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철 씨의 교회 사랑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0)


남철 씨의 교회 사랑



주일저녁, 초종을 치러 나갔더니 예배당에 불이 켜 있다. 누가 일찍 왔을까 문을 열었더니 남철 씨다. 얼마 전 돌아온 광철 씨 동생 남철 씨, 그가 교회 마루를 청소하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떠나 있는 동안 교회 생각 많이 났다는 그의 말이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떠나서 깨달은, 전엔 몰랐던 교회 사랑을 남철 씨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광고시간, 그 따뜻한 마음을 교우들께 알렸고 그 마음 박수로 받았을 때, 남철 씨는 히죽 예의 익숙한 표정으로 웃었다.


단강을 떠나 소식 끊겼을 때도 눈에 선했던 그 웃음을.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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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우러러보는 꽃처럼 - <시편사색>을 읽다가

신동숙의 글밭(223)


엎드려 우러러보는 꽃처럼 - <시편사색>을 읽다가


<시편 사색>을 읽다가,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문장을 만나게 되어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마음 한 켠으로는 필자의 짧은 소견이 덧붙여져 오히려 문장의 본뜻을 가리게 되는 폐를 끼치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히브리 시인의 시편 16편 6절 -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를 두고서, <시편사색>의 오경웅 시인은 '님 주신 유업을 누리는 중에 엎드리고 우러르며 님의 뜻 헤아리네' - 優游田園中 俯仰稱心意 (우유전원중 부앙칭심의)로 해설하였다. <시편 사색> 송대선 역자의 해설 전문을 그대로 옮기자면, 


'히브리 시인은 주님이 허락하신 유업에 즐거워하지만 오경웅은 그 유업을 누리면서 주님의 뜻을 겸손히 헤아려본다. 이를 부앙(俯仰) 즉 '엎드려 우러른다'고 표현하였다. 신앙의 참된 자세이다. 주님을 우러를 수밖에 없으니 앙(仰-우러를 앙)이되 동시에 엎드려 자신을 돌이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부(俯-엎드릴 부)이다. 엎드림 없는 우러름은 자신을 잊는 공중누각이요. 우러름 없는 자기 살핌은 절망의 나락이다. 히브리 시편에서 뽑아내는 오경웅 시인의 눈매가 고맙다.'(<시편 사색> 104쪽, 오경웅 지음, 송대선 옮김·해설, 꽃자리)


송대선 역자의 말처럼 오경웅 시인의 눈매가 고맙고, 그 눈매를 알아본 역자의 눈매가 더불어 고마운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잊고 지내온 하나의 눈매가 바로 이 '엎드림'이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닿는다. 흔히 '엎드림'을 두고 우상에게 절을 하는 행위적 의미로만 치부해 버린 오류를 그동안 범한 건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그 옛날 일본 천황에게 단순히 몸을 굽히는 신사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조상의 제삿상에 몸을 굽혀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사찰이나 집에서 드리는 108참회의 절(108배)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두고, 몸을 낮추어 엎드리는 행위 자체를 단순히 우상 숭배라 치부해 버린 채, 지금껏 개신교회는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며 스스로 자랑의 말을 일삼아 온, 어느 일부 개신교 정통 종파가 지금껏 보인 모습은, 그보다 더한 우상 숭배인 마음의 아상과 교만과 물질의 탐욕으로, 세상의 상식을 등진채 쌓아온 것은 대형 성벽이 아닌가? 성경의 본뜻을 표면적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나부터도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을까!


성경을 읽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길은 예수와 하느님의 본뜻을 알아차리는 길이 아닌가? 그 길이 말씀 묵상과 기도의 길이라면, 바깥에서 누군가 대신 풀어주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참고서로 삼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인 마음속 성령 즉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의 하늘에,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어 보는 말씀 묵상과 관상의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 될 수 있는 온전한 길 투명한 길. 그 길로 나아가는 걸음마다 날숨마다 엎드려 하늘을 우러르는 길이 바른길이 아닌가 하고 헤아려본다. 


