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11)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사진/김승범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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