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2)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4)  (0) 2021.03.21
봄(3)  (0) 2021.03.20
봄(2)  (0) 2021.03.19
봄(1)  (0) 2021.03.18
볏가리  (0) 2021.03.17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posted by

봄(1)



윗작실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옆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주저앉은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이다. 
오래된 장작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문풍지 숭숭 뚫린 문은 바람과 친해져 무사통과다. 


거기 한 할머니가 산다. 
기구한 사연으로 한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세상에 근거 없는 삶을 살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움막 
그래도 겨울 내내 연기는 피어올랐다. 


밖으로 반 집안으로 스미는 것 반 
겨울잠을 자듯 또 한 번의 겨울을 할머닌 그렇게 났다. 


며칠 전 할머니 집 앞마당 
마당이래야 주먹만 한 마당에 파랗게 싹들이 돋았다. 
마늘이었다. 


짧고 좁은 가운데 길을 빼곤 
빼곡하게 마늘 싹이 돋았다. 


항아리 몇 개 놓인 뒤뜰 둑에 
산수유 꽃망울이 터진다. 
노랗게 터진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3)  (0) 2021.03.20
봄(2)  (0) 2021.03.19
봄(1)  (0) 2021.03.18
볏가리  (0) 2021.03.17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세월  (0) 2021.03.15
posted by

볏가리

 

 



어둠이 내리는 저녁 
들판에 선 볏가리들이 
가만 고개를 숙였다. 
시커먼 어둠을 가슴으로 안은 것이 
기도하는 수도자 형상이다. 
베어진 뒤에도 
그들은 묻고 있다. 
제대로 익었는가 
다 익었는가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2)  (0) 2021.03.19
봄(1)  (0) 2021.03.18
볏가리  (0) 2021.03.17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세월  (0) 2021.03.15
맛있는 커피  (0) 2021.03.14
posted by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16. 06:21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겪는 충격과 고독 그리고 고통의 삶을 끌어안고 그 힘겨운 내면 풍경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슬며시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다. 이들이 그걸 모를까?

폐허가 따로 없다

 

귀담아 들어주고 알아주는 이야기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사별하였다는 이 정직한 제목은 사실 가혹하면서 도발적이다. 책장을 넘기고 들춰보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 도발성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난데없이 평안한 일상에 끌어들이는 우격다짐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평안한 일상에 난데없이 습격해 들어온 배우자의 죽음. 그러자 지금까지 지탱해온 삶이 온통 구겨지고 허물어진다. 폐허가 따로 없다. 혼자 이 모든 폭풍을 견뎌내야 한다. 죽은 것은 배우자인데 온몸과 영혼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시련은 언제나 혹독하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시간의 속도는 느려지고 그 시간 속에 잠겨가는 존재는 이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온 힘을 다시 끌어모아 일어나려 해도 마음은 끝없이 흩어지고 인생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아침은 태양이 아니고 저녁은 고요가 아니다.

 

네 명의 사별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이 붕괴되는 것을 절절하게 겪는다. 지금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으며, 계획했던 미래는 불투명한 안개의 강철같은 벽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하나씩 놓아버린다. 시간의 위로를 기다리기에는 이미 그 영혼이 지쳐있고 육신은 제 것이 아니다. 그러다 퍼뜩 가슴에 날아드는 생각 하나가 이들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배우자의 죽음을 부둥켜안고 마냥 슬픔에 잠겨 삶을 포기하거나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간 배우자들이 그토록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임을 절감했고,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지도 체감했다. 우리는 상실의 고통과 시간을 통해 남들은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온 세상에 자기만 가장 아프고 힘겨운 줄 알았다가 이들은 한걸음 더 내디딘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지금 어딘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별자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38)

 

죽음을 넘은 자리에 마련된 자리

 

하소연을 쏟아내려 한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강으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도 아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 네 분의 사별자들은 자기 삶의 테두리에 묶여 지내지 않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이들이 그렇게 밟아온 길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나의 상실과 슬픔에만 집중해 있을 때 나의 슬픔과 고통은 거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상실과 아픔을 깊이 마주할수록 거대했던 나의 고통과 슬픔이 점점 작아진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깊이 마주하면서 위로를 받았고 내가 혼자 광야에 던져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애통하는 가운데 광야를 건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47-48)

 

애통하는 이여,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다시 새겨진다. 이어지는 말씀은 무엇이었던가?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니.”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위로받는 이를 넘어 위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넘은 자리에 이들에게 마련된 자리다.

 

아프지만 고맙다

 

문득 돌아보니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서 피어나는 것은 감사다. 인생사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세어보면 축복 또한 적지 않다. 그걸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후회스러움이 밀려온다.