엎드림의 첫걸음이란, 토머스 머튼의 표현을 빌려 자기를 깨끗이 하는 자기 정화(淨化)와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오경웅 시인의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의 깨어있는 깨달음의 길에 기대어 풀어보려고 한다. 도덕과 사회 윤리를 저버린 종교인의 맹목적 맹신적 믿음으로 과연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단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대속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예수가 말한 좁은길인가? 


필자가 신약에서 본 예수의 복음은 예수가 공생애의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신 선물은 십자가가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령 곧 양심이다. 거듭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종교와 신앙 생활이 곧 윤리 생활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 종교인의 허황되고 불투명한 말들이 이 세상의 질서와 우리의 이해를 그동안 얼마나 많이 어지럽히고 있었던가? 


심지어 안타깝게도 때로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종교 생활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 스스로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던가? 적어도 우리는 나약하기에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이어서 거듭 참회와 회심의 투명한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에 자신의 죄를 덮고자 손바닥으로 하늘의 뜻을 가려선 안되는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신 하느님과 예수가 그토록 강조한 것이 마음이기에, 무릇 그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자신을 닦고 자기를 비우는 첫걸음인 도덕과 윤리의 맑은 길이, 나아가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라고 했던 하느님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개신교회의 첫걸음이 그런 맑은 걸음일 수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깨어있는 이들이 그 맑은 걸음을 통해 기꺼이 그 길을 따르고자 할 것인가. 


물론 그 길을 묵묵히 걸으며 예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을 개신교 안에서도 투명한 하늘처럼 더러는 보았기에 필자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예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마음은 이미 종교를 초월해서 가장 온전한 빛과 진리와 생명이 된다. 예배당 건물과 교리의 틀 속에 가두어 놓기엔 자유이신 하늘은 광활하기만 하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겸손히 낮추어 마지막 숨까지 내어놓는 엎드림은 그대로 자기 비움의 길이다. 하늘의 뜻이 임재하는 땅 즉 내 몸과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길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에 나오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얼굴이, 진리의 하늘로 향하는 진실의 나뭇가지와 줄기와 꽃의 마음이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에서 볼 수 있는 숨결은, 엎드려 그 만큼 낮아지고 작아져 땅을 끌어안고서 안으로 자기를 성찰하며, 이어서 마지막 한숨까지 텅빈 비움으로 투명해진 양심의 하늘에 비추어, 주님의 뜻을 겸손히 헤아리려는 나무뿌리의 마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홀로 골방에서 진리와 자기의 양심(성령)을 등불 삼고서, 자기 안으로 고요히 침잠하는 말씀 묵상과 관상 기도의 뿌리내림이 곧 엎드림의 길이 되고, 엎드림으로 자기를 비운 날숨 만큼 저절로 채워질 하늘의 들숨을 우러르는 길이 예수의 좁은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 즉 마음의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뿌리내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던가.

피어나는 모든 생명은 제 가슴으로 뿌리를 내린다.

엎드려 자기 숨을 다 비우며 땅을 끌어안는 뿌리처럼,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높이 자라나는 줄기와 저절로 채워지는 하늘 숨으로 피어나는 꽃처럼,

땅으로 엎드려 하늘을 우러르는 꽃과 나무처럼,

나를 비워 그대로 하늘이 드러나게 하는 투명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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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뎌야 할 빈자리

한희철의 얘기마을(69)


견뎌야 할 빈자리


여름성경학교가 끝나던 날, 빙 둘러서서 인사를 나누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하나 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흘간 함께 했던 시간을 두고 벌써 정은 싹터 헤어짐이 아쉬운 것이다. 경림이와 은희가 먼저 눈물을 보였고 그러자 내내 참았던 눈물이 따라 터진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풍금 의자에 마이크를 잡고 앉아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던 나 자신도 벌써부터 눈물이 목젖까지 차올라 겨우겨우 참아내야 했다. 나마저 울고 나면 와락 눈물바다가 될 것 같았다.



문득 선생님들이 떠난 뒤의 교회 빈 모습이 떠올랐다. 며칠이긴 했지만 활발하고 의욕 있는 선생님들로 교회는 생기에 넘쳤었는데 모두 돌아가면 남는 건 나 혼자뿐, 다시 빈자리를 견뎌야 한다. 선생님들과 함께 한 시간을 은총어린 기억으로 간직할 뿐, 아이들은 전에 모르던 허전함을 맛봐야 한다.


