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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58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9)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말은 멍석 펴지듯 노을도 없는 어둠산 그림자 앞서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밤은 커다란 솜이불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 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돋고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밤은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날마다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검은 바다를 홀로 지난 것들을. (1992년) 2020. 7. 8.
보고만 있어도 신동숙의 글밭(183) 보고만 있어도 하늘 한 쪽먼 산 한 자락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좋은데 빈 가슴에 품고서말없이 바라본다 먼 별 한 점나무 한 그루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좋은데 눈 감고생각만 해도 2020. 7. 8.
촛불 신동숙의 글밭(182) 촛불 나 이토록 흔들리는 것은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둔 밤, 내 눈물의 심지에한 점 별빛으로 댕긴 불꽃 빈 가슴에 품은 불씨 하나불어오는 봄바람에 하늘빛 움이 튼다 2020. 7. 7.
함께 나눠야 할 몫 한희철의 얘기마을(18) 함께 나눠야 할 몫 “전도사님께 좀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주일 오후 신 집사님이 찾아왔다. 오는 길에 경운기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종대 엄마 어떤가 보려고 들렀다가 때마침 쏟아진 비에 마당에 있는 고추 들여놔 주느라 그랬다며, 머리와 옷이 젖은 채였다. 추워 보였다. 신집사님은 늘 추워 보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아들네 집에 다녀왔는데, 아들 말이 방 하나 얻어 드릴 테니 자기 있는 동네 근처로 오시라 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품 팔아야 고생이고, 병관이 중학교 밖에 더 보내겠냐며, 고생하긴 마찬가지라 해도 인접 도시 청주에 가면 일할 것도 많고, 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터이니 그게 안 낫겠냐며, 내려오시라 했다는 것이다. 자칫 또 한 분의 교우를 보내겠구.. 2020. 7. 7.
당신의 고독 신동숙의 글밭(181) 당신의 고독 세상을 바라보는당신의 눈길이 얼마나 그윽한지 당신이 심연에서 길어 올린 눈물로 적시우는 세상은 윤기가 돕니다 홀로 있는 시간 동안당신의 고독은 얼만큼 깊어지기에 당신이 뿌리 내릴 그 평화의 땅에선 촛불 하나가 타오르는지, 세상은 빛이 납니다 이제는 문득당신의 하늘도 나처럼 아무도 없는지 당신의 詩가 울리는 하늘은 높고도 맑고 고요히 깊어서 나의 고독이 아니고선당신의 고독에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당신을 만나려 호젓이관상의 기도 속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만 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독의 방이 쓸쓸하지만은 않아서 내 영혼이 고독 안에서만 비로소 평온한 쉼을 얻습니다 2020. 7. 6.
전기 요금 한희철의 얘기마을(17) 전기 요금 1070원, 지난 달 유치화 씨가 낸 전기 요금이다. 단칸방에 늙으신 홀어머니 모시고 살아가는 치화 씨, 1070원이라는 금액 속엔 가난하고 적막한 삶이 담겨있다. 지난주엔 한여름 내내 열심히 일한 치화 씨가 그동안 번 돈을 아껴 텔레비전을 샀다. 흑백 중고로 안테나 설치까지 4만원이 들었다 한다. 잘 나온다고, 이젠 다른 집으로 TV보러 안 가도 된다며 흐뭇해한다. 이번 달부터는 전기요금이 올라가겠지만, 그깟 전기요금이 문제일까. 저녁 밥상 물리고 나란히 앉아 함께 웃는 시간이며, 일하러 갔다 늦게 돌아오는 아들 기다리며 막막하기 그지없었던 어머니 시간 보내기도 좋고, 내일은 비 올 거라며 남의 말 듣기 전에 말할 수 있어 좋고, 난생 처음 예금한 돈 30만원이 통장.. 2020. 7. 6.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5)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5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수난곡 2부 47~48번음악듣기 : https://youtu.be/fhyQq8R1lr047(38)기도알토 아리아나의 하나님이여,나 이렇게 눈물 흘리오니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주여, 나를 보시옵소서! 당신 앞에서 슬피 우는 나의 마음과 나의 눈동자를 보시옵소서!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Schaue hier,Herz und Auge weint vor dir Bitterlich.48(39)코멘트 코랄나도 그와 같이 당신으로부터 떠났다가이렇게 당신 앞에 돌아왔습니다두려움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당신의 아들이.. 2020. 7. 3.
마주 잡을 손 한희철의 얘기마을(16) 마주 잡을 손 얼마 전 원주지방 남녀선교회 지회장들이 모여 교육받는 모임이 있었다. 공문을 받고 여선교회장인 이음천 속장님에게 알렸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속장님은 한사코 안 가겠다고 한다. 손이 이래갖고 어딜 가겠냐며 손을 내민다. 형편없이 갈라지고 터진 틈새를 따라 풀물 흙물이 밸대로 배었다. 어떠냐고, 그 손이 가장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손 아니냐며 얼마를 더 권했지만, 속장님은 막무가내였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이음천 속장님, 혼자되어 자식 키우며 농사 지어온 지난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까. 속장님은 지금도 무섭게 일을 한다. ‘소 갈 데 말 갈 데 없이’ 일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어쩌면 쉬 찾아들곤 하는 남편 없는 허.. 2020. 7. 3.
꽃이 핀 자리 신동숙의 글밭(180) 꽃이 핀 자리 올해도 꽃이 핍니다 지난해 꽃 진 자리에 할아버지 꽃 진 자리 할머니 꽃 진 자리 한 세상 살으시고눈물 같은 씨앗 떨군 자리마다 고운 얼굴꽃이 핍니다 2020.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