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의 늪에 빠지지 않게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25. 08:49

 

꽃자리출판사(발행인:한종호)에서 출판할 책이니 뻔한 이야기일 것 같지만은 않아서 흔쾌히 리뷰 부탁을 승낙했다. 하루 날을 잡아 최종 편집원고를 읽었는데, 새벽부터 앉아 읽기 시작한 원고는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나는 여덟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집중하여 정독했던 것에 스스로도 무척 놀랐다. 온종일 한 권의 책에 푹 빠졌던 것은 나의 뚝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사별하였다의 작가들은 제각기 자신들이 체험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별을 이야기한다. 네 명의 스토리텔러들이 사별 체험과 같은 주제를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풀어가는 그 이야기는 지닌 내용의 무게도 무게려니와 사별 주제를 풀어나가면서 독자를 견인해 내는 놀라운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나 또한 꼬박 하루를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독자가 저항 없이, 아니 독자가 스스로 진지하게 스토리텔러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만드는 작가들의 이야기 솜씨가 놀랍다. 각 작가들마다 들려주는 사별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빨려들어 공감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 이야기를 읽어 가는 동안 눈물 없이 지나갈 만한 대목을 자주 만났다. 이런 경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며 잠시나마 숙연해지기도 하고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작가들의 사별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아직 사별 체험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사별을 하게 될 독자에게 지금 누리고 있는 부부생활이나 가족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어떻게 더 성실하게 노력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다른 한 편으로는 사별의 슬픔과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결단과 각오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책의 내용은 부부가 함께 읽으면 좋을 이야기들이 많다.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먼저 읽고 다른 한쪽이 나중에 읽은 후 서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의견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은 누구나 맞이할 사별의 때를 준비하는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 같다.

 

한편, 한 가정의 비극이 이처럼 아름다운 스토리텔링 문학으로 탄생되어 사별을 경험하거나 사별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깊은 감동과 큰 위로와 귀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이 사실이 몹시 잔인하고 가혹하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독자가 받는 위로와 감동이 누군가의 가정이 당한 희생을 딛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자신들의 사별을 이야기하는 필자들에게 죄송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지금 사별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작가’, ‘저자’, ‘필자등 여러 칭호로 부르고 있다. 이야기하니까 스토리텔러혹은 이야기꾼이고 이 책의 공동저작자들이니 저자이고 공동으로 집필했으니 필자. 억지로 통일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그때 문맥에 맞는 표현을 쓰는 것을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

 

1994, 50대 중반이던 나는 우연히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처음 만났다. 각당복지재단이 19914월에 설립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회장 김옥라)가 정기간행물 월간 <삶과 죽음>을 창간한 것이 19916월이었다. 삶과 죽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 정기간행물은 곧이어 외국인 죽음학 전공자를 초청하여 죽음학 공개강좌를 여러 날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죽음의 문제를 금기로 여기던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가 공론화(公論化)하기 시작하였다. 공개강좌는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30여 년 동안 한 해에 3개월 동안 20여 강좌를 개강하여 죽음준비 교육지도자를 양성해오고 있다. 성서학을 전공한 나도 죽음학 강사가 되어 성서와 기독교 신학 쪽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왔는지 그 역사와 내용을 살피는 강연을 계속해 왔다.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가 출범했을 때도 그리고 정기간행물 <삶과 죽음>이 창간되었을 때도 주변에서는 비아냥이 많았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죽음을 생각해?”, “왜 하필 죽음이야? (듣기에 기분 나쁘잖아!)”, “말이 씨가 된다고, 죽는 이야기 자주 하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어!” 하며 수군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동료 교수 중에는 죽음학 공개강좌에 강사로 초청을 받기라도 하면 질겁을 하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사람을 뭘로 보고 내게 죽음을 주제로 강연을 하라는 거냐?”고 역정을 내고 달려드는 교수도 있었다. 나도 그런 교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가 여러 분야 교수들을 강사로 초청했던 것은 그들이 죽음학 전문교수들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음학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고 그 중에 더러 자신들의 전공분야에 죽음학을 접목하여 죽음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일에 공헌하도록 양성할 목적으로 초청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했던 것은 공개강좌에 초대받은 강사들뿐만 아니라 공개강좌에 초청된 청중도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은 당연히 오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강사들도 스스로 배우면서 바뀌었고 청중도 배우면서 바뀌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 직전까지 최근 강좌의 청중은 젊은 청장년이 다수였고 오히려 노년층의 참여가 저조했다. 세상이 그만큼 바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별하였다도 이제는 말하기에 부담이 되거나 듣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고 수많은 독자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 배우자가 사별자가 된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먼저 간다면 홀로 남는 아내를 위해 평소에 무엇을 해 놓고 가야하나? 이런 걱정도 해보지만 현명한 나의 아내는 내가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떻게 살 것인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은 것 같다. 노년에 이르러 사별자가 되는 경우는 한창 나이에 졸지에 당하는 사별과는 달리 이런 준비 과정이 있다는 것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아내가 사별자가 되었을 때를 걱정하기보다는 사별자가 된 그가 나를 너무나도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아서 서운하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서운하다면 그것은 나의 이기적 과욕일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서 제일 흉물은 학자의 서재다. 현직 때는 교수실이나 연구실을 서재로 사용했다. 은퇴하면서 추려 가져온 책만 해도 방 네 칸 아파트에서 서재가 방 두 칸을 차지하니 집을 좀 우아하게 꾸미고 싶어 하는 주부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다. 나 죽으면 제일 먼저 서재 두 칸을 싹 비우겠다는 것이 내 아내의 평소 생각이다(당연하지!). 20여 권의 저서와 일기, 사진을 포함한 내 평생의 기록물은 용량이 겨우 500기가바이트 미만이어서 1테라짜리 외장 하드 디스크 하나면 넉넉하니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는 후학들에게 적당한 때에 미리 주면 될 것이다.

