십거리로 듣고 흘려보내고 마는 건가 봅니다. 이 모두 부지자량(不知自量)의 소치이지요.

 

조금만이라도 진지하게 들여다본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점점 더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지평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울러 하느님을 알아가며 그분과 점점 친밀해지는 것은 놀랍게도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여정이라는 거지요. 그분을 알수록 나 또한 선명해지니 그분을 체험할수록 내가 누군지, 어떤 인생인지 더 잘 알게 되지요. 내가 누군지 알면 자연 제 분수를 알고 이 인생 여정에서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말아야 할지를 구분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자기 분수를 아는 이의 믿음의 여정이란 무엇일지 상상해 봅니다.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창조세계를 놀이터 삼아 아무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그 품에 훌쩍 뛰어드는 자유의 여정일 터이며, 존재의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천진(天眞)을 누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분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는 이 미미한 것에 눈길을 맞춰주시고 받아주시니 그 오롯한 은총을 누리며 감사하며 그 영광을 노래하는 것 말고 도무지 할 일이 더 없지 싶습니다. 온통 자유와 감사로 가득하니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들의 헛된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힘씁니다. 자기들의 삶과 행위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하며 비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타인의 삶을 깍아내리고 덜 가진 이를 구차히 여기고 가난한 이를 게으르다 조롱합니다. 이 땅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저들이 옳아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소리침에 아랑곳없이 이 세상에서 새 길을 준비하십니다. 새로운 다스림을 계획하시고 당신의 뜻에 맞는 이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9절에서 그는 새로운 권능을 지니시고 교만한 배역자들을 부수십니다.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群逆粉碎兮 如瓦缶之毁裂(군역분쇄혜 여와부지훼렬)

어리석은 저들을 부수시리니

깨어지는 저들 오지그릇 부서지듯 하리라

 

공든 탑에 쏟아진 마음과 정성이야 적지 않겠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늘 애쓰며 마음 졸이기는 한없는 것 같으나 바스라져 가뭇없는 먼지가 되는 것은 찰라입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애쓴 시간과 졸인 마음만큼 흩어지고 사라지는데도 오래 걸린다면 더 절망스럽고 계속되는 아쉬움에 노예가 되겠지요. 그러니 오지그릇 부서지듯 찰라에 부서지는 것이 차라리 은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걸음의 토대가 됩니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새로운 초대의 디딤돌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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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없어도 그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

시편 1편 6절b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공동번역》) 我主識善人〔아주식선인〕 우리 주님 선한 이 알아주신다(《시편사색》, 우징숑)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에 대한 사실적인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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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시편 1편 2절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공동번역》) 優遊聖道中 涵泳徹朝夕〔우유성도중 함영철조석〕 거룩한 말씀 새김질하며 거닐며 종일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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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시편 2편 1-3절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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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절 4절에서 시인은 그 난장판의 야단법석에서 하느님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 笑蜉蝣之不知自量(소부유지부지자량) 제 분수를 모르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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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1절 吾敵何多(오적하다) 내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시편사색》, 우징숑) 당신께 나아가기로 결심하거나 마음을 다지면 걸리는 것들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 저를 덮치면서 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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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4절 竭聲籲主(갈성유주) 온맘과 영혼으로 주님 당신을 부릅니다(《시편사색》, 우징숑) 그러니 그럴수록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렇게 제 속의 결심은 연약하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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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적들을 쳐주소서!

시편 3편 3절, 6절 그러나 야훼여! 당신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들어 주십니다.〔3절〕 적들이 밀려 와 에워 쌀지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6절〕(《공동번역》) 護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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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시편 3편 2절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공동번역》 彼無神助 其命幾何(피무신조 기명기하) 하느님이 저를 돕지 않으시니 그 목숨 앗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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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이를 특별히 마음에 두시네fzari.tistory.com/2559

 

경건한 이를 특별히 마음에 두시네

시편 4편 3절 알아 두어라, 야훼께서는 경건한 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니, 내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들어 주신다.(《공동번역》) 須知主公明 忠良是所秩(수지주공명, 충량시소질) 모름지기 알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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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무엇이 인생의 참된 평강인지요fzari.tistory.com/2563

 

정녕, 무엇이 인생의 참된 평강인지요

시편 4편 6절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공동번역》) 衆庶喁喁望 何日見時康(중서옹옹망 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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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fzari.tistory.com/2568

 