 

결혼생활을 할 때는 내가 훌륭한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떠나고 나니 네게 잘해 준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못해 준 것만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너를 만났기에 내 삶은 의미가 있고 축복된 것이었어. 소중한 추억을 항상 기억하며 살고 싶구나.”(131-132)

 

생의 의미는 이렇게 복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각난 것들이 다시 하나의 그림으로 돌아온다. 치유와 회복이다.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하루아침에 무디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은 시간이 기억을 지우면서 천천히 슬픔을 지워 갈 것이다. 그러니 사별 초기라면 지금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나는 버리고 싶었고, 아이들은 어미의 흔적을 안고 싶어 했다. 나는 피하고 버리면서 잊으려 했고, 아이들은 품으면서 잊으려 했을 뿐이다. 세월이 더 지나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이 잦아들면 언젠가 본인들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151, 154-155)

 

사별자의 삶은 기력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도 마침내 꺼낸다.

 

사별 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며 죽은 배우자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시 사랑하는 것은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빠질 일이 아니다.”(169)

 

인간의 삶은 누구의 것이든 존중받아야 하며 그로써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야 한다. 배우자의 죽음이 남은 이의 종착역이 아니다. 애도와 회복, 그 이후의 삶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사연을 하나 하나 내면화하면서 인간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인생의 지혜자가 된다.

 

남편을 땅에 묻고 처음으로 친정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평생 강한 분이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로 인해 눈이 빨갛게 충혈되도록 우셨다.”(188)

 

나만 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눈물 앞에서 사별자는 서서히 깨달아간다. “슬픔으로 인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202)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넘어져야 보이는 것이 있다.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사별자들의 고해성사는 아직 그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별자들이 고통으로 토로한 이야기 속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감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희극과 비극을 발명해냈다. 비극은 언제나 죽음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신들의 농간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나가 되어 비극은 탄생한다. 그러나 그 비극을 넘는 길을 이들은 갈망했다.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다. 막은 비장하게 내리지만 극을 보고 흩어지는 관객의 마음속에는 그 다음 장면이 각기 이어질 것이다.

 

나는 사별하였다역시 책을 덮고 나면 각자 다음 장면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가혹하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으며 결코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아프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책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 그 서사를 다시 쓰게 할 것이기 때문에.

 

김민웅/경희대 미래 문명원 교수

 

 

* 삶이라는 신비(저자들에게 띄우는 김기석 목사의 편지) fzari.tistory.com/2467

 

삶이라는 신비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

fzari.com

*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편집자의 글)fzari.tistory.com/2460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

fzari.com

*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한희철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75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

fzari.com

*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민영진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91

 

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

꽃자리출판사(발행인:한종호)에서 출판할 책이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은 않아서 흔쾌히 리뷰 부탁을 승낙했다. 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

fzari.com

 

posted by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 나갔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훤히 트인 강에서 물살을 거슬러 달려오는 바람이 맵고 거세다.

 

                                     사진/김승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강물이 거꾸로 밀린다.
어, 어, 어, 어, 뒤로 자빠진다.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


여전히 강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잠시 표정이 바람에 밀릴 뿐 거센 바람을 기꺼이 달게 받으며 강은 여전히 아래로 흐른다.
결국은 우리도 그렇게 흘러야 할 터
우리에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을
속으로, 안으로, 아래로.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1)  (0) 2021.03.18
볏가리  (0) 2021.03.17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세월  (0) 2021.03.15
맛있는 커피  (0) 2021.03.14
고백  (0) 2021.03.13
posted by

세월



황산개울 다리 건너 충청도 초입 
이른바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정월 대보름을 맞아 윷판이 벌어졌다. 


노장 대 소장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편은 두 편이다. 


썩썩 낫으로 깎아 만든 커다란 윷을 
길바닥 아무데나 던지면 된다. 


말은 소주병 병뚜껑에 담배꽁초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이 오른다.


윷 한 번 치고는 덩실덩실 춤이 한참이고 
저만치 앞선 말 용케 잡고는 
서로를 얼싸안고 브루스가 그럴듯하다. 

 


기분 좋아 한 잔 아쉬워서 한 잔 
질펀하게 어울릴 때
술 너무 하지 말어 
술 먹다가 세월 다 가 
지나가던 한 사람 그렇게 끼어들자
그게 뭔 소리 철없는 소리 
이게 세월이지
암, 이게 세월이야 
윷판은 끝날 줄을 모르고 
또 하나의 세월이 그렇게 가고

-<얘기마을> (1996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볏가리  (0) 2021.03.17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세월  (0) 2021.03.15
맛있는 커피  (0) 2021.03.14
고백  (0) 2021.03.13
십자가  (0) 2021.03.12
posted by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14. 08:20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는 마음이 그랬습니다. ‘사별자와 대조가 되는 비사별자란 말도 그랬고, ‘비사별자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해와 공감은 되면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고를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 서너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분명 처음 해보는 생각은 아닌데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얼음장 아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금이 가는 것 같았습니다.