 

내가 사별자가 된다면?

 

나의 아내가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여 내가 사별자가 된다면? 내가 사별자로 남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권오균 님과 임규홍 님처럼 한창 나이에 사별자가 되든, 나처럼 망구(望九)의 나이에 사별자가 되든, 비록 문제 처리방식은 달라도 봉착하는 문제는 같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서서히 잊히는 나이를 살고 있다. 우리 내외가 혼인 50주년을 자축한 것도 벌써 3년 전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 두 아들을 낳고 두 며느리를 맞이하고 손자 손녀를 네 명이나 보았으니 이만하면 백년해로(百年偕老)요 백년해락(百年偕樂)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내외의 사별이다. 우리 내외지간 누가 먼저 사별을 당하더라도 나나 내 아내나 둘 다 고종명(考終命)일 터이니 젊은 날에 예기치 못한 순간에 급습한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사별과는 다를 것이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두 여성과 두 남성 사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독자든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게 될 것 같다. 누구나 다 사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늘 잊고 사는 것이 우리인데 이 책은 사별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상실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치유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나는 이 필자들에게서 배운다. 그들의 경험담을 듣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어떤 것은 나도 따라 하고 싶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을 사별인생 선배로서 후배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기도 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정숙 님에게서는 사별자인 내 아내가 고인이 된 나를 좋게 기억하려면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권오균 님이 소개한 사별 카페는 나나 내 아내가 사별자가 되면 즐겨 찾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받는 소통의 마당이 될 것이다. 임규홍 님에게서는 사별 후 시댁과 처가의 관계 재조정의 지혜를 배운다. 김민경 님에게서는 나를 위한 위로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아이디어를 얻는다.

 

 

사별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놀랐던 것은 한창 나이에 홀로된 배우자들이 모여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동병상련하는 온라인 사별 카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덕분이긴 하겠지만 홀로된 이들이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마당이 있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인터넷 카페인 만큼 24시간 열려 있는 마당이다. 아마도 이 책의 공동집필자 네 분도 온라인 사별 카페에서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이 책을 펴내기로 한 것 같다.

 

임규홍 님은 저자의 머리말에서 사별은 우리가 슬픔과 고통의 광야를 걷게 했고, 우리는 그 광야에서 울고 있는 서로를 만났다.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이 같이 울어 주고 서로의 슬픔을 위로하는 사별 카페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고통과 슬픔과 그리움을 온라인 사별 카페에서 글로 토해냈다. 우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수많은 사별 경험자들의 글을 통해 적절한 위로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기에 그 경험을 다른 사별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5쪽 발췌)고 말한다.