아이들과 선생님들 눈가마다 번지는 눈물을 두고도 그랬지만 곧 맞게 될 빈 모습을 두고 꾸역꾸역 빈 울음을 삼켜야 했다.


성경학교가 끝난 다음날, 아이들은 교회 주위를 서성여 맴돌았고, 또 몇 명은 우표를 구하기도 했다. 떠나간 선생님들께 편지를 쓴다고.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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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나무처럼

신동숙의 글밭(222)


한 그루 나무처럼



한 그루 나무처럼

제자리에 머물러


자기 안으로 깊어진 사색의 뿌리 만큼

세상 밖으로 저절로 가지를 뻗치는


한 그루 나무처럼

하늘을 우러르는


고요히 숨쉬는 나로 인해

오늘도 하늘이 푸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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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집에도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68)


좋았던 집에도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20여 년 동안 운전기사로 일해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번 돈을 아껴 모아 꼬박꼬박 저금을 했습니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주택부금을 부은 것입니다. 한 푼 한 푼 적은 돈이지만 내 집 꿈을 꾸며 쓸 것 안 쓰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20여년이 지만 어느 날 그는 마침내 내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파트 추첨에서 당첨이 된 것입니다. 좁다란 아파트지만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셋집 아니고 내 집인데요. 20여 년 동안 모은 돈이 꼭 아파트 값은 되어 그 값 치르고 나니 고생한 보람도 있고 여간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밥 먹듯 이사 고생시켰던 부인, 자식들에게도 난생 처음 뿌듯했으니까요.



그런지 두 달만의 일입니다. 그가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일할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기운이 쪽 빠져 나가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술까지 마시게 되었고, 그렇게 좋았던 집에도 들어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왜냐고요?

사기를 당했냐고요? 

재산 문제로 자식끼리 싸움을 했냐고요? 

아닙니다, 모두 아닙니다. 


이유는 엉뚱한 데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파트 값이 두 달 만에 배로 오른 것입니다. 두 배로 올랐으면 좋아할 일이지 왜 회의에 빠졌냐고요? 그러기에 그를 만나면 이런 희한한 사람도 다 있구나, 허리가 부러져라 껴안아 드릴 작정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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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파업, 의료진들도 아프다

신동숙의 글밭(221)


의료 파업, 의료진들도 아프다


나 자신도 육아 파업과 주부 파업을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육아의 가장 큰 적은 경제력의 빈곤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닌, 그 어떤 것보다 '엄마의 피로'라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피로하면 만사가 다 귀찮고 힘든 것이다. 사랑하고 안아 주어야 할 귀한 제 자식이라도 밀어내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 들면서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때가 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업을 하는 의료진들의 몸과 마음이 그러한 상태까지 간 것인가?


처음엔 사소하고 가볍게 찾아온 피로감이 해소되지 못해 점점 쌓여만 가고, 과중된 업무에 스트레스까지 쌓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면역체계는 무너져 내지기 시작하는 것이 순리다. 하느님도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7일째 되는 날 안식일을 가지신 이유를 가만히 마음으로 헤아려 본다. 이 하루 동안에도 낮이 가고 밤이 오면 하늘의 큰 빛을 거두시고, 달과 별로 작은 등불을 켜두시는 어진 손길로, 우리의 눈을 감기우며 평온한 잠을 선물로 주시는 뜻을 헤아리다 보면, 휴식의 의미가 생명의 뜻으로 읽힌다.


자연스러운 삶은 자연의 리듬과 순리에 따르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아픈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란 곳은 교대 근무이긴 해도 밤에도 불을 다 끄지 못한다. 마치 어둔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홀로 외로운 의료진들이 아픈 이들을 지키고 있는 곳이 병원 안의 삶인 것이다. 그동안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만 제 역할을 다한 듯, 정작 코로나19의 모든 뒷감당과 책임과 의무를 의료진들에게만 떠넘기고서 우리 사회가 다소 무책임하고 무관심했던 건 아닌지 나 개인이 있는 자리부터 스스로 되돌아보게 된다.


