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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58

두 손 신동숙의 글밭(191) 두 손 구름은땅으로 낮아지려 그토록제 살을 깎아 빗줄기가 되는지 나무는말의 숨결이 되려 그토록제 살을 깎아사각이는 연필이 되었는지 두 손은따스한 가슴이 되려 그토록거친 나무를 쓰다듬어굳은살 배긴 나무가 되었는지 어둠은한 점 빛이 되려 그토록긴 밤을 쓰다듬어두 눈가에 아침 이슬로 맺히는지 2020. 7. 18.
오늘 앉은 자리 - 옥빛 나방과 능소화 신동숙의 글밭(190) 오늘 앉은 자리 - 옥빛 나방과 능소화 가지산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으레 나무 그루터기를 만나게 됩니다. 둥그런 그루터기 그늘 진 곳에는 어김없이 초록 이끼가 앉아 있고, 밝은 곳에는 작은 풀꽃들이 저절로 피어있습니다. 개미들은 제 집인양 들락날락거리는 모습에 생기가 돕니다. 저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잘려 나갔을 낮고 낮은 그루터기지만, 언제나 우뚝 키가 높고 높은 나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저 멀리 그루터기가 보이면, 점점 눈길이 머물고, 발걸음은 느려지고, 생각은 저절로 깊어집니다. 작고 여린 생명들에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집이 한껏 낮아진 나무 그루터기인 것입니다. 하늘로 뻗치던 생명을 잃은 후에도, 주위에 흔한 작은 생명들을 품고서 스스로 집이 된 나무 그루터기. .. 2020. 7. 17.
덕은리 한희철의 얘기마을(28) 덕은리 덕유산(德裕山)이라는 산명(山名)은 늘 그윽하게 다가왔다. 덕이 넉넉하다는 뜻도 그러하려니와 덕유라는 어감 또한 그 뜻하고 멀지가 않아 왠지 그윽한 맛이 풍긴다. 단강 조귀농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충청북도 땅이다. 개울 하나를 두고 강원도와 충청도가 갈린다. 충청북도 첫 마을 이름이 덕은리다. 충북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가 된다. 덕은리 초입에는 목판에 새긴 이정표가 서 있다. ‘德隱里’라 한문으로 써 있다. 덕이 숨어 있는 마을,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은은히 덕이 배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일까. 흐르는 남한강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덕은리 마을, ‘덕은’이라는 이름이 귀하다. 늘 그 이름 감당하며 사는 좋은 마을 되었으면. (1989) 2020. 7. 17.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6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 마태수난곡 2부 49~51번마태복음 27:1~6음악듣기 : https://youtu.be/XJa0DjXnDyU49(41)내러티브에반겔리스트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1. Des Morgens aber hielten alle Hohenpriester und die Ältesten des Volkes einen Rat über Jesum, .. 2020. 7. 16.
교우들은 모른다 한희철의 얘기마을(27) 교우들은 모른다 속상한지고. 보일러 놓고선 덩달아 좋아했던, 내 일처럼 좋아했던 신집사님 네. 그 때가 언제라고 집을 팔았단다. 서울 사람 별장 짓는다고, 바깥채 미경 네와 함께 집을 팔아 집값으로 70만원 받았단다. 빚 내 지붕 고치곤 빚 갚느라 고생 고생 별 고생 다한 게 작년 일인데, 따뜻한 보일러, 모처럼 싫지 않은 겨울 맞게 된 게 엊그제 일인데. 뒤늦게 고개 숙여 하는 말,“폐 끼치지 않으려고 말씀 안 드렸어요.” 모른다. 교우라도 모른다.교우들 안쓰러운 일을 두곤 가슴 얼마나 쓰린지, 별반 도움 못되는 현실 두곤 얼마나 마음 괴로운지, 모른다, 모른다. (1989) 2020. 7. 16.
한밤중에 울린 독경소리 신동숙의 글밭(189) 한밤중에 울린 독경소리 바람도 잠든 한밤중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경소리 고요한 소리를 따라서골방까지 풍겨오는 참기름 냄새 귀를 순하게 맑힌 풍경소리는밥숟가락이 살금살금 밥그릇에 닿는 소리 골방에서 책 읽는 엄마 몰래주방에서 배고픈 아들 스스로 달그락 그 소리가 순하고 미안해서 앉았던 몸을 일으킨다 입에 달게 또는 쓰게 을 읽느라상대 세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잊은 절대의 시간 스물네 살의 허기진 가슴에 달그락거리던성철 스님의 "자기를 속이지 마라." 마흔 살이 넘은 지금도 홀로 있는 내 골방에 절로 울리는 독경소리 그리고 비로소"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모든 생명이 이에서 남이니." 환한 말씀의 옷자락에 시름을 내려놓으며쉼을 얻는다 2020. 7. 15.
제 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한희철의 얘기마을(26) 제 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제 집 이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어둠속에 지워져가는 작실로 가는 먼 길, 할머니 등에 얹힌 커다란 보따리가 그렇게 보였습니다.땅에 닿을 듯 굽은 허리, 다다른 팔십 고개.보따리 가득한 건 강가 밭 비에 젖어 허옇게 싹 난 콩들입니다. 질라래비훨훨, 질라래비훨훨,새 나는 모습 아이에게 가르칠 때 했다는 질라래비훨훨처럼,앞뒤로 손 연신 흔들며, 노 젓듯 어둠 훼훼 저으며, 검은 길 걸어 오르는 김천복 할머니.아무리 무거워도 평생 제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1989) 2020. 7. 15.
우속장님네 황소 한희철의 얘기마을(25) 우속장님네 황소 우속장님네 소는, 윗작실 우속장님네 누런 황소는 겁도 없고 추위도 덜 타야겠다. 캄캄해지고도 한참을 더 어둠을 더듬어 일을 마치곤 그래 넌 여기서 그냥 자라 잠시 후에 다시 올 터니 들판에 소 놔 둔 채 집으로 오면텅 빈 들판에 혼자 남아 밤을 지새우는 우속장님네 황소. 커다란 두 눈 껌뻑여 밤하늘별을 세며 무서움 쫓고, 빙글빙글 같은 자리 돌며 어릴 적 엄마 젖 그리며 추위를 쫓고. (1989) 2020. 7. 14.
때 돈 한희철의 얘기마을(24) 때 돈 언젠가 수원 집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온 식구들이 마루에 모여앉아 봉투를 만들고 있었다. 굉장한 양이었다. 이리 저리 각을 따라 종이를 접고 풀을 붙이는데, 그 손놀림들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종이봉투 하나를 만들면 받는 돈이 8원. 난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살림이 종이봉투를 접을 만큼 궁색한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일까, 짐작이 되질 않았다. 한 장에 8원 하는 걸 바라고 저 고생을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사연을 들었을 때 난 잠시나마 내가 가졌던 의구심이 몹시 부끄러웠다. 어머니와 형수님은 그렇게 일을 함으로 작정한 헌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고, 온 식구가 나서서 그 일을 돕고 있었던 것이었다. 8원짜리 종이봉투, 난 같이 앉아 열심히 봉투를 따라 .. 2020.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