 

북미원주민들은 그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목회의 길을 걸어오며 적지 않은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은 교우들이나 교우 가족들과의 헤어짐이어서 집례를 맡게 되었고, 집례자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할인 슬픔을 위로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자주 떠올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라 했던 모리 교수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비록 헤어진다 해도 소중한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말하고는 했지요.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는 말도 종종 떠올렸습니다. 모든 만남 뒤엔 헤어짐이 따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어서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으니 소망을 갖자며 위로를 구하고는 했습니다.

 

너무 서둘러 떠났다 싶은 죽음 앞에서는 조선시대 시인 박은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자고 약속한 그의 아내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시인은 자신에게 찾아온 슬픔을 두고 인명기능구, 이갈여우잠’(人命豈能久, 亦碣如牛暫)이라 노래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게 어찌 오래 가랴, 소 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쉬 마를 테지라는 뜻입니다. 소 발자국에 잠깐 고였다가 이내 마르고 마는 물의 이미지는 아침 안개와 같고 풀의 꽃과 같다는 말씀보다도 인생의 덧없음에 훨씬 더 가까웠습니다.

 

천붕이나 참척이란 말을 떠올릴 때도 있었습니다. ‘천붕’(天崩)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말하고, ‘참혹할 참근심할 척을 쓰는 참척’(慘慽)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고통은 참척이 아닐까 짐작하고는 했습니다.

 

많은 장례식에 참여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이들의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을 위로하며 지내왔다 싶었던 내게 나는 사별하였다에 실린 글들은 묵중하고도 날카로운 통증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슬픔을 당한 이의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했구나, 그들이 겪고 있는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의 일부만을 헤아렸구나, 쉽게 가닿을 수 없는 아픔을 두고 상당 부분 교리에 기댔구나 싶었습니다.

 

속 깊이 울어야 하는 마음의 몸살을, 하나님께 독기 든 언어로 대드는, 창자까지 꼬이는, 더듬이를 잃어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개미의 심정을, 슬픔에 절망하는 나와 그런 나를 망연히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를, 하루씩만 살아가기로 겨우 다짐하는 이의 심정을, 지붕이 사라진 추운 집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머무는 시린 느낌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불면의 밤을, 자신도 모르게 겪어야 하는 대인기피증과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할 수가 없는 안쓰러운 결정장애를, 익숙했던 일이 갈수록 서툴러지는 퇴화현상을, 버리면서 지우기와 품으면서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때마다 확인해야 하는 허전함과 당혹감을, 여행이나 일이나 쇼핑이나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것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시간이 지나가도 결코 옅어지거나 가벼워지지 않는, 그런 슬픔과 아픔과 허전함을 나는 다 모르고 있었구나, 충분히 짐작하지 못했구나, 그동안 이만하면 됐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깊은 자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김남조 시인의 <사랑초서>를 좋아했습니다. 사랑에 관한 가장 깊고 맑은 절창이다 싶었지요. 세월이 지나가면서도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메아리처럼 마음에 남은 대목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부싯돌을 그어 불을 붙인 듯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사랑초서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먼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어느 날 만나, 처음 세상이 열리듯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모시고, 내가 너인 듯 그대가 나인 듯 하나 되어 걸어온 길,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훌쩍 곁을 떠나는 것은 나의 절반이 아니라 나의 전부가, 나의 반쪽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원하지도 않았고 준비되지도 않은 순간 영혼의 동맹이 깨어진다는 것은 내 영혼이 흔적조차 찾지 못할 만큼 사라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가까이 지내는 원로장로님 내외분과 차를 마시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사진을 찍고 아내인 권사님은 시를 씁니다. 서너 해 전부터 두 분은 달력을 만듭니다. 남편의 사진과 아내의 시가 어울린 달력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달력으로, 두 사람의 어울림 자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합니다.