 

이정숙 님은 자신이 “5남매의 엄마였던 가난한 41살 나의 엄마밑에서 자라던 과거가 있어서 온라인 사별 카페를 드나들면서 배우자를 잃고 혼자 키우고 있는 어린 자녀들이 사회에서 한부모 가정이라고 차별당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글을 자주 확인하며(26) 그쪽으로 관심을 키워간다.

 

권오균 님은 자신이 사별 카페에 가입하게 된 경위와 온·오프라인 카페 모임에 대한 기대, 그리고 좌절과 적응과 창조적 참여의 단계를 비교적 상세히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지금 자기들이 읽고 있는 나는 사별하였다라는 이 책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도 발견한다. “(사별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별자들을 위한 책을 만들어 보자며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이 친구가 다른 분과 책을 쓰려고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기에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어찌하다 보니 같이 책을 쓰게 되었다. 사람 일은 참 모르겠다. 사별 카페에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70).

 

김민경 님도 사별 카페에서 등단한 작가다. 사별 초에 온라인 사별자 카페에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을 일기처럼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나의 마음을 기록했었는데 글을 써 가면서 차츰 내가 가야 할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누군가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주고, 그러면서 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51).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지던 초창기, 비비안 로드리고 라이스(Vivienne R. Reich)라고 하는 시인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고하는 편지인 A Letter to Humanity라는 장문의 서사시를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시는 삽시간에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여성 시인의 시도 시지만 나는 그가 홀로된 남녀 배우자들을 위한 정기간행물 월간지 REINVENTION의 편집장이라는 것에 더 관심이 갔다. “, 이런 정기간행물도 있구나!” 온라인 사별 카페가 나는 사별하였다라고 하는 감동적인 작품의 모체가 되었다면 홀로된 이들을 위한 온·오프라인 정기간행물도 나와서 사별과 독신과 죽음과 애도와 상실 치유와 한부모자녀를 위한 법률제정과 죽음학 전반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사회 전반적인 관심사로 공론화(公論化)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도 함께 내다본다.

 

이정숙 님의 나는 무엇을 잃었는가?”

 

이정숙 님의 이야기 중에 그가 남편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남편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부럽다. “그는 옳은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때로는 틀렸고, 확신하는 삶을 원했지만 세상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성실했지만 때로는 절망했고, 그는 신실했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는 배려심이 좋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의 삶이 완벽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부터 1주기 추모식까지 1년 동안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의 삶을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보니 그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아 냈다는 생각이 든다”(40). 나도 이처럼 후한 평가를 아내에게 받을 수 있을까? 그러려면 평소에도 아내가 감동할 만큼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그동안 아내에게 어떠했을까?

 

그는 또 상실의 치유가 자신의 상실을 똑바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면 나는 남편이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기억의 빗장을 풀고 그에 관한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그가 내게 누구였는지 자문했다”(21)고 하면서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남편이라면 남편이 자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고여덟 가지로 확인한다.

 

그는 자기의 남편을 두고 그는 내가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사랑, 어떤 부끄럼도 없이 나를 사랑해 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내 남자였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보호자였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다. 내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내가 할머니가 될 때 내 손주들의 좋은 할아버지였을 것이고), 매사에 나를 편들어 주는 지지자였다. 나를 웃게 하는 코미디언이었다. 내가 맘껏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오빠이자 아버지였다”(21~24쪽 요약)고 회고한다. 이 성적을 학점으로 계산한다면 A+. 나는 살아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죽고 나서도 이런 성적은 못 받을 것이다.

 

권오균 님의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

 

권오균 님은 아내와는 16년 반을 같이 살았고 그들의 삶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말다툼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배려하고 아끼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슬하에 자식은 두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교인으로서 모태신앙이었던 그의 아내는 암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 나가고자 했고 치유집회에도 가 보았지만이는 사실상 사기행위에 불과했고 아내의 투병의지는 계속 굳건했으나 남편 권오균 님의 신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고 회고한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은 불교에 심취한다. 죽음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불교에서 배운다. 불교를 공부하며 그가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인간에게 죽음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며 사별의 아픔은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67)는 것임을 깨닫는다.

