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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57

알찬 온기 신동숙의 글밭(257) 알찬 온기 혼자 앉은 방어떻게 알았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숨죽여 맑은 콧물을 훌쩍이고 있는 것을 누군가 속사정을 귀띔이라도 해주었을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저녁밥을 안 먹기로 한 것을 들릴 듯 말 듯 어렵사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마스크를 쓴 후 방문을 여니 방이 춥지는 않냐며 내미시는 종이 가방 속에는노랗게 환한 귤이 수북하다 작동이 되는지 모르겠다며놓아주시는 난로에 빨간불이 켜지고방 안에 온기가 감돈다 가을 햇살처럼알찬 온기에 시간을 잊고서 밤 늦도록 과 의 허공 사이를유유자적(悠悠自適) 헤매어도 좋을 것이다 2020. 10. 26.
전도서 기자는(3) 전도서 기자는(3)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고 또 기력이 쇠하여 어쩌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때의 젊은 시절의 힘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자랑으로 한 평생을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권좌의 영광에 취해 교만해지고, 자신의 간교한 지혜에 자만하여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으며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그걸 쫓아다니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자라고 알려진 전도서의 기자는 지식에 의한 명성을 도리어 거부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혀 사는 .. 2020. 10. 25.
되살이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되살이 죽을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이어가는 삶을 단강에서는 ‘되살이’라 합니다. 우속장님을 두고선 모두들 되살이를 하는 거라 합니다. 십 수 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빨래를 하다 ‘병원 하얀 차’가 마을을 지나 속장님 집으로 올라가는 걸 본 허석분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곧 무슨 소식이 있지 싶어 집에 와 두근두근 기다리는데 밤늦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올라가 봤더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쇠꼬챙이처럼 말라 뼈만 남은 몸을 방바닥에 뉘였는데, 상처 부위가 형편이 없어 정말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몇 달이나 갈까 동네.. 2020. 10. 25.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2020년 10월 서울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2020년 10월 서울 비텐베르크 ‘흑곰’ 호텔의 아침 식사용 식당에서 곰이 으르렁거린다. 벨기에의 관광객 한 그룹이 뷔페 식당으로 들어왔다. 함부르크에서 온 운동복 차림의 부부는 엘베 강변의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서둘렀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 교회의 교인들은 먼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언한다. 도시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르틴 루터를 보기 위해서다. 비텐베르크의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교회는 온통 다가오는 만성절(할로윈데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수많은 성인들의 유적이 제단 위에 흩어져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 조각, 저기에는 피 한 방울 혹은 순교자들의 뼈. 루터는 요새화된 탑의 고요한 골방에서 통찰을 얻는다.. 2020. 10. 24.
의의 연장이 되어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2020. 10. 24.
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124) 어느 날의 기도 위로를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슬픔을 모릅니다. 어둠속 잠 못 이루는 눈물의 뿌리가 어디까지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눔을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속이 좁습니다. 저 밖에 모릅니다. 받는 건 당연하면서도 베푸는 건 특별합니다. 축복을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은총을 모릅니다. 가난한 들판에 가득 쏟아져 내리는 햇살, 가난한 영혼 위에 고루 내리는 하늘의 은총을 우리는 모릅니다. 스스로 기름져 툭 불거져 나온 탐욕으론 이미 좁은 길을 지날 길이 없고, 하늘 뜻 담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도 위로를 말하는, 나눔을 말하는, 은총을 말하는, 말로 모든 걸 팔아버리는 우리들입니다. 용서 하소서. 주님 - (1994년) 2020. 10. 24.
죽이면 안 돼! 한희철의 얘기마을(123) 죽이면 안 돼! 때론 개미만 보아도 “엄마야!” 하며 기겁을 하던 소리가 주일 저녁예배 시간, 무슨 담력이 어디서 났는지 예배당에 들어 온 파리를 발을 번쩍 들어 밟으려 했다.]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왔던 다섯 살 준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만 눈이 휘둥그레져 하는 말, “죽이면 안 돼, 걔네 엄마가 찾는단 말이야.” - (1991년) 2020. 10. 22.
제 각각 세상 한희철의 얘기마을(122) 제 각각 세상 물난리 지나간 뒷모습은 참으로 참담했다. 강가를 따라 그림처럼 펼쳐진 기름지고 널따란 밭들은 이미 밭이 아니었다. 김장 무, 배추, 당근 등 파랗게 자라 올랐던 곡식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북한 모래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흙이 다 떠내려가 움푹 파인 자리에 흰 뼈처럼 돌들만 드러난 곳도 적지 않았다. 미끈하게 자라 올랐던 미루나무들도 어이없이 쓰러져선 깃발처럼 폐비닐만 날리고 있었다. 쉽게는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부론에 다녀오다 보니 강가를 따라 난 도로변에 웬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었다. 수해복구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쳤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차창 쪽으로 바싹 당겨 앉아 내다보니 웬걸, 강가 그 많은 사람들은 한결.. 2020. 10. 22.
고향 친구들 한희철의 얘기마을(121) 고향 친구들 재성이가 며칠 놀이방에 못 왔습니다. 엄마아빠를 따라 외할머니댁에 다니러 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 댁은 해남,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재성이 언제 와요?” 재성이가 외할머니 댁에 간 후 놀이방 친구들은 날마다 물었습니다. 그래야 며칠, 곧 있으면 다녀올 텐데도 아이들은 툭하면 재성이 언제 오냐고 물었습니다. 재성이 왔나 보러 가자고 놀이방이 끝나면 아이들은 재성이네 집으로 쪼르르 가 보곤 했습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재성이네 집에 불이 켜졌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습니다. 며칠 만에 재성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재성이는 집에 오자마자 놀이방으로 왔습니다. 재성이가 교회마당으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재성이가 왔다!” 박수까지.. 2020.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