 

여든이 넘어 늘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두 분께 막 읽기를 마친 나는 사별하였다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 중에는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 자체도 있겠거니와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권사님이 갑자기 두 눈을 손으로 감쌌습니다. 그런 모습은 한참을 이어졌습니다. 권사님은 울고 있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일,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죄송하다고 하자 어렵게 눈물을 닦은 권사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요즘 권사님에겐 드는 생각이 들곤 한답니다. 내가 먼저 떠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밥도 못하고 빨래도 못 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서다가 대문 비밀번호도 잊어버린 채 문 앞에 오래 서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찾아들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듣게 된 사별자’ ‘비사별자’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이 권사님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꽃의 빛깔이나 모양 혹은 향기가 아니라 꽃이 시들기 때문, 꽃이 시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피어있는 그 순간을 사랑하는 것, 다른 욕심 없이 다만 함께 있는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그게 최선의 걸음일 거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젖는 두 눈을 닦으며, 어떤 때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글을 다 읽고는 불씨처럼 마음에 담아둔 생각이 있습니다. 사별의 아픔을 경험한 이들이 한결같이 들려주는 경험담이 있었습니다. 광야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혼자가 되고 나니 가까운 이들의 마땅한 관심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이들의 무관심도 모두가 부담과 원망으로 다가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문 위로가 되었던 것은 따로 있었는데, 같은 일을 경험한 이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같은 아픔을 경험한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송두리째 삶의 뿌리가 뽑힌 듯한 상처와 허전함을 어루만져 주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것은 그 손을 단번에 녹여주는 뜨거운 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차가움을 단번에 녹여주는 뜨거운 손은 분명 고맙겠지만, 까닭모를 아픔이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손은, 그 손을 오래도록 잡아주는 언 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 중 얼마 전에 남편을 떠나보내신 권사님이 있습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터인지 권사님은 담담하게 장례를 마쳤습니다. 그랬던 권사님이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단 오 분만이라도 남편과 함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남들이 그런 말 할 땐 그 심정 전혀 몰랐는데 이제는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이지요. 다음에 권사님을 만나면 권사님의 손을 오래 잡아드리려고 합니다. 내 손이 충분히 따뜻하지 못해도 그럴수록 오래 마주잡아야지 싶습니다.

 

누군가의 언 손을 마주잡기 위해 큰 용기를 가지고 내밀한 아픔을 털어놓고 있는 언 손들을, 부디 하늘이 가없는 사랑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빕니다.

 

한희철/정릉교회 목사

 

관련 글

 

* 삶이라는 신비(저자들에게 띄우는 김기석 목사의 편지) fzari.tistory.com/2467

 

 

삶이라는 신비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

fzari.com

*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편집자의 글)fzari.tistory.com/2460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

fzari.com

*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김민웅 교수의 서평) fzari.tistory.com/2478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fzari.com

*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민영진 목사의 추천 글)fzari.tistory.com/2491

 

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

꽃자리출판사(발행인:한종호)에서 출판할 책이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은 않아서 흔쾌히 리뷰 부탁을 승낙했다. 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

fzari.com

 

posted by

맛있는 커피



“이거 으트게 탄 거에유?”


사택에 들른 김천복 할머니께 커피를 타 드렸더니 맛있다며 설탕 몇 숟갈에 커피 몇 숟갈 넣은 거냐고 할머니가 묻습니다. 아무래도 달게 드시는 할머니를 위해 설탕과 크림을 조금 많이 넣었을 뿐입니다.

 

 


좀체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혹 있을 손님을 위해 할머니는 집에 커피 믹스를 사다 놓습니다. 이따금 할머니 집에 들르면 얼른 할머니는 주전자에 물을 데워 커피를 끓입니다.

 


세월도 그만큼은 바뀌어 때때로 적적하고 입이 궁할 때면 할머니는 혼자서도 커피를 마십니다. 부엌에 있는 서로 모양 다른 잔을 두고서 종지나 대접, 아무데나 휘휘 커피를 탑니다. 할머니가 마시는 커피는 그런 커피입니다.


커피 맛에 차이가 나야 얼마나 나겠습니까. 할머니가 묻는 맛있는 커피 맛의 비결은 필시 ‘함께 마심’에 있을 텐데요.


커피 맛의 비결을 얼마간의 설탕과 크림으로 얼버무리고 맙니다.

-<얘기마을> (1992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흐르는 강물처럼  (0) 2021.03.16
세월  (0) 2021.03.15
맛있는 커피  (0) 2021.03.14
고백  (0) 2021.03.13
십자가  (0) 2021.03.12
웃음을 주소서  (0) 2021.03.11
posted by

고백



때가 되면 제단에 올라 말씀을 전합니다. 
지치고 외로운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집을 찾으면 배고픈 이들과 상을 나누듯 말씀을 폅니다. 
생이 그렇듯 멀고 낯선 말씀들,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말씀임을 어렵게 인정합니다. 
아픈 이를 만나 이야기 나누고, 눈물 흘리는 이와 함께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따뜻한 듯, 넉넉한 듯, 분명한 듯 말하지만, 
아니지요, 속으로 흔들리고 안으로 무너지는 마음들. 