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

시편 4편 2절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공동번역》) 嗚呼濁世子 冥頑盍有極(오호탁세자 명관함유극)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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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https://fzari.tistory.com/2580?category=974810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시편 5편 1, 2절 한숨짓는 까닭을 알아주소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모르는 체 마소서(《공동번역》) 鑑我默默情(감아묵묵정) 聆我哀哀號(영아애애호) 침묵으로 말씀드리는 저를 살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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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https://fzari.tistory.com/2588?category=974810

 

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

시편 5편 7절 당신의 크신 사랑만을 믿고 나는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하여 엎드립니다.(《공동번역》) 我欲入主室 暢沾主膏澤(아욕입주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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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https://fzari.tistory.com/2591

 

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

시편 6편 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공동번역》) 祈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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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징숑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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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23)

사진/김승범

 


에구구
시방 사월 허구두 중순인디
이게 웬 뜬금읍는 추위라냐
꽃들이 춥겁다
여벌 옷두 읍구만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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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별하였다> 읽기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4. 13. 07:09

 

곡의 여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콘서트가 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루체른 패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했습니다.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사라지듯 끝납니다. 작곡자는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음악을 끝내라는 요구에 더해 ‘죽어가듯이’(ersterbend)란 악상기호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말러 교향곡 9번이 작곡자 자신의 죽음과 뗄레야 뗄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지휘 동작을 풀지 않았고, 객석에서는 박수를 중단한 채 지휘자의 두 팔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객석은 무려 180초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앙코르를 외치거나 박수를 치는 관객을 너무 자주 보았던 터라 충격이 컸습니다. 작곡가 말러와 그 날 연주자를 향한 관객의 배려는 연주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 특히 제2장에 실린 네 저자의 글은 진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9번 교향곡을 떠올리게 만들 만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게 왜, 그리고 어떻게 문제가 될까요?

 

<나는 사별하였다>는 한희철 목사와 신학자 민영진 박사의 감동적인 추천사로 시작합니다. 1장은 네 저자가 살아낸 가슴시린 사별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심장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분량도 6장까지 중 가장 깁니다. 1장 끝에는 저자들에게 보내는 김기석 목사의 사려 깊은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실었습니다. 1장이 총론이라면 2장부터 4장까지는 각론입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읽는 사별자들에게 각각의 상황에 필요한 코멘트를 해줍니다. 4장 끝에는 아빠를 잃은 자녀들의 고백을 담은 소중한 기록과 만날 수 있습니다. 5장은 사별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18명이 나서서 아내나 남편을 막 떠나 보낸 후배 사별자들에게 주는 조언을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6장은 갑작스레 사별을 당한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 이를테면 상속 문제의 처리, 사망자 금융자산조회 방법, 아내나 남편이 타던 차나 지급받고 있던 연금 처리, 한부모가정에 대한 국가 지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나 모임 등을 친철하게 안내합니다. 편집 후기에는 김민웅 목사와 한종호 꽃자리 대표가 이 책을 내기까지의 과정과 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록 내지 꿀팁으로는 번역되거나 국내에서 씌어진 모든 연령을 커버하는 20권의 죽음 관련 서적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종종 만나는 한종호 대표를 통해 편집 과정에서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손에 넣기 전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리뷰 또한 읽었던 터라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앞과 뒤에 배치된 편집후기와 추천의 글들을 뒤로 물리고 1장으로 직행했습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이 겪은 사별 이야기 읽기는 한없이 늘어졌습니다. 읽기를 중단하고 멍 때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눈시울은 자주 붉어졌고 전율에 가까운 충격과 그것들이 불러낸 실존적 질문들로 머리는 꽉 찼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봉을 못 내리고 3분간 말러 교향곡 9번의 여운에 몸을 맡겼듯 저 역시 마음의 파문이 가라앉기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 명의 저자들은 남편과 아내를 사별한 자기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만 저는 아내를 먼저 보냈을 때와 내 죽음이 저벅저벅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두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1장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아니 1장에 갇히길 자청했습니다.

 

독후감은 써야 하겠는데 앞에 놓인 두 편의 추천사와 저자들에게 보낸 중간의 편지, 그리고 책 뒤에 붙은 두 편의 글로부터 자꾸 달아나게 되더군요. 한희철, 민영진, 김기석, 김민웅 목사는 개인적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글과 삶 모두에서 늘 배우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양한 죽음과 사별자들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성직자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네 분의 목사와 신학자의 글을 실은 건 바로 그 때문이라 추론합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 4장까지도 저자들이 아니라 의학이나 정신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로 하여금 정보의 객관적 신뢰성을 높이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목회 전문가와 의학 전문가들이 네 분의 저자 이야기를 앞과 뒤에서 보증해 주고 격려하는 방식도 잠시 그려보았습니다.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보는 다른 책에서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권쯤은 이 책의 네 저자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죽음과 사별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습니다.

