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발 못 떼는

한희철의 얘기마을(90)


한참을 발 못 떼는


“작년에는 수해 당했다구, 얘들 학비도 줄여주구 하더니, 올핸 그런 것두 없네유. 여기저기 당해선가 봐유.”


“하기사 집까지 떠내려 보내구 이적지 천막에서 사는 이도 있으니, 그런데 비한다면 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망하니까 사실 힘이 하나도 읍네유.”


“강가 1500평 밭에 무수(무)와 당근이 파란 게 여간 잘된 게 아니었어유. 그런데 하나도 남은 게 없으니. 지금 봐선 내년에도 못해먹을 거 같아유.”



집에 다녀가는 출가한 딸과 손주를 배웅하러 정류장에 나온 한 아주머니가 물난리 뒷소식을 묻자 장탄식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입술이 부르텄다. 


가끔씩이라도 고향을 찾는 자식들.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양식이나 마련하고 나머진 자식들에게 먹거리, 양념거리 전하는 게 그나마 외로이 사는 맛인데, 그게 부모 도리일 텐데 갈수록 그 일도 쉽지 않다.


떠난 버스 바라보며 한참을 발 못 떼는 반백의 아주머니.


 -<얘기마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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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신동숙의 글밭(237)


해인사, 엄마하고 약속한 가을 소풍

나무골이 진 마루바닥으로 아침해가 빛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아침, 이렇게 가을이 옵니다. 해의 고도가 낮아져 집안으로 깊숙히 들어오는 만큼 이제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눅눅하던 가슴으로 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토요일 아침엔, 숲이 있는 한적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머물러, 그동안 안으로 여몄던 가슴을 활짝 펼쳐 널어놓고 싶은 그런 날씨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하는 헤아림으로 잠시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추어보았습니다. 지난 초여름 밀양 표충사 작은 암자 뒷마당에 보리수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계곡물에 산딸기를 헹구어 먹던 날, 친정 엄마하고 약속했던, 가을이 오면 해인사에 함께 가기로 한 일이 떠오릅니다. 울산에선 밀양과 창녕을 지나는 국도로 가는 길이 무난하여 해인사까지 갔다가 하룻밤 그곳에서 묵고 다음날 천천히 돌아올 수 있는 알맞은 여정입니다.


그리고 저 혼자서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곳이 몇군데가 있습니다.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각 뒷편에 가면 있다는 작은 법보전은, 젊은 수도승이었던 법정 스님이 일평생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인 기도의 터전을 닦으신 곳이라고 합니다. 그곳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고, 잠시라도 머물러 앉아서 그 시절 스님이 누리셨을 그곳의 정취를 한 움큼이라도 가슴에 담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고승 희랑대사의 어진 모습과 성철 스님의 백련암 일주문을 먼 발치에서라도 잠시 머물러 바라보면서 암자 주위를 둘러싼 가야산과 가야산의 하늘을 한폭의 그림처럼 마음에 담아오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은 순간마다 언제든 맘껏 꺼내어 볼 수 있는 영원한 저장소는 언제나 가슴속 하늘이니까요. 



칠순이 넘으신 친정 엄마에게 차 안에서 드시고 싶은 간식을 여쭈니, 포도입니다. 줄기가 싱싱하고 잘 익은 머루포도를 어디에서 헹구어 먹을지 길을 떠나봐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엄마는 언제나 제 뒷좌석에 앉으십니다. 어느날 나무밑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던 얘기를 하시며, 몇 해 전부터 교회를 다니시며 알아가고 있는 하느님은 참 지혜롭다 하십니다. 자연의 도토리에서도 하느님이 하셨다 하시는 엄마의 마음이 어린 아이 같습니다. 


가을날 산에 가보면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도토리를 한창 줍고 난 다음에야 그 잎이 떨어져 온 땅을 다 덮으시는 이유를 헤아리는, 엄마의 눈길이 바라보는 하늘은 어디쯤인지, 맑은 하늘에는 마음이 가닿는 벽이 없는데도 그 울림은 커다랗습니다. 


급하게 달리는 고속도로보다는 느리게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시골길을 따라서 가는 여정이 정겹습니다. 천천히 달리며 창밖으로 스치듯 바라보는 국도변의 풍경은 느린 여행길에 덤으로 주어지는, 과정이 그대로 소풍길이 되는 선물입니다. 가다가 어느 마을 도로변 천막 노점에 잘 익은 밤과 감이라도 보이면 잠시 내려서 추석 준비를 해둘 수도 있습니다. 


소망하는 법보전과 희랑대와 백련암에 머물 잠깐의 한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지나온 모든 순간순간이 또한 그 한 순간 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 있다면, 천상병 시인의 시처럼 이 땅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교의 여덟가지 바른법인 팔정도와 예수를 따르는 좁은길이 향하는 삶이란 순간에서 영원을,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한 천국이 되는, 토마스 머튼이 얘기한 관상의 기도를 통해 미리 맛보는 천국의 삶이자 본래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태초의 삶이 되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진리의 삶으로 향하는, 불고 싶은데로 부는 바람 성령이 이끄는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성령은 가슴에서 불어오는 가을 바람 같다는 생각들을 두루두루 가을 하늘에 펼쳐놓으며 엄마와 함께 가는 가을날의 소풍입니다.


법정 스님의 법보전 마루바닥에는 이미 오후의 햇살이 저보다 먼저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내려앉은 빛이 오래 사귄 정겨운 벗인냥 살갑습니다. 엄마는 해인사 장경각 경내 어느 하늘 아래 한가로이 계신지 잠시 보이지 않고, 저는 햇살 곁으로 다정한 벗인냥 아무 말없이 앉았습니다. 마루바닥으로 들어와 앉은 햇살이 이어서 가슴으로 들어오는지 무심했던 구석까지 따스해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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