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햇살

한희철의 얘기마을(77)


그리운 햇살



가물어 물을 대던 기다란 호스가 곳곳에 그대로인데 이번엔 물난리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 삽을 들고 물꼬 트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비도 좀 어지간히 와야지. 밤새 빗소리에 한잠도 못 잤어.”


간밤에 잠을 못 이룬 건 투정하듯 말하고 있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김영옥 집사님 네 강가 밭은 또 물에 잠겼다. 뽑을 때가 다 됐던 당근이 그대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드넓은 강가 밭의 대부분은 당근, 당근을 팔 때가 되었는데 다시 물난리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가던 당근이 빗속에서 짓무른 탓인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오는 것이다.


미리 선금을 주고 이 밭 저 밭 밭떼기로 산 사람은 아예 앓아누웠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팔았으니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해마다 겪으면서도 해마다 새로운 대책 없는 아픔. 잠깐의 햇볕도 없이 모처럼 비가 쉬더니만 내일부터는 또 많은 비가 올 거라 했다.

햇살이 그립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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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쓴 얼굴이 아름다워요

신동숙의 글밭(228)


마스크를 쓴 얼굴이 아름다워요





마스크를 쓴 얼굴이 아름다워요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우리를 지키기 위한 안전띠지요


마스크를 쓴 눈빛이 사랑스러워요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고마운

우리를 살리기 위한 생명띠지요


버스와 지하철에서

식당과 카페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산과 바닷가에서

단 둘이 있을 때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으려고

내리지 않으려고

언제나 오래 참는


마스크 속의 인내와 절제는 

감사와 기쁨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낮아진

우리들 사랑의 새로운 호흡법이지요


화평과 온유의 고요해진 숨결로

가슴속 아주 작은 소리까지 

언제나 귀를 기울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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