 

오히려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서 아내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진다. 그래서 그는 침실과 거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아내의 사진을 놓아두거나 걸어둔다. 그의 가방에도 사진을 넣은 배지를 만들어서 붙이고 다닌다(73).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동영상을 만들어서 아내의 SNS 게시판에 올리기도 하고 그 동영상에는 아내와 그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들이 있고 그가 아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들어 있다(74). 드디어 그는 합성사진을 만드는 방법까지 익혀 아내가 아프기 전에 같이 찍은 인물 사진만 오려 내어 새로운 풍경사진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75).

 

이 밖에도 그는 운동모임, 등산모임, 독서모임 등 5~6개의 동호회 모임에 가입했고(77), 외로움을 잊으려고 취미생활의 폭을 넓힌다. 경비행기 파일럿, 패러글라이딩, 스킨스쿠버 등을 시도하다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등산임을 발견한다(86). 그러다가 끝내 사별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쓰자고 해서(88), 아마도 친구들과의 공저 나는 사별하였다가 나온 것 같다. 네 명의 공저자에게 이 수기작품을 가지고 어느 문학단체에든지 신인작가 등단을 시도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임규홍 님의 사별 후

 

임규홍 님의 경우는 상실의 아픔과 함께 상실 이후의 삶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가까운 주변과의 슬기로운 관계 조정의 필요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돋보인다. 그중 나의 관심을 끄는 하나가 사별 후 시댁과 처가의 관계재정립에 대한 저자의 지혜다. 더욱이 저자의 경우는 아내가 오녀일남 중 장녀였고, 아내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홀로된 어머니를 도와 처가의 대들보 구실을 했으니 아내의 죽음은 처가에도 큰 충격이었고 장모도 석 달 후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처가와의 관계는 불가원(不可遠) 불가근(不可近)이 되고 만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데는 서로 간의 이해와 배려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 가지를 더 지적한다. 하나는 남편 잃은 여성 사별자가 시가와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시어머니로서는 아들을 잃은 슬픔이 누구보다도 크겠지만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를 잃은 며느리의 슬픔과 고통 또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클 것이다. 사별 후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서 시가나 처가와의 갈등이 생긴다면 사별자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102) 라고 하면서 사별자의 양가 가족들은 이제 가장이 되어서 혼자 어린 자녀들을 키우며,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사별자의 고통과 외로움을 헤아리고 배려해 주어야”(102) 할 것을 강조한다.

 

다른 하나는 살아갈 날이 아직 창창한 사별자의 경우 재혼을 고려해 보도록 권면한다. 사랑할 대상이 따로 있다면 굳이 재혼이 아니어도 된다. “일편단심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려면 망자를 안고 가는 것도 좋으리라. 그러나 살아야 할 시간이 길게 남아 있다면 평생을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 그 기나긴 세월을 어찌하려나. 하지만 사랑의 대상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111).

 

김민경 님의 나를 위한 위로

 

김민경 님의 경우는 아픔을 스스로 치료하는 처방에 대해 본인 스스로 찾아낸 방법을 기꺼이 활용한다. 남편의 간암 선고를 받고서 그 와중에도 김민경 님이 제일 먼저 주선한 것이 가족여행이었다고 한다. 남편과의 사별 후 그를 위로한 것 역시 여행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기일 3주기 직전에는 사별자는 자기 아이들과 함께 3주간 북미와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다. 자기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여행도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가끔 나에게 선물을 한다. 일상의 업무와 지친 하루를 보낸 내가 안쓰러울 때,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그리고 이제는 기억해 줄 사람이 없는 결혼기념일”(142)을 맞았을 때, 저자는 자신을 위한 선물의 구실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

 

