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한희철의 얘기마을(95)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어릴 적 교회학교는 따뜻한 교실이었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다가도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놀던 것을 그만 두고 교회로 향했다.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린 때다. 이제쯤 생각하기로는 성경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책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 우리들 가슴엔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여름이었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빗소리에 가려졌는지, 선생님이 안 계신 건지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교회로 갔다. 검정 고무신에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쫄딱 맞은 채였다.


뚝뚝 빗물을 떨구며 기와지붕 허름한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예배당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텅 빈 것이 아니었다. 어둑한 제단 저쪽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보니 선생님이었다. 그날 예배는 선생님과 둘이서 드렸다.


그날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 선생님 이름이 무엇인지 난 지금 기억이 없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어두컴컴한 제단 앞  무릎을 꿇으셨던 선생님은 지금도 날 가르치고 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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