의료 파업, 119 구급차로 이송되던 환자를 받아줄 병원 응급실을 찾느라 이곳저곳으로 다급하게 연락을 취했을 구급대원의 애타던 심정이 끝내 꺼져버린 장작불에 피어오르는 향불이 되고 만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세 군데 병원이 응급실 문을 닫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을 닫아건 병원 건물 안에는 누가 있었다는 말인가? 누군가 전화는 받았다는 얘긴데, 하지만 이러한 헤아림 조차도 이제는 아프기만 하다. 책임 추궁의 화살은 내 안에 빈 하늘을 먼저 날아서 지나가는 법이다.


오죽하면 병원 응급실 문을 닫아 걸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의료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거듭 마음을 모으며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 가슴을 찌르는 한 생각에 가 닿는다. 의료진들도 아픈 것이다. 아주 가끔은 육아 파업과 주부 파업을 하고 싶던 나 자신의 힘겹던 상황과 겹쳐지면서 그들을 향해 닫아건 마음의 문이 한가닥 열리며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안식과 위로가 간절했던 건 아닌지. 2월 경 신천지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이 만큼이라도 이겨낼 수 있었던 최전선에는 언제나 한국의 의료진들이 있었다는 고마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맨몸으로 달려간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곤 한 지역에선 밀린 월세였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2차 코로나19 재확산이라는 과중된 업무 뿐이다. 



이렇게 지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의료진들에게 있어 파업이란 어쩌면 그동안 의료 방호복 안에 갇혀 보이지 않게 저 혼자 끙끙 앓았을 환자의 비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도 누군가의 금쪽 같은 자녀이며 사랑하는 어미이며 아비이며, 아플 수도 있고, 하느님처럼 안식일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의 꿈에 의료진이 되겠다는 소망을 품었을 그 순결한 첫마음을 샘물처럼 기억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인간의 우둔함을 그 옛날 성경에서 보았다. 하느님에게 자신들의 왕을 세워 달라며 떼를 쓰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이 하시던 말씀이 지금까지도 걸림돌이 되어서 내 발길에 채이고 있는 것이다. 왕을 세워 달라 떼를 쓰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답변이란, 왕은 너희들에게 아무 필요가 없을 텐데, 왕을 세우면 너희들의 가장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할 텐데. 


골목길에 뒹구는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왕은 아무 쓸모가 없을 거라는 말씀을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우격다짐으로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뜻대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을 세워 주셨다.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외치는 자 전**의 시조가 되는지도 모르는, 사고도 많고 탈도 많던 사울왕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시선은 바깥 세상을 향하여 자기의 왕이 되어 달라고 자꾸만 떼를 쓰고 있다. 구세주를 원한다. 그래놓고는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한다. 내 삶을 풍요롭게 이끌어 줄 정치의 구세주, 만병을 치유해 줄 의료의 구세주,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줄 종교의 구세주, 무엇이든 내 손 안에서 나의 욕구를 무한으로 들어줄 손바닥 안의 구세주인 스마트폰은 이제는 거꾸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왕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그 편리함의 감옥에 갇혀 점점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책임감의 화살을 바깥으로만 쏘아대고 있다. 사랑과 책임의 화살끝은 언제나 자기 안으로 자신의 가슴으로 향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진리의 영인 성령 즉 양심을 선물로 주고 가신, 진리의 몸이 된 예수가 보여준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좁은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사 자유의지를 주시며, 노예가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다. 저마다 지닌 몸과 마음의 성전이, 비로소 하늘의 뜻이 임재할 거룩한 땅이 되는, 자유와 사랑을 하느님은 지금도 원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나의 벗이라 부르셨다.


내가 본 예수와 부처의 손가락이 한결같이 가리킨 곳은 마음이다. 하느님도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듯, 마음인 것이다. 예수와 부처의 모든 말씀은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안내문과 이정표와 참고서가 된다. 구세주를 만나는 길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보편적이고 공평하게 심어 주신 영성, 불성, 본성, 참자아, 얼나, 성령, 양심, 진리의 씨앗. 