 

통상 앙코르는 연주자가 평소 즐기는 곡이나 짧은 시간에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 껏 뽐낼 수 있는 곡 중에서 선택합니다. 코믹하고 신나는 음악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앙코르 전통도 나라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달리 앙코르에 야박하지 않습니다. 아니 요즘은 많은 클래식 연주회에서 앙코르 곡을 아예 사전 공지합니다. 그런 전통이 나라밖에도 많이 알려졌는지 외국 연주자들도 과거와 달리 우리나라에 오면 앙코르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장에서 브람스나 말러의 중후하고 심오한 교향곡 연주 후에는 앙코르를 연주하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전통이 있습니다. 곡의 여운이나 감동을 해치거나 또다른 정서와 뒤섞지 않으려는 배려이자 안전 장치인 셈입니다. 관객들 또한 무겁고 심오한 음악을 듣고 쉽고 발랄한 앙코르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말러 9번이나 브람스 4번 교향곡을 들은 날은 그 음악의 여운을 갖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분들은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성찰적이고 충격적인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네 저자의 글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습니다. 네 분 목사와 신학자의 글이 내용과 문장 모두에서 최고란 사실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저자들에게 이들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지도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사별하였다>는 4악장의 빼어난 교향곡만 듣고 책을 덮음으로 각자가 그 여운 속에 오래 머물렀다면 좋았겠다는 하나마나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꽃자리 출판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지 조금은 압니다. 단 한 권이라도 판매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런 맥빠지게 만드는 글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네 분 목사는 물론 꽃자리 출판사에도 미안한 맘이 큽니다. 그렇지만 혹시 저와 비슷한 독자들도 있을 거 같아 용기를 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에선 이 책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1장의 네 편 글의 어떤 부분에서 감동하거나 배움을 얻었는지를 중심해서 써보겠습니다.

 

 

 

택배로 이 책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활자화되는 서평도 아닌데 며칠째 못 끝내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네 분 저자들이 맞딱뜨렸던 비통한 상황과 겪었던 슬픔이 방향을 바꿔 제게로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우선인지라 찔끔찔끔 글을 올렸습니다. 의사, 간호사, 장의사처럼 매일 죽음과 대면하는 직업인이라면 모를까, 비사별자라면 누구든 네 분 저자들에게만 감정이입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으며 거듭해 물었습니다. '아내를 먼저 보낸다면 사별 온라인 카페에 글을 쓰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갈 거냐?'고. 대답은 'NO!'였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40대 초반에 아내를 잃었더라도 온라인 사별 카페를 거부할 자신 있느냐?'고. 대답은 여전했습니다. 누구든 앞날은 장담치 못하니 사별 카페에 가입할 수 있다는 여지는 남겨 둡니다. 만약 가입한다면 해가 몇 번 바뀔 때까지 활동을 계속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권오균 님처럼 마음 한 켠에선 온라인 사별 카페가 없어서 안 될 존재라고 느끼면서 또 한 편으론 이런 저런 이유로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겉돌고 있지 않을까. 내가 사별자가 아님은 사소해 보이는 온라인 사별 카페 가입 여부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떠난 보낸 남편이나 아내를 많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사별자들이 표현했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사별자와 자녀들이야 당연 그래야 하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까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희생자나 겨레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게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 우린 충분하게 학습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의 문제가 사적인 사별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점을 비사별자인 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더군요. 역시 저는 비사별자가 맞습니다.

 

많은 사별자들이 기록에 욕구를 갖고 있다는 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피터슨 선교사를 통해 아팠던 사실을 기록하는 일이 치유가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별자들에게 기록이 단순한 기억을 넘어 앞으로 살아가야할 방향성을 찾게 했다는 고백 또한 인상 깊었습니다.