나 혼자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몰려올 때면 나는 늘 나에게 선물을 사 주었었다. 나를 위한 선물이란 것이 별것은 아니다. 새로 생긴 카페로 투어를 간다거나 하루 날 잡아 영화를 세 편 정도 연이어 본다거나, 혼자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 본다거나, 화초나 생화 꽃을 한 아름 산다거나 하는 것들이 주로 내게 주는 선물이다”(142-143). 발상의 전환이다. 마구잡이 쇼핑이나 소비가 아니라 치유를 위한 유익한 낭비. 그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김민경 저자의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가끔 혼자 커피를 마시려 카페에 들려선 두 잔의 음료를 주문해 들고나와서 한 잔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좋아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야!’”(141), 그가 문득 사무치게 생각나는 날이면 그가 좋아했던 자장면을 먹으러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짬뽕 하나 자장면 하나를 주문해서 한 그릇은 앞에 두고 먹은 날도있었던 것을 회고한다(142). 이 대목에서는 나 역시 이 비슷한 경우를 직접 보았기에 이럴 수도 있겠다 싶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우리 사회에서 잘 알려진 어느 인사와 대중식당에서 저녁을 같이한 적이 있다. 우리 둘이 먹는 식탁에 4인분이 차려져 있었다. 누가 더 오느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도 더 오지 않았다.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우리가 먹은 음식과 똑같은 2인분 식사는 그대로 상에 남았었다. 나를 초대한 그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식당 종업원에게 슬쩍 물어보려고 하는데 그를 수행하는 비서가 내 궁금증을 풀어준다. 혼자 식사할 때도 가끔 저렇게 고인이 되신 부모님의 식탁을 함께 차린다는 것이다. 남편을 여읜 부인이 혼자 식사하면서 2인분을 주문하여 남편의 현존을 체감하려고 하는 애틋한 심정이나 고인이 된 부모님 밥상을 차리는 자식의 효성이나 낯설지만 둘 다 존경스럽다.

 

사별자를 위한 안내

 

죽을 준비와 사별 준비는 다르다. 이게 문제다. 묫자리를 봐둔다든가, 장의사(葬儀社) 보험을 들어둔다든가, 배우자가 사별자가 되었을 때 살아갈 경제적 기반을 닦아놓는다든가, 유산을 분배하는 원칙을 법에 따라 정해놓는다든가, 유언을 미리 해둔다든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다. 그러나 나 자신이 사별자가 되면 내가 살아남아서 죽은 자를 보내는 장례예식 일체를 주관하고 배우자의 장례 이후 그가 고인이 됨으로써 유가족에게 남겨지는 온갖 문제와 사별자로서는 처음 당하는 여러 가지 익숙하지 않은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사별자 자신이 배우자 상실로 인해 가지게 되는 슬픔, 그리움, 외로움, 가족 구성원들(특히 자녀)이 저마다 겪는 고통을 함께 치유해야 한다.

 

이 책의 3장과 4장은 사별자의 슬픔 치유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5장은 부모를 여읜 자녀들의 문제를 다룬다. 독자는 부모의 사별을 경험한 자녀의 이야기를 직접 듣게 한다. 6장은 사별을 경험한 이들에게 듣는 조언을 모아놓은 것이고 7장은 사별자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과 대답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소개된 추천도서는 나는 사별하였다를 읽고 나서도 사별에 관한 관심이 오히려 더 생겼다면 보충하여 읽을 수 있는 자료들이다. 죽음 준비에 관한 정보제공은 어느 정도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사별 준비에 관한 자료로서는 이 책이 이 방면에서는 우리말 이야기꾼들이 우리말로 이야기해준 첫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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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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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김민웅 교수의 서평) fzari.tistory.com/2478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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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늘처럼

 



밤하늘 불을 끄실 때
내 방에 불을 켠다

새벽하늘 불을 켜실 때
내 방에 불을 끈다

어둔 밤이면 
전깃불에 눈이 멀고

환한 낮이면 
보이는 세상에 눈이 멀고

언제쯤이면
나도 하늘처럼

밤이면 
탐욕의 불을 끄고서

어둠 한 점 지운 별처럼 
두 눈이 반짝일까

새벽이면 
마음에 등불을 켜고서

하늘 한 점 뚫은 해처럼
두 눈이 밝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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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8)



아무도 몰래 하나님이
연둣빛 빛깔을 풀고 계시다

 


모두가 잠든 밤
혹은 햇살에 섞어
조금씩 조금씩 풀고 계시다


땅이 그걸 안다
하늘만 바라고 사는 땅


제일 먼저 안다
제일 먼저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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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7)

  

아무도 모르게 견딘
추위 속 아픔
모르셔도 됩니다

 


누구도 모르게 견딘
어둠 속 외로움
모르셔도 되고요


다만 당신께는
웃고 싶을 뿐
웃음이고 싶을 뿐


나머지는
제 마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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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6)



숙제를 하다말고 
책상에 엎으려 잠든 아이의 손에
파란 물이 들었습니다.
그리다 만 그림일기 속 푸른 잎 돋아나는 나무가
씩씩하게 서 있습니다.