한결같은 진리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은 자비와 긍휼의 땅, 모든 생명을 향한 사랑의 책임감이 지구의 뿌리이다. 모든 생명을 품으려는 우주적인 책임감이다. 우리가 의료진에게 바랬던 건 어쩌면 구세주의 우주적인 책임감이 아니었던가 싶은 무거운 생각까지 이어지다 보니 머릿속이 아찔해지면서 반성이 된다. 책임감의 화살끝은 언제나 나 자신 안으로만 향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길은 그 뒤를 따르는 자가 걸어가야 할 예수가 보여준 진리의 길이기에...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기에.


오늘 내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세워야 할 것은 너가 아니고 나인 것이다.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 떼쓰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원하던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와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세워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저마다 제 두 발로 서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안으로 우주적인 사랑의 책임감에 뿌리를 내림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자리는 바로 평화의 땅인 나 자신, 저마다 자신의 앉은 자리에서 자기만의 꽃을 피울 꽃자리인 것이다. 


이미 내 가슴 가장 깊숙히 심겨져 있는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양심은 피워내야 할 꽃의 씨앗이 된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기 안으로 낮아져 사랑의 책임감에 뿌리를 내릴 때, 더불어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세상은 기뻐하며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에. 떠들었더니 입이 아닌 어깨가 아프다. 그리고 마음이 더 아픈 날이다. 오늘도 강변에 피어나는 성실한 벗 들꽃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그 누구보다 마음이 무겁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의료진들의 온전한 마음의 회복과 건강과 평화를 빌며 기도하는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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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빈자

한희철의 얘기마을(67)


부자와 빈자


저승길 심판관 앞에 한 부자가 섰다. 세상 살 때 그러했듯 부자는 위세가 당당했다. 그를 본 심판관이 말했다.


“불쌍한 인생아, 너는 부유했지만 네 부의 기초는 다른 이의 눈물이었다. 괴롬의 방으로 가거라.” 


부자는 힘없이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역시 부자였던 이가 몹시 두려운 빛으로 섰다. 심판관이 말했다.


“위로 받을 지라, 인생아. 네 부의 기초는 네 땀이었다. 땀이 네게 부를 주었을 때 넌 괴로워했다. 어느 게 네 몫이며 어느 게 나눌 몫인지를. 위로의 방으로 가라.”



부자에게 내리는 판결을 본 한 빈자가 다행스런 얼굴로 심판관 앞에 섰다. 한동안 빈자의 얼굴을 쳐다볼 뿐 말이 없던 심판관이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지고, 그댄 가난했지만 오직 너를 위해 가난했구나. 네가 가난했던 건 다른 이의 눈에 비친 네 명예 때문이었다. 그 명예를 잃고 싶지 않아 넌 분명 게을렀다. 한숨의 방으로나 가거라.”


그러자 다음에 서 있던 한 빈자가 심판관이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로나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심판관의 판결은 달랐다.


“스스로 가난하여 스스로 넘친 자여, 모두 주고도 모두 남은 듯 사랑으로 마음 밑바닥 긁던 소리 없던 소리를 내 들었노라. 


큰 부자여, 네가 닦아준 눈물이 꽃들로 피어난 기쁨의 방으로 가거라. 거기가 네 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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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安居), 안전 수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신동숙의 글밭(220)


안거(安居), 안전 수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손톱 끝에 초승달인가 싶더니 성실한 달이 오늘은 하얀 반달로 떴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은, 하늘과 땅을 꿰뚫는, 가운데 중(中)의 한 획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쪽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나머지 반쪽을 헤아리려 저절로 아득해지는 마음은 보름달 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다.


이 순간 하얀 반달처럼 눈이 맑은 벗이 곁에 있다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픈 아니 서로가 아무 말없이 저 달을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을 귀뚜라미 소리 순하게 들려오는 여름밤이다. 


깨어 있는 낮의 하루와 조금 있으면 잠자리에 들 나머지 반쪽의 하루, 그 사이 어디쯤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교차의 시간은 왠지 나그네의 마음을 쓸쓸하게도 하지만 아득히 고요함으로 이끈다. 


연일 들려오는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시 재확산세로 접어든 코로나19 안전 수칙을 두고서, 종교 자유의 침해라는 그릇된 해석으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회 측의 교회건물 대면 예배 주장을 보면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콘크리트 건물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무엇이 똑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통의 벽을 세웠는가?