 

"사별 초에 온라인 사별자 카페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일기처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나의 마음을 기록했었는데, 글을 써 가면서 차츰 내가 가야 할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200)

 

이 책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든 건 함부로 하는 사별자 앞에서의 말입니다. "위로랍시고 건네는 어떤 말도 듣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189)거나 "하나님이 너를 어찌 쓰시려고 자꾸 너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말이 "삼켜지지 않는 음식처럼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49)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이 글을 완성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 건 비사별자였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아내를 두고 그가 죽었을 때를 상정하며 구체적인 내용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힘들었고, 네 저자들의 글로 촉발된 내 죽음과 관련된 생각들을 글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곤혹스러웠습니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진 않겠으나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를 대비하여 정리 좀 하며 살자는 다짐입니다. 뒷 처리를 깔끔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뒷 처리가 필요 없는 삶을 살아야 함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이것뿐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 되겠습니다.

 

-이정숙

이정숙의 글을 읽으며 인용을 하거나 아름다운 문장이라 생각해서 친 밑줄 옆에 단 번호가 28번까지 이어졌습니다. 번호 없이 밑줄만 그은 문장도 여럿입니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쓸 문장이 아니더군요. 사유의 깊이에 놀랐습니다. 심리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 외로움을 정의하기 어렵다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외로움은 '내가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와 가깝다."(69)

 

이제부터 인용하는 문장은 이정숙의 아포리즘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가을이 무르익기 시작할 때 남편이 떠났고 나는 길에 떨어진 낙엽 하나 마음에 담지 못했다."(44)

"고통은 나의 믿음을 절망과 의심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신은 내게 변명하지 않았고, 내 분노 앞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는 그를 비웃고 의심하는 나로 인해 초라해졌고 모욕당했으며 상처받았다."(51)

"그의 삶이 여기까지로 족했다면 그와의 인연도 이것으로 족하다."(78)

"사별 후 나는 제일 위험한 사람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성적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으로 되어 가는 사람, 나를 수렁에 빠뜨릴 수도 있고 내게 가장 크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사별 후의 나를 관찰하며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과 벌이는 전쟁인지도 모른다."(67)

 

이쯤해서 이정숙 문장 옆에 끄적거린 메모 하나 소개합니다.

 

"내 심장을 뛰게 만든 문장은 정성을 들여 고치고 또 고친 게 아니다. 있는 감정 그대로를 쉽고 편안하게 쓴 문장이 날 울렸다."

 

그의 문장은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울린 이정숙의 문장은 평범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나를 웃기던 그의 못짓과 언어들이 그립다. 내 기억 깊은 언저리에 새겨진 나를 웃기던 그의 우스운 몸짓들이 이젠 나를 울린다."(59)

 

이 문장에 멈춰 왜 눈시울이 붉어졌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 한계를 벗어납니다. 가슴이 먹먹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여기에 적을 수 있을 뿐입니다.

 

 

네 저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다룰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제 관심사였습니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슬픔과 절망에 직면했던 사별자들이 인간의 모순과 비합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는 저자들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주제가 이성 교제나 재혼 이야기일 듯합니다. 임규홍은 "외로움을 달래려고 이성을 만나고, 홀로임이 두려워 이성을 만나”는 현실을 인정합니다. 사별자들은 "떠난 자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길 원할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떠난 사람이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끌어안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믿는 듯합니다(167-8). 시댁과 처가의 새로운 관계를 '불가원 불가근'의 관계로 다시 정립해야 한다는 어려운 이야기도 빼놓지 않습니다. 떠나 보낸 이가 평생 모은 재산 처리는 사별자 위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사별자는 이제 이전의 며느리나 사위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별은 하늘이 인연의 끈을 스스로 풀어 준 것이다. 결코, 사별자의 잘못도 아니고 흠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아니다. 그래서 남은 삶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형태로 거듭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이 그렇게 정해 준 것이다."(165)

 

상처한 여성을 과부라 부르는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여 스스로를 과부로 부르면서 그 호칭이 더 이상 상처가 될 수 없게 선방을 날린 이정숙의 시도는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더 빛나는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77)

 

권오균은 불치병에 걸린 신자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치유 집회를 비판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죽고 난 후 불교 공부에 심취했음을 밝힐 뿐 아니라 처음 참석했던 사별자 오프라인 모임이 먹고 마시며 노는 데 실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별자란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기 위해 그걸 용인한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김민경은 사별 초기에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옷, 신발, 주방 도구, 각종 침구류, 액세서리, 화장품 등의 필요치도 않은 물건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풀어보지도 못한 택배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 집안에 쌓이기 시작했다는, 주부로 하기 힘든 이야길 털어놓았습니다. 네 저자들의 이야기에 많은 독자들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하기 어려운 이런 이야기가 저들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담보해 주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연애 기간을 포함해 평생 단 한 차례도 말 다툼을 하지 않았던 부부였으나 한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 보낸 권오균은 이런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사별한) 다른 분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게 떠오른 생각은 인간은 참 사소한 일에도 괴로워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사별한 나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나 배우자가 다정하지 않은 것 정도는 괴로워할만 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매우 작은 일로 보이는 그 문제가 그들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 너무 뚜렷하게 보였다."(106)

