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친 자가 누구냐?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수난곡

No. 23 너를 친 자가 누구냐?


마태수난곡 242~44

마태복음 26:63b~68

음악듣기 : https://youtu.be/igAoiTIk6Jk

42(3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3b. 대제사장이 이르되

63. Und der Hohepriester antwortete, und sprach zu ihm:

대사

대제사장

63.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3. Ich beschwöre dich bei dem lebendigen Gott, daß du uns sagtest, ob du seiest Christus, der Sohn Gottes.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4.예수께서 이르시되

64. Jesus sprach zu ihm:

대사

예수

64.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64. Du sagst's. Doch sage ich euch: Von nun an wird's geschehen daß ihr sehen werdet des Menschen Sohn sitzen zur Rechten der Kraft, und kommen in den Wolken des Himmels.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65. Da zerriß der Hohepriester seine Kleider, und sprach:

대사

대제사장

65.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65. Er hat Gott gelästert. Was dürfen wir weiter Zeugnis! Siehe, jetzt habt ihr seine Gotteslästerung gehöret. 66. Was dünket euch?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6. 대답하여 이르되

66. Sie antworteten und sprachen:

대사

무리들

(합창)

66.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66. Er ist des Todes schuldig!

43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67. Da speieten sie aus in sein Angesicht, und schlugen ihn mit Fäusten. EtIiche aber schlugen ;ihn ins Angesicht und sprachen:

대사

무리들

(합창)

68.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68. Weissage uns, Christe, wer ist's, der dich schlug?

44(37)

코멘트

코랄

당신을 그렇게 친 자는 누구입니까?

나의 구세주 당신께 이토록 상처를 주고

악독하게 괴롭힌 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당신은 결코 죄인이 아니십니다.

죄인들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 뿐;

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거늘.

Wer hat dich so geschlagen,

Mein Heil, und dich mit Plagen

So übel zugericht.

Du bist ja nicht ein Sünder,

Wie wir und unsre Kinder;

Von Missetaten weißt du nicht.

 

한결같은 종교 지도자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대제사장과 종교인들이 지금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혈안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한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슬픈 일입니다. 종교를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 하고 종교의 껍데기에만 심취하게 되면 기어코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오늘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 곳곳에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예수의 영과 예수의 뜻과 예수의 길을 죽이려 드는 종교 지도자들로 가득합니다.

 

목회를 시작하고 가장 후회 되는 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장막을 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목회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기회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빼앗기는 영적 에너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외부적인 핍박이 아니라 교회의 내부적인 타락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값 싼 은혜를 지키기 위해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유유자적 잠잠히 내 갈 길만 가면 되는 것일까요? 둘 다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깨어 있는 신앙인이라면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자신의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예수의 눈으로, 예수의 기준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분노하고 회개시키고 보듬고 고치고 치유해야합니다. 특정 사람에 대한 비난과 미움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욕심, 그리고 그것을 조종하여 하나님 나라를 가로막는 악에 대한 단호함과 분노가 그 책임감을 이끌어야 합니다.

 

요즘 윤미향 국회의원, 정의연 전 대표를 향한 비난이 들끓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바쁜 교회사역을 따라가다 보니 사실관계 파악에 미진한 부분이 많아 분명한 제 견해를 말씀 드릴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윤미향 전 대표는 신학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 운동에 삶을 바친 일종의 사회선교사로서 작은 교회 목회자 정도의 급여를 받아가며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껏 일 해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528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윤 전 대표가 30년 세월을 하루아침에 배신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말을 통해서 윤 전 대표가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를 위해 일해 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 속에서 말단 공무원 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나라와 민족, 상처입은 약자들을 위해 그 험한 일을 30년 동안 해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윤 전 대표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사람답게 스스로가 먼저 분명히 인정하여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잘못이 엄중하면 마땅히 국회의원직을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연 사역의 의미와 윤 전 대표의 삼십년의 헌신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정의연이 수행하던 일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최선의 위로와 한일 양국 간 과거사 문제의 명확한 사과와 용서 치유를 통해 계속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한일 관계도 평화와 새로운 협력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윤 전 대표에게 들이대었던 잣대를 한국교회의 큰 목사님들에게 적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고급 차와 수많은 해외일정 등 교회에서 온갖 특권은 다 누리고 성직자로서 세상보다 물질관에 있어서 세상보다 더 엄격하고 검소해야 함에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액의 사례비와 은퇴비를 받습니다. 은퇴비 명목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돈을 쌈짓돈처럼 쓰며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너무 흔하게 발생하면서 다들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윤 전대표의 자녀 유학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상당수는 목회자의 자녀들인데 그들은 대부분 성도들의 귀한 헌금으로 외국 유학을 다녀오고 온갖 편법을 동원한 세습목회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를 예수의 눈으로, 예수의 기준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분노하고 고치고 치유해 나가야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나대로 예수의 영과 늘 함께 하는 가운데 예수의 뜻을 따라 예수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십자가 예수의 길을 늘 마음에 품는 것, 마태수난곡을 때마다 묵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대 제사장이 예수께 묻습니다.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살아 계신하나님 운운하기를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계신 하나님 운운하는 자들이 지금 자신들 앞에 살아서 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묻는 의도도 잘못 되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는지 궁금했다면 죄인에게 하듯 밤중에 몰래 몽치를 가지고 잡아 올 것이 아니라 정중히 모셔 와야 했을 것입니다. 그마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조심스러웠다면 니고데모처럼 밤중에 조용히 찾아가 물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 제사장은 그 중요한 질문을 다른 부정한 의도를 지닌 채 예수께 던지고 있습니다. 모함하여 죽이기 위함입니다. 진실과 진리는 깨끗한 영혼과 맑은 마음으로 바라 볼 때 보입니다. 진실과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욕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앞에 두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크나큰 비극입니다. 저들은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했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24:16).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주위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다만, 욕심과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너를 친자가 누구냐?