 


나무도 푸르고
나무를 그리는 아이의 손도 푸르고
푸른 나무를 푸르게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도 푸르고
아이는 오늘 밤 푸른 꿈을 꾸겠지요.
봄입니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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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사랑을 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지금이야 대부분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는 치(寸), 자(尺), 척(尺) 등 지금과는 다른 단위를 썼다. 거리를 재는 방법도 달라져서 요즘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도 기계를 통해 대번 거리를 알아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측정법이 좋아져도 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하늘의 높이나 크기를 누가 잴 수 있을까. 바라볼 뿐 감히 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자기 손에 자 하나 들었다고 함부로 하늘을 재고 그 크기가 얼마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는 종교인들이 더러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도 잴 수가 없다. 기쁨과 슬픔 등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잴 수가 있겠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잴 수 없고, 재서는 안 되는 것 중에는 사랑도 있다. 때로는 궁금한 마음에, 때로는 욕심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다. 어떤 땐 내게 주는 사랑의 정도가 궁금하고 어떤 땐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손해 아닌가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지만 결국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이 길거나 짧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강물처럼 흘러가도록 두어야 한다. 스스로 숨을 쉬며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윽해 진다. 재기 시작하는 사랑은 서서히 질식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초서>는 절창이다 싶다.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

 

-김남조 <사랑초서>(5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 세상 가장 깊은데 심어

가장 늦은 날에

싹을 보느니’

 

-김남조 <사랑초서>(83)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정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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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5)



윗작실 죽마골을 오르다 만난 
꽃댕이 할머니 
강 건너 꽃댕이 마을에서 시집온 뒤론 
아예 이름이 꽃댕이가 되었다.

 


귀가 잡숴 큰소리로 싸우듯 소릴 쳐야 알아듣지만
사실 그럴 일이 뭐있담 
그냥 얼굴 보면 알지
낯빛 보면 맘 알지
말은 그담 아닌가
환한 웃음으로 지나쳤는데 
저만치 가던 할머니 
뭐라도 잊은 듯 
급하게 달려와선 
혼자 사는 당신 집 빈 마루에서 
웬 까만 비닐봉지 전하신다. 


무슨 설명 대신 손을 잡는데 
화로에 잘 익은 고구마처럼 할머니 손이 따뜻하다. 

돌아와 열어보니 냉이와 달래 들었다. 


혼자 사는 외로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가득 들었다. 
달래 향기가 싸하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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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4)



산이
젖을 꺼내
젖을 준다. 

 


두 손 벌겋도록 얼어온 자식   
얼른 가슴 열어 
젖가슴으로 녹이 듯 
경운기 지나가는 거친 산비탈 
겨우내 
언살 녹여 
어쩜 저리 고운 흙을 내는 걸까 
못자리 할 때 되지 않았느냐고 
못자리 하려면 
고운 흙 필요하지 않냐며 
젖을 꺼내 
뽀얀 젖을 내는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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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3)

  

인적 끊겨 길마저 끊겨가는 
윗작실서 안골로 넘어가는 옛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단옷날 그네가 걸려 
어릴 적 시간으로 단숨에 들게 하던 
근심과 걱정 그나마 털던 
품 넓고 장한 느티나무 위로 
바람과 볕 잔잔한 안골이 있는데 
안골 한복판엔 감나무가 섰다. 

 


가을이면 하늘을 다 덮을 만큼 감이 열리고 
고추잠자리 붉은 노을 부러움을 살만큼 
붉은 감이 눈부신 나무다. 

 


어느 날 여든이 넘은 이한조 할아버지
지게 위에 달랑 낫 하나 걸고 
불편한 걸음 지게막대 의지해 안골로 건너와선 
지난겨울 둘러준 
감나무 밑동 메밀짚을 걷어낸다. 