 

이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합니다. 네 사람의 사별 이야긴 각자가 당했던 사별의 이유 만큼 반응의 표정과 회복 방법도 달랐습니다. 이정숙이 내면으로 파고 들면서 사유의 폭을 넓히며 의미를 추구했다면 김민경과 임규홍은 몸을 움직여 현실과 씨름하는 일에 더 매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정숙을 읽을 땐 문장에 빠져들었고, 김민경을 읽을 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지런하게 잘 정돈된, 너무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에 놀랐습니다. 단순성이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걸 생각나게 만든, 또는 절제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생각나게 만든 글이었습니다. 네 분이 보여 준 표정과 시도했던 노력들은 앞으로 사별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도전이자 먼저 걸어간 위로와 새로운 희망의 발자취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강유철/작가, 전 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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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기도

사진/김승범



수요저녁예배. 기도 순서를 맡은 집사님이 기도를 하다 말고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에 막혀 기도가 자꾸 끊겼다.


“농사는 시작됐는데.... 일꾼은 읍구..., 갈지두 못하고 있는 논밭을 보면 속이 터지구...,자식들은 모두 나가..., 곁에 읍구..., 세대를 잘못 만나...,”


뚝뚝 끊기는,
듣는 이 숨마저 따라 끊기는, 눈물의 기도.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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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송대선의 시편묵상 2021. 4. 12. 10:53

시편 21-3

 

어찌하여 나라들이 술렁대는가? 어찌하여 민족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이 사슬을 끊어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버리자!” 하는구나!(공동번역)

 

何列邦之擾攘兮 何萬民之猖狂(하열방지요양혜 하만민지창광)

世酋蜂起兮 跋扈飛揚 共圖背叛天主兮 反抗受命之王

(세추봉기혜 발호비양 공도배반천주혜 반항수명지왕)

吾儕豈長甘羈絆兮 盍解其縛而脫其韁?”

(오제기장감기반혜 합해기박이탈기강?”)(시편사색, 우징숑)

 

열방이 날뛰고 만민이 미쳐 돌아가네

세상 우두머리들이 거역의 깃발 세우고 모여서는

우리 주님 배반을 모의하는구나

벗어나자! 더 이상 말씀과 명에 잡히지 말자!

 

 

사진/김승범

 

가만히 읽어보면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시인이 느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의 세계를 직시하는 눈매라 여겨집니다. 기를 쓰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벗어나 제멋대로, 제가 옳다고 여기는 길을 고집하며 주위의 사람들까지 부추기는 아우성입니다. 자기 의에 휩싸여 바벨탑을 쌓는 인생들의 고집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거스르는 심성을 향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제 옳은 길이라고 거슬려 달려서 얻은 결과로 그분의 창조의 결정체인 푸른 지구는 파탄지경에 이르러 기후 위기가 닥쳐오고 뭇 숨붙이들이 삶의 영역을 잃고 내몰리어 멸종의 길로 가더니 끝내 코로나라는 팬데믹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그러니 코로나 바이러스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할까요? 공존해야 할 지구의 생명체들은 온갖 구분과 차별로 나뉘어져 경쟁하며 상대의 것을 뺏으려 합니다. 가진 자는 남은 것을 썩히더라도 더 가지려 하고, 주린 아이는 젖을 빨 기력조차 없습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가진 부자가 손님 접대를 위해 이웃의 가난한 이의 가족과 같은 한 마리 양을 잡자고 칼을 들었다는 옛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똑똑한 인생들이 합리적 이성을 사용하며 발전시키고, 더 나은 세계로 내디딘 한걸음이 점점 알 수 없는 어둠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경고음이 울리고 위기의 신호가 들리는데도 탐욕은 더욱 인생을 부추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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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https://fzari.tistory.com/2591

 

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

시편 6편 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공동번역》) 祈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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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징숑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을 덧붙인 책 시편사색》을 펴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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