이제껏 지켜본 코로나19 안전 수칙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켜줄 최선의 지혜라는 생각이 더욱 든다. 적어도 코로나19 재확산이 터지기 직전까지, 그동안 저마다 지켜온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 비교적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누려올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앞으로도 이 바이러스와 수해와 이어지는 위기 속을 함께 지나가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켜줄 올바른 길이, 곧 코로나19 안전 수칙이라는 생각이 여전한 것이다.



이처럼 변화된 일상 생활의 소소한 규칙들로 저마다 크고 작은 답답증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봉쇄 수도원의 수도승들과 큰 절과 암자, 토굴에서 하안거 중인 수도승들일 것이다. 그리고 흙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선한 농부들의 삶도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도승들이다. 손수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옷과 도구 등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 필수품들은 손수 자급자족하는 삶, 그것은 수행처의 오랜 전통으로 수도원과 절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과 공부와 일상 생활은 그대로 구도자의 기도와 수행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처음부터 도심에 자리한 개신교회들은 흙과 농사와 자급자족의 삶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함께 성장해 오며, 자본의 고리 안에서 순환하는 삶은 점점 더 자연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자연과 동떨어진 진리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자연이란 곧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이어주는 가장 커다란 경전이기 때문이다. 


사막과 산을 떠난 예수를 상상할 수 없고, 보리수 나무를 떠난 석가모니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오늘 당신이 빌딩숲 사이로 난 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불어오는 밤바람에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달과 별을 찾으려는 시시한 마음이 일거나, 작은 풀꽃을 무심코 발견하고는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진 이슬 한 방울처럼 겸허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역시 도심 속에 살더라도 이미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이리라.


마스크 속의 침묵과 손씻기의 청결, 사람과 거리 두기의 고독과 기침처럼 작은 것 하나라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조심하는, 그 모든 일련의 깨어 있는 행함은 그대로 깨어 있는 구도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재택 근무와 온라인 등교 등 가급적 집안에 머물기를 권고하는 고립의 생활은 수도승들의 안거(安居)와 닮았다. 


안거란 어쩌면 우리들이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마음챙김과 비로소 영혼에 깃드는 삶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의 삶은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다. 밤이고 낮이고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선 바쁘게 움직여 자리를 메꾸어줄 부속품이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하루를 바쁘게 움직여 삶을 꾸리고 정신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한낱 게으름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상식이 된지 오래다. 


일명 멍때리는 시간의 고요는 명상과 관상의 기도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한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치 못하는 우리 자녀들에게서 앗아간 보물이 바로 심심함과 멍한 일상 너머의 시간, 곧 텅빈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텅빈 시간은 하늘로 열려 있다.


하지만 그러한 숨 가쁜 흐름 속에서도 사람의 본성은 자신도 모르게 주말이면 도심 속 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 산과 바다를 찾게 한다. 그 잠깐의 홀가분한 벗어남을 조금 더 길어진 수도승들의 안거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 안거를 가장 오래한 수도승으로 성철 스님의 대구 파계사 동구불출 십 년이 정점을 찍었다. 거기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타락의 정점을 찍었던 한국의 불교는 청정 수행도량으로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속을 함께 지나며, 안전 수칙 준수와 더불어 집안에 머무는 개개인의 안거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깊어짐으로, 다시금 깨어날 한국 개신교회의 희망을 그려본다. 한 영혼의 깨어남은 온 법계를 두루 평화롭게 하리라는 염원을 품어본다.


수도승들이 안거 중에 행하는 수행자의 삶이란, 명상 또는 참선과 경전 읽기가 대표적이라고 한다. 개신교에선 성경, 지혜서 읽기와 묵상과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바깥으로 향하던 삶으로부터 안으로 시선을 거두어 홀로 깊어지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꿰뚫는 가슴의 중심에 닿기 위한 기도와 진리의 삶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어려움 중에도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있고, 남편이 아내가 나이 드신 부모가 세상의 뉴스가 틈틈이 우리의 주의를 흐트려 놓는 와중에도, 이전의 삶보다 가급적 홀로 머물며 안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비로소 내면의 하늘에 뜨는 달과 별과 해를 보기를 원하는 빈 마음이,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다. 또한 저마다 고요해진 가슴이 시키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 낮아진 가슴에 밤바람처럼 지나던 성령이 떨구어준 소망의 씨앗이 움 트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안거 중에 할 수 있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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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점심

한희철의 얘기마을(66)


처절한 점심



지난번 과정자격심사 때 최경철 목사를 만났다. 최북단인 대대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교 동기다. 