얼지 말라고 
장난꾸러기 손주 내복 입히듯 둘러준 메밀짚 
짚을 걷어 바닥에 깔고 
서너 번 나무 밑동 쓰다듬곤 돌아선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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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산다는 것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슥10:9) 기독교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마치 씨앗처럼 ‘땅의 모든 나라 중에’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신 28:25).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머나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2)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공원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어지간히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행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무서워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시인 황동규  선생님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라는 시집을 곁에 두고 한 편 두 편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어서 쓰신 시인지라 관념적이지도 않고, 표현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깨달음을 나누어주겠다는 은밀한 의도도 보이지 않아 아주 담백합니다. 쇠약해지는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연세이기 때문일 겁니다. 수영을 배울 때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겨야 몸이 떠오르듯이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시인은 자기 몸의 변화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그것을 시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맨땅’ 부분)

언덕길을 팔랑팔랑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아, 저 생명 덩어리’라는 말이 목에 차오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매사가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산수(傘壽, 80세를 이르는 말)를 넘긴 분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기탁하는 데는 그만한 이미지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스쳐가는 바람에 그만 촛불이 꺼질까 싶어 조심조심 걷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월요일마다 산에 오르던 때 이런 경험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특히 겨울철 산행이 그랬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이제 다 왔다 싶어 방심하다 흙 속에 숨어 있던 얼음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구절이 참 절묘합니다. “어이없지 않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어이없지 않다고 말합니다. 달관도 아니고 체념도 아닙니다. 삶의 곡절과 부침을 많이 겪어본 이의 담담한 자기 수용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하여 다 이런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런 고요한 자기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푼 욕망의 격전장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칙을 합니다. 재산 증식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공적 자리에 있으면서 얻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 이들의 행태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협잡과 폭력, 혐오와 불신은 우리 사회를 불신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에서 세상 현실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는 현실은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부가 늘어갈수록 교만해지는 사람들,
기술이 발전할수록 늘어나는 파괴들,
혐오를 낳는 압제, 폭력을 낳는 혐오...
어딜 가나 가득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으로 인해 조각나고 불타고
짓이겨지고 사라지는 삶,
무질서와 혼돈, 끝을 모르는 불안....“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의 기도>, 박천규 옮김, 비아, p.149)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왠지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폭력의 한가운데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꿈을,/분노가 사무쳐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상실과 실패 속에서/마르지 않는 슬픔의 노래를,/혐오로 불타오르는 세상에/희망을 심는 법“을 노래합니다. 시인들은 그러니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꿈꾸는 이들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취급을 받을 때가 많지만, 꿈이 없다면 인간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또다시 떠들썩합니다. 땅과 집이 예전부터 투기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정책과 재산을 일시에 증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맞물려 빚어낸 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각축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세상 현실에 분노합니다. 욕망의 물결에 떠밀리고,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잊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점’(빌3:14)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표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삶은 지리산가리산 엉망이 되고 맙니다. 가끔 흔들릴 수도 있고, 길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바른길을 걷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욕망이 상존합니다. 하나는 비좁은 일상에서 벗어나 광활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소진시키는 반복적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거리가 멀수록 시간의 속박은 줄어듭니다. 백패킹이나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욕망의 반영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은 곳 말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고, 세상에서 입은 상처들이 회복될 수 있을 때, 우리 숨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낯선 곳에 가면 낯익은 곳이 그립고, 낯익은 곳에 오래 머물면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비좁은 곳에 있으면 광활한 공간을 꿈꾸고, 모든 방향으로 개방된 광활한 공간에 서면 안온한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에 간섭하거나,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네요. 반면 천지간에 나 홀로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친밀한 접촉을 갈망합니다.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은 그렇게 아름답고 넓은 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곳이 많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협소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 땅을 ‘아름답고 넓은 땅’이라 칭하신 것은 공간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새 땅입니다. 주인이나 관료가 부과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예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입니다.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에 그곳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답고 넓은 땅’은 주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 땅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땅에서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마5: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땅은 바로 그런 땅이 아닐까요? 우정과 사랑으로 빚어지는 자유의 영토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마음이 스산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와 만나 더욱 상처를 받고 돌아서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아주 바쁜 시간이라 해도 그를 전심으로 환대해 보십시오. 말은 적게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서둘러 해답을 주려 하지 말고 그의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태도야말로 누군가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일일 겁니다.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사는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춘분이 다가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파종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이 난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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