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2)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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