차를 나누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한 말에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는데,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교역자 월례회를 하고선 다음 장소를 정하는데 아무도 나서는 교회가 없었다. 점심 대접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최 목사가 손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우리 대대리 교회는 작지만 다음번엔 우리 교회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그냥 국수라도 말아 조촐하게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일어섰고 생각한 대로 말하는데, 말하던 도중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조촐하게’라는 말이 ‘처절하게’로 바뀐 것이다. 처절하게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했으니 그 말이 얼마나 처절하게 들렸겠는가.


앉은 자리가 찻집인 것도 잊고 큰소리로 웃어대다가 최 목사 무릎을 툭 치며 그랬다.


“넌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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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건, 맑은 가난이더라

신동숙의 글밭(219)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건, 맑은 가난이더라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의사라는 직업의 엄중함-



어느덧 처서가 지나고, 어둑해진 서녘 하늘에 초승달이 보이는 밤이면, 선선한 밤바람이 답답하던 가슴속까지 어진 손길로 슬어 주는 듯하여, 이대로 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이내 제주도에서 한반도로 북상하고 있다는 태풍 바비 소식에 비설거지라도 하는지 다들 분주한 목소리다. 사는 곳이 달라도 조심하자며 부디 건강하라는 인사가 어디서든 한목소리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마음들이 그렇게 한결같이 따뜻한 것이다.


검색을 하다가 올라오는 소식 중에, 창밖으로 거세게 비를 퍼붓는 제주도 태풍 영상을 보면서 조마조마해 있는데, 빕빕~ 문자 알림음이 깜짝 놀래킨다. 보나마나 코로나19 관련 소식이다. 그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코로나19 양성 환자의 동선과 거듭되는 안전 수칙 준수에 대한 당부의 마음인 것이다. 이 정부 참 애쓴다. 애달프기까지하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마음인지 오롯이 내 마음에 비추어 헤아려 본다.


그 마음이 무거워서, 그동안엔 약간 내려서 헐렁하게 쓰던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더욱 끌어올려서 얼굴에 밀착을 시키다 보니, 더운 김이 훅하며 제 숨에 숨길이 막힌다. 새로운 마스크 속 호흡법이라고 해야 할지, 마스크와 평화로운 공존법이라고 해야 할지, 우스운 생각이 잠시 일어난다.


마스크 안에선 가급적 숨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느리고 길게 천천히 깊게 숨을 쉬면서, 비록 내 코와 입을 막은 마스크지만, 착한 수문장과 대항하지 않으려는 유순한 마음을 내기로 한다. 그렇게 돌이킨 한 생각이 평화로운 공존의 첫걸음이 아닌가. 세계 평화의 첫걸음은 언제나 내 입으로부터 나오는 숨이 그 시작이라는 생각을 거듭 가슴으로 되뇌이며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8.15 광복절날 광화문의 십자가 네 거리에서 연출된 아수라장 이후로 연일 하루에도 수차례 빕빕~ 울려대는 알림음에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한데, 이렇게 매번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다. 더구나 얼마 지나지도 않은 수해 침수로 인한 수재민들의 피해 복구도 이 땅 어디선가는 아직도 한창이라고 하는데, 코로나19 재확산세가 전국적으로 파도처럼 번져가고 있는 이 마당에, 이 땅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부 의사들의 파업 소식에 맥이 빠진다.


파 보나마나 그 잎을 보아 밥그릇 전쟁이다. 의사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나 역시 의사가 되려고 하지 않은 분명한 이유가 직업으로 삼기엔 나 스스로가 그 일을 감히 감당치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사람의 목숨과 생명을 다루는 엄중한 직업이 의사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의사의 파업은 총성 없는 전쟁이지만, 어쨌든 밥그릇을 지키려는 그대들의 외침은 총성보다 더 깊이 폐부를 찌른다. 그 외침은 없고 가난한 자의 배고픈 외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부른 자의 외침이자, 배운 자의 외침이자, 이미 누리고 있는 자의 외침이자, 앞으로 확고히 누리고자 하는 자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내 말이 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 구석엔 있다.)


