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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52

낭독(朗讀) 신동숙의 글밭(240) 낭독(朗讀) 곁에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밀려올 때 묵상 중에도 흔들려서 말 한 마디 건져올릴 수 없을 때 책을 펼쳐보아도글이 자꾸만 달아날 때 책을 소리내어 읽어줍니다내가 나에게 읽어줍니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다독이고 다독이듯이 2020. 9. 25.
그날은 언제인지 한희철의 얘기마을(93) 그날은 언제인지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시 42:4) 말씀을 읽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시인의 마음 충분히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간 이들 모두 돌아와 함께 예배할 그날은 언제일지, 이 외진 땅에서 그려보는 그 날이 옛 일 그리는 옛 시인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 (1991년) 2020. 9. 24.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신동숙의 글밭(239)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땔감이래도 줏어다가 부뚜막 한 켠에 쟁여 드리고 싶은 집 가난한 오막살이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 책으로 둘러쌓인 방 서넛이 앉으면 꽉 차는 쪽방에서 권정생 선생님 이야기 한 자락만 들려주셔요 * '바보처럼 착하게 서 있는 집'은 권정생 선생님의 노래 상자 제목에서 인용 - 권정생 詩. 백창우 曲. 2020. 9. 24.
고마운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92) 고마운 사랑 심방 다녀오는 길, 사택 김치거리가 떨어졌다는 얘길 들었다시며 김천복 할머니가 당신 밭에 들러 배차(이곳에서 배추를 배차라고 부른다)를 뽑는다. “올 김장 어뜩하나 걱정했는데 나와 보니 아, 배차가 파-랗게 살아있질 않겠어유. 을마나 신기하고 감사하든지. 그러고 보면 곡식이 사람보다두 더 모진 것 같애유.” 지난 번 물난리에 며칠간 물에 잠겼던 강가 밭. 포기했던 배추가 살았다며, 그렇게 하나님 아부지는 먹고 살 길을 다 마련해 주신다며, 배추를 뽑으며 연신 고마워한다. 당신네 김치 할 땐 아까워 못 뽑은 통배추를 쑥쑥 뽑아 짚으로 묶는다. 고마운 사랑,고마운 사랑. - (1991년) 2020. 9. 23.
한마음 신동숙의 글밭(238) 한마음 그 옛날 당신이 내어준 한마음살갗을 스치는 바람인 듯가고 오지 않는 물결인 듯 까맣게 태운 마음 한 알가난한 마음에 품기로 하였습니다 바람결에 뭍어온 풀향 한 자락에물결에 내려앉은 별빛 한 점에그 한 말씀을 새기기로 하였습니다 2020. 9. 22.
깊은 주름들 한희철의 얘기마을(91) 깊은 주름들 “아무데구 자리 좀 알아봐 조유. 당체 농산 못 짓겠어유. 남의 땅 부쳐봐야 빚만 느니.” 해 어스름, 집으로 돌아가던 작실 아저씨 한 분이 교회 마당으로 올라와 ‘취직’ 부탁을 한다. 올해 58세.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라도 좋으니 아무 자리나 알아봐 달란다. 힘껏 빨아 무는 담배 불빛에어둠 속 각인되듯 드러나는 깊은 주름들. - (1991년) 2020. 9. 22.
한참을 발 못 떼는 한희철의 얘기마을(90) 한참을 발 못 떼는 “작년에는 수해 당했다구, 얘들 학비도 줄여주구 하더니, 올핸 그런 것두 없네유. 여기저기 당해선가 봐유.” “하기사 집까지 떠내려 보내구 이적지 천막에서 사는 이도 있으니, 그런데 비한다면 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망하니까 사실 힘이 하나도 읍네유.” “강가 1500평 밭에 무수(무)와 당근이 파란 게 여간 잘된 게 아니었어유. 그런데 하나도 남은 게 없으니. 지금 봐선 내년에도 못해먹을 거 같아유.” 집에 다녀가는 출가한 딸과 손주를 배웅하러 정류장에 나온 한 아주머니가 물난리 뒷소식을 묻자 장탄식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입술이 부르텄다. 가끔씩이라도 고향을 찾는 자식들.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양식이나 마련하.. 2020. 9. 21.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신동숙의 글밭(237)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나무골이 진 마루바닥으로 아침해가 빛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아침, 이렇게 가을이 옵니다. 해의 고도가 낮아져 집안으로 깊숙히 들어오는 만큼 이제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눅눅하던 가슴으로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토요일 아침엔, 숲이 있는 한적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머물러, 그동안 안으로 여몄던 가슴을 활짝 펼쳐 널어놓고 싶은 그런 날씨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는 헤아림으로 잠시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지난 초여름 밀양 표충사 작은 암자 뒷마당에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계곡물에 산딸기를 헹구어 먹던 날, 친정 엄마하고 약속했던, 가을이 오면 해인사에 함께 가기로 한 일.. 2020. 9. 21.
가을비와 풀벌레 신동숙의 글밭(236) 가을비와 풀벌레 한밤에 내려앉는 가을 빗소리가 봄비를 닮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이면빗소리에 머물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곤 하였습니다 순하디 순한 빗소리에 느슨해진 가슴으로 반짝 풀벌레밤동무가 궁금해집니다 맨발로 풀숲을 헤치며숨은 풀벌레를 찾으려는 아이처럼 숨죽여 빗소리를 헤치며풀벌레 소리를 찾아 잠잠히밤하늘에 귀를 대어봅니다 가전 기기음인지 풀벌레음인지 마음이 문전에서 키질을 하다가자연의 소리만 남겨 맞아들입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빗소리도 발걸음을 늦추어 더 낮아지고 풀벌레 소리는 떠올라가을밤을 울리는 두 줄의 현이 되었습니다 가을비와 풀벌레는한 음에 떠는 봄비와 꽃잎의 낮은 음으로 2020.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