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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 한희철의 얘기마을(173) 파스 남편이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내의 친구가 파스를 한 뭉치 보내 왔다.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혼자 사는 할머니들에게 나눠 드리기로 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작실로 올라갔다. 늦게야 끝나는 일.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그 시간이 맞다. 다리 건너 첫 번째 집인 김천복 할머니네 들렀을 때,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두 분 할머니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엄마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두 분은 그렇게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한 지붕 아래에서 한 지아비와 함께 살았던 두 분이 이젠 두 분만 남아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산다. 두 분 할머니는 일을 마치고 막 돌아온 길이었다. 손이며 얼굴에 묻은 흙이 그대로였다. 얼른 씻고 저녁 상 차려야 함에도, 그러고 있으면 누가 상이나 차려올 것처.. 2020. 12. 14.
첫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신동숙의 글밭(290) 첫 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첫 눈으로세상을 하얗게 지우신다 집을 지우고자동차를 지우고길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먼 산을 지우고사람을 지우신다 첫 눈 속에서두 눈을 감으며하얀빛으로 욕망의 집을 지우고떠돌던 길을 지우고한 점 나를 지운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보이는 건 하얀빛 오늘 내린 첫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지우시고아침햇살로 다시 쓰신다 2020. 12. 13.
기도 덕 한희철의 얘기마을(172) 기도 덕 “사실 비가 안 와 애가 탈 땐 비 좀 오시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습니다만, 하나님, 이젠 비가 너무 오셔서 걱정입니다. 비 좀 그만 오시게 해 주시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며칠째 많은 비가 쏟아지고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수요저녁예배를 드릴 때, 김영옥 집사님의 기도에 솔직함이 담긴다. 지긋이 하나님도 웃으셨으리라. 그날 이후 장마 곱게 지나간 데에는 집사님 기도 덕, 하나님의 웃음 덕 적지 않았으리라. - (1992년) 2020. 12. 13.
만병통치약 한희철의 얘기마을(171) 만병통치약 풀 타 죽는 약을 뿌렸는데도 풀이 잘 안 죽었다고 남철 씨는 묻지도 않은 마당 풀에 대해 변명을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일 마치고 돌아온 광철 씨 동생 남철 씨를 언덕배기 그의 집에서 만났다. “요새는 이 약 먹는데....” 남철 씨는 호주머니에서 웬 약을 꺼냈다. 알약들이 두 줄로 나란히 박혀 있었다. 보니 게보린이었다. “이가 아파요?” 물었더니 “아니요. 농약 치고 나면 어질어질 해서요. 잠 안 올 때도 이 약 먹으면 잠이 잘 와요. 히히히.” 이야기를 마치며 남철 씨는 버릇처럼 든 웃음을 웃었다. 이집 저집, 이 동네 저 동네 품 팔러 다니는 남철 씨. 그때마다 그의 호주머니 속에 비상약처럼 들어 있는 게보린 알약. 농약치고 어질하면 알약 하나 꺼내 먹.. 2020. 12. 12.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개역성경)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안함이 우리 마음을 시시각각 괴롭히기에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걸어온 한 해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야 하는 당회조차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비감스럽기만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지에 흩어져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초기 감리교도들은 모일 .. 2020. 12. 11.
할머니의 거짓말 한희철의 얘기마을(170) 할머니의 거짓말 누워 계실 줄로 알았던 할머니는 대문가에 나와 앉아 있었다. 남아 있는 독기를 빼낸다며 대야에 흙을 가득 담아 흙 속에 손을 파묻은 채였다. 좀 어떠시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할머니는 웃었지만, 흙에서 빼낸 손은 괜찮지 않았다. 독기가 검붉게 퍼진 것이 팔뚝까지 뚱뚱 부어 있었다. 서울에 있는 교회 학생부 집회를 다녀오고 나니 어두운 소식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허석분 할머니가 뱀에 물린 것이었다. 뒷밭에 잠깐 일하러 나가 김을 매는데, 손끝이 따끔해 보니 뱀이었다. 얼른 흙을 집어 먹으며 뱀을 쫓아가 그놈을 돌로 짓이겨 죽였다. 입으로 물린 데를 빨았는데 입 안 가득 독기가 느껴질 만큼 독이 독했다. 괜찮겠지 참다가 시간이 갈수록 몸이 부어오르자 할 수 없이.. 2020. 12. 11.
겨릿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69) 겨릿소 내게 오라. 내가 네 겨릿소가 되어주마. 내가 네 곁에서 너와 함께 밭을 갈겠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얼마 전 예배당로 들어서는 출입문 유리에 글을 써서 붙였다. 성경말씀을 자기 생각이나 형편에 따라 바꿔 읽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은 유익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겨릿소’란 소로 밭을 갈 때 두 마리 소를 함께 부르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한 마리 소가 갈지만 때와 곳에 따라서는 겨릿소를 부리기도 한다. ‘내게 와서 쉬며 내 멍에를 매라’(마 11:28-30)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농촌 형편에 맞게 바꿔 보았다. 내가 비록 힘이 약하고 힘이 달려도 내 겨릿소인 안소가 든든하다면 그건 얼마나 큰 힘일까, 주님이 내 곁에서 내 안소가 되어 나와 함께 밭을.. 2020. 12. 10.
법원이 있는 마을 신동숙의 글밭(289) 법원이 있는 마을 - 검찰 개혁이 자리 바꿈만이 아니길 -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인 부산의 대신동을 두고 어른들은 교육 마을이라고 불렀다. 구덕산 자락 아래로 초·중·고 여러 학교들과 대학교가 있고, 미술·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있던 마을, 소문으로만 듣던 술주정꾼이나 깡패들이 잘 보이지 않던 건전한 동네로 추억한다. 산복도로가 가로지르던 빽빽한 산비탈 마을에는 6·25 피난민 시절에 지어진 판잣집도 간혹 보였으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큰 도로를 중심으로 번번한 평지에는 돌담이 높아 내부가 보이지 않는 양옥 저택들이 잘 자른 두부처럼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선 동네, 인적이 드문 넓다란 골목길을 지나가는 바가지 머리의 꼬마한테도 반갑게 손을 내밀어 흔들어 주는 건 언제나 하늘 아래 푸른.. 2020. 12. 10.
가난한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168) 가난한 사랑 아이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밖으로 돌아치기 일쑤고, 그나마 집에 있는 날은 뭔가를 읽고 쓴다고 방안에 쳐 박히곤 하니 같이 어울릴만한 시간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루 종일 두 녀석이 마당에서 노는 걸 보면 은근히 마음이 아프면서도 함께 하는 시간은 많지 못합니다. 그걸 잘 알기에 한가한 시간이 주어지면 아이들과 어울리려고 애써 노력을 합니다. 그중 쉽게 어울리는 것이 오토바이입니다. 혼자 타기에도 벅찬 조그만 오토바이지만 앞쪽에 규민이 뒤쪽에 소리를 태웁니다. 두 녀석은 오토바이 타는 걸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규민이는 오토바이를 탄다면 신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어서 떠나자고 아무나 보고 손을 흔들어 댑니다. 떨어지면 어떡하나 싶었던 처음과.. 2020.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