사회적 공인으로써 국가와 국민들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야 할 정치 지도자, 길을 잃기 쉬운 생활인들의 영성과 의식을 깨우쳐 주어야 할 종교 지도자, 우리들의 생명을 맡길 의사가 이 사회와 국민을 향해 제 밥그릇을 지키겠다며 선포하고서 겨누는 총과 칼이다. 구국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벌이는 국가적 차원의 인질극인 것이다. 


그 옛날, 자신과 가족의 생명까지 걸고서 이 나라를 지키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는 그 뜻과 방향이 전혀 다른 길이다. 오로지 생명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려 의술을 펼치던 동의보감 허준의 순결한 마음이 다시금 그립기까지 하다. 옛 선조들의 꽃처럼 순결한 정신을 어둔 밤하늘에 별처럼 가슴에 떠올려 가슴으로 바라본다. 이따금 답답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눈을 들어 숨결을 고르는 나만의 방법이다.


유유히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2020년을 우리 후손들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유사 이래로 밥그릇 전쟁 치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을 국사와 세계사 수업시간과 역사책에서 이미 배운 바가 있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심은대로 거두는 법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이치처럼, 인간사 또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못하는 법이다. 


그 시작이 사리사욕이라면 그 끝도 사리사욕의 구렁텅이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역사 속에 어둔 그림자로 남아 있는 욕망의 역사들을 거울 삼아서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 세대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를 낳을 것이고, 손주를 낳을 것이고. 물질의 유산도 필요하지만, 결국 정말로 물려 주어야 하는 유산의 알멩이와 씨앗은 올바른 정신인 것이다. 내게도 이 점이 늘 숙제가 된다.


내가 이제껏 알고 있는 존경하는 분들 가운데, 역사 속에서 향기로운 꽃을 피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들 맑은 가난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꽃을 피우며 살다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신 분들이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 성 프란치스코 신부, 미국의 의식을 100년 앞당겼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단순함과 간소한 월든 숲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하늘과 가난한 이웃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까지 맑은 가난으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신 법정 스님, 세계적으로 칭송과 부러움을 받고 있는 코로나19 의료 혜택의 근간이 된 국민의료보험의 마중물 의사 장기려 선생님, 억대의 인세비를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신 권정생 선생님. 어둔 세상 어둔 가슴에 별이 되신 분들에게서 위안을 얻고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어 본다.


그렇다고 이분들처럼 이렇게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나부터도 이렇게 살지는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잘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인질극을 벌이지는 말자는 뜻이다. 도리에 어긋나는 죄를 짓지 말자는 뜻이다. 당장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픈 환자를 모른체 하는 일은 곧 내 부모와 내 형제와 가족과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모른체 하는 일과 다름 아니라는 한 생각에 눈을 뜨자는 것이다.


만약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헛된 일을 꾸미거나 아픈 생명을 모른체 하는 일은, 엄연히 도리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한때는 든든한 울타리처럼 여겨지기도 했을 속해 있는 대중과 단체와 집단은 어느 한순간이 되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한다. 불리하게 되면 그야말로 모른체 외면하는 모습을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든든함과 평안은 신뢰에 뿌리를 내릴 때 싹이 튼다.


울타리 속에 숨어서 짓는 죄도 낱낱이 한 개인의 죄가 되는 것이 마음의 이치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의 저울대 심판으로부터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물질적 재산과 경제적 풍요를 누리자는 인생이 삶의 목적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되는 직업이 바로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의사인 것이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와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존경하기를 원하는 직업이기에, 그 누구에게보다 더욱 가혹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오늘날에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건, 맑은 가난과 생명을 향한 어진 눈길과 타인을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슴이 가리키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눈동자 속에 깃든 어진 자비와 신뢰가 담긴 그러한 올바른 눈동자를 나 역시 신뢰의 눈길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리한 요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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