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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47

호박꽃 호박꽃이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거름더미 담벼락 논둑 빈터 어디다 심어도 여기가 내 땅 뿌리를 내리고 쑥쑥 순을 뻗어 꽃을 피울 뿐이다. 조심스러울 것도 없는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부르고, 누가 어떻게 먹어도 탈이 없을 미끈한 호박을 맺을 뿐, 왜 내가 여기 있냐고, 하필 이름이 호박꽃이 뭐냐고, 호박은 자기를 불평하는 법이 없다. 호박꽃! - (1995년) 2021. 3. 8.
할아버지의 아침 이른 아침, 변관수 할아버지가 당신의 논둑길을 걸어갑니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꼬부랑 논둑길을 꼬꾸라질 듯 걸어갑니다. 뒷짐 지고 걸어가며 벼들을 살핍니다. 간밤에 잘 잤는지. 밤새 얼마나 컸는지, 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피가 솟아나진 않았는지 이른 아침 길을 나서 한 바퀴 논을 돕니다. 그게 할아버지의 하루 시작입니다. 할아버지는 논을 순례하듯 하루를 시작합니다. 곡식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 (1995년) 2021. 3. 7.
싱그러움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목말랐던 땅이, 나무와 풀이 마음껏 비를 맞는다. 온 몸을 다 적시는 들판 모습이 아름답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 적실 때, 그때 나는 냄새처럼 더 좋은 냄새가 어디 있겠냐 했던 옛말을 실감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 잎담배 모 덮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없이 시원하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에 닿을 비, 문득 마음 밑바닥이 물기로 젖어드는 싱그러움. - (1995년) 2021. 3. 6.
어느 날의 기도 받으라고 받을 수 있다고 때때로 당신 뜻 모를 고통과 아픔 주지만 받을 수 있다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 저만치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툭 길 끊기고 천 길 벼랑일 때가 있습니다. 받으라 하시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 (1995년) 2021. 3. 5.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 18:19)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큰비가 내리더니 대기가 며칠 청명합니다. 영동 지역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의 발이 묶였더군요.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폭설로 불편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눈 덮인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은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동화 속의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헬(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화가는 사냥꾼들이 사냥개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 2021. 3. 4.
새벽 강 새벽 강가에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랐습니다. 어둠 속을 밤새 흐른 강물이 몸이 더운지 허연 김으로 솟아오릅니다. 우윳빛 물안개가 또 하나의 강이 되어 강물 따라 흐를 때, 또 하나의 흘러가는 것, 물새 가족입니다. 때를 예감한 새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날아갑니다. 이내 물안개 속에 파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 새들, 물안개 피어나는 새벽 강에선 새들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 (1995년) 2021. 3. 4.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담은 원고를 들고 여기 저기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반기는 이가 별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물두 번의 시도는 사별의 아픔에 더하여 좌절의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는 이 원고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빨려들 듯이 읽었습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써온 이들도 아닌데 이들이 토로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치유하고 일어나는 과정은 어느 글장이보다 더 깊게 가슴에 파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충격,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감당해.. 2021. 3. 3.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 (1995년) 2021. 3. 3.
단강의 아침 단강의 첫 아침을 여는 것은 새들이다. 아직 어둠에 빛이 스미지 않은 새벽,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삐죽한 소리가 있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다 그 끝이 어둠속에 묻히는 애절한 휘파람 소리, 듣는 이의 마음까지를 단숨에 맑게 하는 호랑지빠귀 소리는 이 산 저산 저들끼리 부르고 대답하며 날이 밝도록 이어진다. 새벽닭의 울음소리도 변함이 없다. 그게 제일이라는 듯 목청껏 장한 소리를 질러 댄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참새들이다. 참새들은 소란하다. 향나무 속에 모여, 쥐똥나무 가지에 앉아, 혹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선을 핀다. 저마다 간밤의 꿈을 쏟아 놓는 것인지 듣는 놈이 따로 없다. 그래도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언제라도 정겹다. 가벼운 음악으로 아침 맞듯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경쾌하고 즐겁다. 오늘 아침엔 후.. 2021.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