 

대제사장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한다 하며 하나님을 위하는 척 옷을 찢지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찢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대제사장은 묻습니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Was dünket euch?” 이러한 물음은 진리에 기반 하지 않는 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의식하는 가운데 조금씩 선동하고 동의를 얻어가면서 자신의 계략을 펼쳐갑니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본분을 잊어버린 일부 언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진리와 진실 위에 서 있는 사람은 혼자 있어도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며 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리들이 답하여 외칩니다. 이어지는 무리들의 합창은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성경의 66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라고 외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의 68절로서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하는 말입니다.

   

바흐의 음향효과

 

마태수난곡에는 두 개의 합창단과 소프라노 단선율을 부르는 또 하나의 리피에노 합창단까지 총 세 개의 합창 그룹이 있습니다. 마태수난곡 첫 번째 곡에 관한 설명을 다시 찾아보시면 그 기능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https://fzari.com/910

 

바흐는 오늘의 두 장면 모두에서 리피에노를 제외한 두 개의 합창단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각 장면에서 합창단을 사용하는 방법이 참 흥미롭습니다. 극음악 작곡가로서 바흐의 천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지요. 앞선 합창에서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라고 말하는 무리들은 아마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자신들의 의견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반면 68절은 몇몇의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며 하는 말로서 우리말 성경에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독일어 성경에서는 ‘EtIiche’ 두서너 명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흐는 두 개의 합창단을 가지고 이 장면을 각각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66절의 합창에서는 모든 파트가 순서대로 등장합니다. 각 합창단이 4성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총 8개의 성부가 있는데 한 박자의 시간차를 가지고 8개의 모든 파트가 순서대로 등장합니다. 실로 대단한 입체감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마치 신나는 일이 생긴 양 예수를 죽이려하는 무리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합창단이 소프라노-테너-알터-베이스 순으로 등장하여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고 외치는데 한 박자 바로 뒤에 두 번째 합창단이 소프라노-알토-베이스-테너 순으로 똑같이 노래합니다


42번 곡의 합창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Er ist des Todes schuldig’의 도입 부분. 두 개의 합창단 총 8개의 파트가 한 박자의 시간차를 두고 등장함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의 광기를 표현한다.


 

제가 얼마 전에 사무실용으로 이어폰을 샀습니다. 귀를 막고 음악을 듣는 것 같아 원래 이어폰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다른 직원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어쩔 수 없이 구입했습니다. 이왕 사는 거 어떤 기능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조금 비싼 ‘7.1 채널 지원 모델을 선택했는데 얼마 후 제 아들이 데모 음악을 틀어 주며 설명해 준 그 기능에 크게 놀랐습니다. 고작 두 개의 작은 스피커가 달려 있는 줄로만 알고 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7개 방향의 각기 다른 스피커에서 들리는 효과를 구현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방향이 따로 따로 구별되어서 들리는 데모 음원을 통해서 들으니 너무나도 놀랍게도 정말 7개의 방향과 높고 낮은 위치마저 구현하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술적 진보였습니다. 그런데 바흐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두 개의 합창단 여덟 파트를 통해서 그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68절에 해당하는 합창은 몇몇 사람이 예수의 뒤쪽 양 옆에서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희롱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하는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때린 사람을 찾아보라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말하며 예수를 희롱합니다. 독일어 성경으로 읽어보면 저들이 얼마나 악한지 더 실감이 됩니다. 예수의 뒤에서 침을 뱉고 뺨을 때려가며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Weissage uns, Christe, wer ist's, der dich schlug/그리스도라니 예언이나 한 번 해보아라, 지금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춰보아라!’


                 모욕당하는 그리스도, 마티아스 그뤼네발트(15031505),

                뮌헨 알테피나코텍 소장.


바흐는 이 장면에서 두 개의 합창단을 화성적으로 배치합니다. 앞선 합창처럼 8개의 파트가 순서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합창단이 4성부씩 한 번에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즉 예수의 오른쪽 뒤에서 때리는 사람과 왼쪽 뒤에서 때리는 사람 두 파트로 나눈 것입니다. 대신 화성적으로 울리기 때문에 그 장면의 잔인함과 비극성을 살리고 있습니다. 이 경우는 7.1채널이 아니라 양쪽에 놓인 스피커에서 번갈아서 울리며 써라운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스테레오로 녹음된 음반을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통해 들으시면 그 차이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의 실황 연주에서도 이 두 개의 합창단을 오케스트라 뒤 양쪽 끝에 나누어 배치하여서 바흐의 음향 효과적 의도를 극대화합니다. 한편, 리피에노 합창단의 위치는 공연장이나 예배당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마태수난곡이 초연되었던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경우에는 예배당 양 옆에 자리한 2층이나 예배당 맨 뒤쪽, 옛날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는 2층 테라스에 리피에노 합창단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때린 자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입니다

 

이 경악스런 합창 뒤에 나오는 코랄은 그 고백이 마치 입에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듯 저들의 조롱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시작합니다. 코랄을 부르는 이들이 얼마나 예수의 수난에 아파하고 그 장면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때린 이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코랄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세속노래로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이 작곡한 ‘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인스부르크여, 난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1485)’의 멜로디에 독일 종교개혁의 중요한 신학자요 시인이었던 파울 하르트(Paul Gerhardt)가 가사를 붙인 곡입니다. 마태수난곡의 16(10)번 곡에서도 쓰였는데 16번곡에는 코랄의 5절 가사가, 오늘의 마지막 장면 44번곡에는 3절 가사가 쓰였습니다. 오늘도 꼭, 우리말로 코랄을 함께 불러보시기 바랍니다.