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는다는 것

껍질을 벗는다는 것


“덧없는 세상살이에서 나그네처럼 사는 동안, 주님의 율례가 나의 노래입니다.”(시119:54)

주님의 이름을 높여 기립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코로나 블루니 코로나 레드니 하는 말들이 널리 유통되는 시대입니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찾아오는 영혼의 질병인 우울증과 짜증과 분노가 심각합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고 학생들의 등교도 자꾸 미뤄지면서 가족 간의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참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10살, 8살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가 일어나 다치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한 어떤 이는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이리저리 휘젓기도 했습니다. 환각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이도 있고, 만취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성실한 가장을 치어 죽이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이전에도 전혀 없었던 일들은 아니지만 요즘 이런 일들이 더욱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별 생각없이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이 오히려 특별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나 왁자지껄하고, 차 한 잔 나누며 정담을 나누고, 참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쳤던 온갖 의문들을 놓고 설왕설래하던 시간이 기억의 저편인양 아득하기만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입니다. 

요즘은 조석으로 바람이 시원합니다. 벌써 여러 날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선풍기를 닦아 창고에 들여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공원의 키 큰 나무 밑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이 쓸쓸해 보입니다. 짙은 초록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마치 햇살을 머금은 듯 조금씩 색이 옅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매들은 단맛이 스며들며 무르익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지인들이 김장배추 모종을 심었다고 알려오네요. 때를 따르며 산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요즘은 두문불출하며 지내서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춤사위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엊그제 교우 한 분이 알밤을 보내주셨습니다. 작업실 앞에 있는 큰 밤나무에서 떨어진 것을 주웠다고 합니다. 마침 그 때 유튜브를 통해 제 설교를 듣고 계셨던 모양인데, 문득 이 밤을 통해 문안인사라도 건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 설익은 밤을 따서 이빨로 떫은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를 벗겨내고 우둑우둑 밤을 씹어먹던 그 때가 떠올랐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밤나무나 참나무의 상처난 부분을 나뭇가지로 쑤석거리며 턱이 강한 사슴벌레를 찾던 생각도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달콤한 수액을 탐하다가 어린 꼬마들에게 붙잡혀 동족간의 싸움에 내몰렸던 사슴벌레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밤송이를 발로 밟아 껍질을 발기다가 찢어진 고무신 사이를 파고 든 가시에 찔려 비명을 지르던 기억도 아련합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시간 개념에 대해 배웠습니다. 일상적 시간, 시계로 계측할 수 있는 양적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라 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질적 시간, 수직으로 돌입하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 한다고 배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결정적 계시의 순간을 이르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세상에서의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광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가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부활 이후 승천을 앞둔 주님께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그때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한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1:6, 7) 사람들은 ‘때’의 문제를 자기들의 통제 속에 두고 싶어합니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의 주인이 아니기에 때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리며 살 뿐입니다. 

뜬금없이 카이로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신학교 교수님들이 카이로스를 설명하기 위해 때가 되면 누가 흔들지 않아도 후드득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알밤의 이미지를 동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끝날까 궁금해 하십니다. 감염병 학자들도 그 때를 가늠하기 어렵다니 비전문가인 우리가 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를 알 수 없다하여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불안에 떠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이르셨습니다. 눅진눅진한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밤에 대한 기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료한 겨울날이면 화롯불 속에 밤을 묻어두었다가 먹곤 했습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던 터인지라 겨울밤이나 온 식구가 아랫목에 펼쳐둔 이불에 발을 묻고 옛날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이야기에 열중하다 보면 밤이 타는 줄도 모를 때가 많았지요. 어떤 때는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밤이 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밤껍질에 칼집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잘하다가도 한 번 그런 실수를 하고 나면 꼬마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외부 세계에 의해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껍질을 만들곤 합니다. 그 껍질이 두꺼울수록 자아 또한 강해집니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소통할 능력이 줄어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 아我‘ 자는 ‘손 수手‘ 자와 ‘창 戈‘ 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것이 자아라는 말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과 만나고 나면 우리 마음에 상처가 남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말입니다만 세상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랍스터’는 불사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 하더군요. 랍스터는 거듭 껍질을 벗으면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 ‘탈피탈각’을 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껍질을 벗는다는 것‘을 신앙적 언어로 말하자면 ‘거듭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은 회개의 열매입니다만, 회개조차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후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결의와 다짐은 시간과 더불어 퇴색되곤 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죄의 버릇은 쉽게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된다’고 했습니다. 필연을 끊어낼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러기에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패와 고통, 시련과 무기력, 권태와 허무와 같은 삶의 부정적 계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껍질을 벗기는 기회로 삼기도 하십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언약에서 멀어진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역사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런 논리를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코로나19는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이 되어 버린 세계와 한국교회의 실상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확장에 여념이 없었던 개신교회가 얼마나 시민사회의 상식에서 멀어졌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나날입니다. 역사가인 최종원 교수는 “냉정하게 보자면, 우리 개신교회는 아직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한국 사회와 어떻게 건전하고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시점에 있다”(최종원,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비아토르, 2019, p. 97)고 말했습니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쓰라림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이 은총의 계기일 수도 있음을 어렴풋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사회 현실과 유리된 신앙은 종이로 짓는 집처럼 허망합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되어야 한다거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소금’이나 ‘빛’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두렵지만 복된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언해주신 현실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할 수 있다면 으늑한 공간에 모여 두런두런 담소도 나누고,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의 소식을 목말라 합니다. 이 좋은 가을날, 우울이나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넓혀 이웃들을 마음으로 맞아들이십시오. 껄껄 웃으며 주위를 환하게 물들이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9월 1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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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얘기마을(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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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뿐인지도 모른다고,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던 한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불쑥 내뱉은 말을 다시 수긍하게 되는 건 쌓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답답하구, 

괴롭구, 

끝내 송구스러워지는 삶,

이렇게 가는 젊음의 한 시절.

무엇일까, 


이 붙잡힘이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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