나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멈출 힘도 없습니다.


저 흔들리는 촛불처럼 때마다 흔들리고 녹아듭니다. 
무릇 살아있는 건 흔들리는 것. 
촛불은 촛농으로 존재하는 것, 
이 밤도 당신은 말씀하며 가르치지만 
촛농처럼 눈물만 마음을 타고 흘러내릴 뿐입니다.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  (0) 2021.03.15
맛있는 커피  (0) 2021.03.14
고백  (0) 2021.03.13
십자가  (0) 2021.03.12
웃음을 주소서  (0) 2021.03.11
단상  (0) 2021.03.10
posted by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시 94:18-19)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산수유도 한창입니다. 공원에는 노란색 히어리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히어리의 꽃말은 ‘봄의 노래’라지요? 미처 떨구지 못한 겨울눈 껍질이 마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춘화도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선화, 히아신스, 크로커스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의 시작입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루이스 글뤽은 눈풀꽃(snowdrop)이라는 시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은 눈풀꽃의 은밀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략)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후략)”

축축한 흙 속에서 자기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낀다는 것,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낸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눈풀꽃을 설강화(雪降花)라고도 하더군요. 눈 내린 땅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겁니다. 이 놀라운 시를 읽고 있으면 왠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도 봄볕이 스며들어 새로운 삶의 용기를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아주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벌써 31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자 여고시절의 얼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이야 숨길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온 까닭은 한 친구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교목실에 찾아와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사뭇 진지하게 생의 의미를 탐색하던 친구여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 몇 년 전 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는 영상을 통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도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병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면회조차 할 수 없기에 친구들의 안타까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생명 불꽃이 다 스러지기 전에 나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문득 그가 내게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저마다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3학년 2학기 끝자락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교목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공부에 대한 후회는 없다면서도 이상한 헛헛함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면서 편지를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3년만 참으라고, 3년만 앞만 보고 달리라고 모두가 말하기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운 생각에 질주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은 학교 교육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며 살던 한 사람의 생명 불꽃이 가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다더니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희떠운 소리를 한마디 한 후에,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건넸습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말의 부질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며칠 후 의식이 깨어난 그 친구는 제 메시지를 듣고 아주 행복해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자기를 여는 법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이 봄에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방패를 들고 벽처럼 서 있는 경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녀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익숙한 광경입니다. 사람들은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연결하는 몸짓을 통해 미얀마 사람들의 민주화 투쟁에 연대한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금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흉포한 권력은 그런 평화의 꿈을 총과 칼로 막으려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나가 자기들의 민주화 의지를 드러내는 미얀마 사람들의 숭고한 용기에 감동합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는 것,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동의할 수 없는 현실과 만나도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장벽을 돌파하는 일입니다. 그 장벽이 그의 몸과 마음을 조각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돌파를 감행하는 이들 덕분에 인류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서곡을 여는 이들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지엄한 명령 앞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주다가, 낳은 아기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명령보다 더 높은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십브라와 브아는 시민불복종 운동의 원조입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그리스 신화의 인물 프로메테우스도 저항의 상징입니다.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도록 가볍게 견디려 합니다.

“나는 인간들에게 명예의 선물을 주었던 까닭에
이런 고통의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향풀 줄기에 싸서
불의 원천을 몰래 훔쳐냈는데, 그것이 인간들에게
온갖 기술의 교사(敎師)가 되고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러한 죄를 지은 까닭에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천(露天)에서 사슬에 꼭꼭 묶인 채.”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p.208-9)

장엄하지요? 교황과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되었습니다.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국회의는 루터에게 그동안의 모든 신학적 주장을 취소하고 펴낸 책들을 폐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제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름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술 끝에 루터는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니,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린들 로퍼, <마르틴 루터-인간, 예언자, 변절자>, 박규태 옮김, 복 있는 사람, p.288-9에서 재인용)

이들이 아니라 해도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 수많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가 지중해 세계를 억압하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는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가장 높은 분이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선다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혁명은 피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가는 혁명이야말로 가장 급진적 혁명이 아닐까요?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점잖음이 아니라 비겁입니다. 주님은 대놓고 누군가를 비판하지는 않으셨지만 불의에 맥없이 끌려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비전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용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미얀마의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제 사순절 순례 여정도 중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팥죽에 앉는 더께처럼 우리 마음을 뒤덮고 있는 둔감함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도덕경 36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봄의 신비가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의 난감함을 돌파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한껏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